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190화 (187/229)

190화.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잠시 눈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말의 갈기를 만지작거리다가, 줄리엣은 힐끔 제 곁에 서 있는 남자를 훔쳐보았다.

체고가 높은 말안장 위에 앉아 있었으므로, 줄리엣은 그를 내려다 보는 흔치 않은 각도로 레녹스 칼라일을 관찰할 수 있었다.

검은 머리칼과 반듯한 이마, 심지어 어깨에 걸친 겨울용 겉옷까지.

그를 구성하는 요소요소는 무채색에 가까운데, 누구든 돌아보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화려한 인상인 것도 재주다 싶었다.

하지만 줄리엣은 화려한 수도의 연회장보다는 아무것도 없는 흰눈밭이 그와 더 잘 어울리는 배경이라고 생각했다.

'아, 맞아.'

그를 대놓고 훔쳐보던 줄리엣은 문득 망토의 주머니를 뒤졌다.

"이거요, 부토니에는 아니지만."

수도를 떠나기 직전에 줄리엣이 산 장식끈이었다.

값비싼 물건은 절대 아니지만, 나름 유노 정화제의 기념품으로 흔히 팔리는 물건이었다.

“악운을 대신 막아 준대요."

레녹스는 한참 동안 장식끈을 손에 쥐고 보기만 했다.

그렇게까지 감격할 물건은 또 아닌데. 줄리엣은 정직하게 덧붙였다.

“직접 만든 거 아니고 산 거예요.”

킥, 하고 조금 웃는 것 같더니,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레녹스.”

그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생각해요?"

그러자 레녹스가 줄리엣을 한 번 보더니 싱긋 웃었다.

“이대로 너를 납치해서 도망치면 어떨까 하는 생각.”

줄리엣은 잠시 눈만 깜빡였다.

"도망?”

“응.”

순간적으로 그녀의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가득 떴다. 정작 레녹스는 담담한 특유의 무표정 그대로였다.

'도망? 왜?'

내색은 안 했지만, 그도 역시 뱀을 잡았다가 눈앞에서 놓친 게 상심이 컸던 걸까?

아니면 대규모의 인원을 이끌고 북부로 돌아가는 게 피곤해서?

저 많은 사람들이 압박감으로 느껴졌나?

줄리엣이 의식의 흐름대로 온갖 생각을 하는 동안 레녹스는 잠시 피곤한 듯 눈가를 문질렀다.

그제야 줄리엣은 그가 수도를 떠난 이래 휴식을 취하는 게 처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좀처럼 피로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는 그였지만, 지난 며칠간은 잠이나 제대로 잤는지 모르겠다.

레녹스는 마차들이 있는 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아마 행렬이 다시 출발할 때가 되지 않았는지 가늠하는 것뿐이겠지만, '도망칠까?' 하는 말을 들어 버린 직후라, 줄리엣의 눈에는 그가 꼭 정말로 도망칠 타이밍을 재는 사람처럼 보였다.

줄리엣이 의식의 흐름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를 응시하는데, 레녹스가 씩 웃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때, 도망갈까?”

어쩐지 소년처럼 보이는 미소였다.

그의 손이 고삐를 바투 움켜쥐었다.

“아무도 너를 모르고, 누구도 못찾아올 곳으로.”

"......."

“갈래, 줄리엣?”

줄리엣은 레녹스 칼라일이라는 남자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번의 생을 통틀어 수려한 옆얼굴이 지쳐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날 때부터 지배자로 태어난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스물아홉의, 젊다 못해 새파랗게 어린 남자가 처음으로 제 나이대로 보였다.

“....…왜요?”

줄리엣은 저도 모르게 고삐를 잡은 그의 손을 건드렸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훌쩍 사라질 것 같았다.

“왜 도망치고 싶은데요?"

줄리엣은 그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레녹스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전혀 의외였다.

“그 뱀의 본체가 깨어나면서 다시 겨울을 몰고 왔잖아.”

서늘한 붉은 눈이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영원히 계절이 바뀌지 않으면, 그 핑계로 너를 영원히 잡아 둘수 있겠지.”

그런 생각을 했어?

줄리엣은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건 남부에서 레녹스가 그녀에게 했던 약속이었다.

6개월간 그의 곁에 남아 있는 조건으로,

"레녹.”

“이번에는 잘할 수 있어.”

줄리엣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가 손을 겹쳐왔다.

여전히 시선은 멀리 고정한 채로,

“이번에는 너를 혼자 두지도, 울리지도 않을 것 같은데.”

"도망치는 것도 쉽지 않네.”

순간 줄리엣은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를 끌어안아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농담이야.”

그가 담백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위로에 재주가 없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줄리엣이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이, 그는 다시 줄리엣을 데리고 행렬로 돌아왔다.

“출발하지.”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길을 서둘러, 그들은 엘파사의 영주관에 도착했다.

엘파사는 공작령의 일부로, 칼라 일가의 가신들 중 선출된 영주가 대신 다스리고 있었다.

엘파사의 영주관은 돌벽만큼이나 오래된 석조 건물이었고, 그들은 오랜만에 지붕 있는 방에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날 밤 줄리엣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밤늦은 시각까지 복도 건너편, 그의 침실에 불이 밝혀져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도망갈까?”

농담 속에 섞인 진심이 뼈아팠다.

* * *

“..…나쁜 자식.”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줄리엣은 바로 전날 그토록 애틋해 했던 그 남자에게 욕을 퍼부었다.

눈을 뜨니 레녹스 칼라일은 이미 영주관을 떠난 뒤였다.

편지 한 장 남기지 않고 기사단을 챙겨서, 줄리엣이 잠들어 있는 틈을 타 먼저 뱀을 쫓아간 것이다.

"같이 도망갈까.”

‘그렇게 말했던 주제에!’ 줄리엣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전날의 그 표정, 그 대화까지.

일부러 연약한 척, 동정심을 사놓으려고 연기한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평소 칼라일 공작의 악명을 떠올리면 충분히 타당한 추론이었다.

애틋함이 분노와 애증으로 돌변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저, 공작님은 어디까지나 줄리엣양의 안전을 염려하셔서……….."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줄리엣을 진정시키려고 했으나 소용없었다.

"어떻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사실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줄리엣은 이전에도 그의 계략에 넘어가 '안전하게 뒤에 남겨진 적이 있었다.

'뭐? 이번에는 잘할 수 있어?'

기가 막혀서!

똑같은 수법에 두 번째 당했다는 게 은근히 열 받았다.

분노를 삭이던 줄리엣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남은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줄리엣과 눈이 마주치자 공작가 기사단의 막내인 주드가 움찔했다.

“그냥 자고 있는 저를 두들겨 깨워서 모나드 양을 부탁한다고 하셨다고요! 진짭니다!"

“됐어요. 빨리 다른 사람들한테 가서 짐 챙기라고 해요! 당장 출발할 거니까.”

줄리엣이 머리를 높이 올려 묶으며 재촉했다.

하지만 주드는 짐을 챙길 생각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와.”

눈을 빛내며 감탄하는 주드를 보고 줄리엣은 기분이 나빠졌다.

“뭐가 '와' 예요?”

“아, 실은 주군이 말씀하신 게 있거든요.”

주드는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그게 뭐예요?”

"아가씨가 딱 그렇게 말하면서 쫓아올지도 모른다고 하시면서, 이걸 주셨습니다.”

주드는 왠지 신이 난 표정으로 작게 접힌 쪽지를 펼쳤다.

“지금 출발해 봐야 마차로 말을 따라잡을 수 있을 리 없을 거고, 어차