191화.
똑똑.
그때 열린 문틈으로 누군가 불쑥 나타났다.
“흠흠, 모나드 백작님?"
“네.”
그는 공작성에서 파견된 엘파사의 행정관이었다.
이곳 엘파사는 제법 큰 규모의 성이었는데, 십수 개의 마을이 합쳐진 규모의 영지를 공작가에서 임명한 행정관이 영주로서 다스리고 있었다.
“저, 마을 주민 대표가 꼭 뵙고 싶다고 청합니다.”
마을 주민 대표?
잠시 주드와 시선을 교환한 다음 줄리엣은 어깨를 으쓱했다.
"들여보내세요.”
“들어오게, 자코보!"
들어온 것은 나이가 지긋한 초로의 남자였다.
순박한 인상과 반대로 노동에 익숙한 체격, 조금 구부정한 자세.
줄리엣은 남자의 직업을 알 것 같았다.
"광부네요.”
“예, 이곳 엘파사의 마을들은 대부분 광산촌입니다.”
엘파사의 행정관이 설명했다.
“주로 소금 광산과 사파이어 광산이 가장 규모가 큽니다.”
'사파이어 광산?’ 줄리엣은 어쩐지 엄습하는 기시감에 고개를 갸웃했다.
왤까. 뭔가 생각날 듯 말 듯했다.
“이리 가까이 오게, 자코보.”
행정관의 말에 중년 남자 하나가 주춤거리며 그들의 앞으로 다가왔다.
칼을 찬 기사와 말을 타기 쉬운 간소한 옷차림의 여자.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갈등하던 자코보는 일단 고개를 푹 숙였다.
“도와주십시오, 나으리!”
“높으신 분은 저쪽입니다."
주드가 정중하게 줄리엣을 가리켰다.
남자는 태세 전환이 무척 빠른 촌장이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나으리!"
“……무슨 일이죠?"
줄리엣은 스스로가 조금 한심한 듯한 기분을 느끼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어린 아이들이 피를 흘리면서 죽어 가고 있습니다!”
이미 머리가 반쯤 벗겨진 초로의 남자는 이 마을의 촌장이라고 했다.
“부디 불쌍한 어린 것들을 살려 주십시오!"
대충 상황을 파악한 줄리엣은 좀 난처해졌다.
"마을에 의사가 없나요?"
“없는 지 몇 달 되었습니다.”
영주의 설명에 의하면, 마을이 점점 궁핍해지니 의사의 수가 줄었고, 그나마 몇 남아 있던 의원들도 지금은 며칠째 연달아 내리는 폭설 때문에 길이 막혀 큰 마을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고 나도 의사가 아닌데..….’
줄리엣은 난감해졌지만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표정을 보니 차마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뭐라도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아이들은 어디 있나요?"
게다가 딴생각을 버리기 위해서는 차라리 몸을 움직이는 게 나았다.
*
핑!
공기를 가르고 날아간 커다란 화살이 정확히 마수의 목을 꿰뚫었다.
공작가 기사단의 부단장답게, 군더더기 없는 솜씨로 장궁을 갈무리하며 밀란 경이 정중히 간언했다.
“줄리엣 양이요, 화나셨을 겁니다.”
"알아.”
바로 옆에서 검날에 묻은 핏방울을 훑어 내리면서, 레녹스가 짤막하게 대꾸했다.
화가 났겠지. 안 그래도 화를 낼것 같아서 몇 자 적어 두고 오긴 했지만 그걸론 부족할 것이다.
레녹스는 담담히 긍정했다.
하지만 그로서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불과 며칠 전, 제르망 백작 행세를 하던 뱀과 마주쳤을 때도 그랬다.
마수를 처리하고 다시 연회장으로 뛰어 들어왔을 때, 그가 목도한 것은 뱀과 대치한 채 석궁을 겨누고 있던 줄리엣이었다.
다행히 늦기 전에 그녀를 끌어내긴 했지만, 그가 꿈에도 보고 싶지 않던 광경이었다.
줄리엣은 놀랄 만큼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사실 한 번도 입 밖으로 낸 적없지만, 줄리엣이 돌아온 이후 그는 늘 전전긍긍했다.
가벼운 한숨 한 번, 눈짓 한 번.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때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혹여 돌아온 걸 후회하고 있으면 어쩌나, 갈급해지곤 했다.
줄리엣의 의심과는 달리, 전날의 충동적인 고백은 꾸며낸 게 아니었다.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그녀를 끌고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안전한 곳은 없어..'
그들이 어디에 있든, 그 지긋지긋한 뱀은 그를 뒤쫓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그 뱀을 한시라도 빨리 찾아서 없애버리는 거였다.
서걱!
다른 기사인 하딘이 별 동요도 없이 마물의 수급을 베어 냈다.
그들은 현재 빠른 속도로 도망친 뱀이 남겨 둔 흔적을 쫓고 있었다.
결계를 부수고 도망친 뱀은 하늘을 할퀸 듯한 흔적을 남겨 놓았다.
하지만 그 흔적은 지상에서도 똑같이 찾아볼 수 있었다. 그 궤적 그대로, 지상에서는 마수들이 출몰했던 것이다.
“주군? 왜 그러십니까?”
레녹스는 멈칫하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밋밋한 디자인의 장식 가죽끈이었다.
새것임이 분명한 가죽끈이 깨끗이 끊어져 있었다.
"악운을 대신 막아 준대요.”
유치한 미신이다.
하지만 레녹스는 문득 위화감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조용했지?"
“예?”
교활한 뱀의 행적을 뒤쫓는 여정치고는 지금껏 지나치게 순조로웠다.
이렇게 간단할 리가 없는데.
“왜 그러십니까?”
끊어진 가죽끈 하나만을 근거로 의심하는 것은 지나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껏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그의 목숨을 몇 번이고 구한 것은 바로 그 본능이었다.
“돌아간다.”
한번 판단을 내리자 행동에는 거 침이 없었다.
레녹스는 곧장 말 위에 올라타말머리를 돌렸다.
“예?”
“주군!”
"어디로 말입니까?"
등자를 밟으며 그가 짤막하게 답했다.
"엘파사.”
* * *
“괴혈병이네요.”
다행히 줄리엣이 아는 증상이었다.
주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괴혈병? 하지만 그건 땅을 오래 떠나 있으면 걸리는 병이잖습니까?”
괴혈병은 선원병이라고도 불렸으므로 주드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그러자 촌장이라는 남자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저, 그럴 리가 없습니다, 마님.
여기 사람들은 다들 조상 대대로 땅만 파먹고 산 사람들입니다요.
혹시 돌림병이 아닐까요?"
'마님' 이랬다가 '백작님' 이랬다가.
호칭이 자유분방했다.
“전염병 아니에요.”
하지만 줄리엣은 고개를 저었다.
“괴혈병은 땅이나 바다와는 상관없어요. 먹는 게 부족해서 걸리는 거죠. 내가 의사는 아니지만 옮는 병은 아니에요.”
줄리엣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에 트레모일의 은광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촌장님, 마을 사람들은 요즘 뭘 먹나요?"
“아, 얼마 전부터 감자가 떨어지고 상인들도 폭설 때문에 발이 묶여서..."
전염병이 아니라는 말에 한결 안도하며 자코보가 주절주절 사정을 설명했다.
"따로 약 없이도 야채랑 과일을 섭취하면 쉽게 낫는 병이에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무심코 거기까지 말하며 눈가를 문지르던 줄리엣은 간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수십 쌍의 눈들과 마주쳤다.
'..…내가 방금 뭐라고 한 거지?'
아차 싶어서 줄리엣은 혀를 깨물었다.
먹을 게 풍부하면 애초에 병에 안 걸렸겠지!
게다가 조금 전 폭설로 상인들의 걸음이 끊겼다는 얘기를 듣지 않았던가.
“주드.”
“네, 아가씨.”
“마차에 보면 설탕에 절인 과일이 있을 거예요.”
설탕 라임 절임이나 말린 과일같은 거.
준비성 투철한 하녀들은 오랜 마차 여행에 대비해 항상 간식을 넉넉히 챙겨 두곤 했다.
“그것 말고도 비슷한 게 보이면 있는 대로 가져다주세요.”
공작가 사람들은 엘파사의 영주대리와 함께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말린 과일과 식량 등을 나눠주었다.
공작성까지 여정이 많이 남지 않아서 다행이다.
사실 이렇게까지 도와줄 생각은 아니었지만, 줄리엣에게는 이들을 도와야 할 이유가 다음 날 생겼다.
다음 날 아침, 줄리엣과 공작가 사람들은 졸린 눈을 비비며 영주관에서 아침 식사를 대접받았다.
전날 늦게까지 물자를 나눠주며 돌아다닌 덕분에, 주변에 공작성에서 오신 '높으신 분'을 구경하러 온 마을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단걸 빼면 전날 저녁과 거의 비슷한 식탁이었다.
'아니? 이런 게 있으면 어제 내놓든가?'
조촐하지만 말린 메추리 요리가 올라왔다. 메추리 고기도 괴혈병 치료에는 좋은 재료인데…….
와글와글한 가운데 어쩐지 구경거리가 된 기분으로 공작가 사람들은 아침 식사를 했다.
영주와 마을 사람들의 대화를 대충 들으며 묽은 스튜를 몇 입 떠먹던 줄리엣은 체할 뻔했다.
“콜록.”
"괜찮으십니까?”
옆에 있던 주드가 등을 두드려 주었다.
“....…사파이어 광산이요?"
“예, 백작님.”
아침 식사 자리에 초대된 자코보가 마을에 대한 설명을 하던 중이었다.
“몇 달 전부터 공작가 대신 황실에 사파이어를 바치게 되면서, 마을 사정이 급격히 안 좋아졌습니다."
어쩐지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였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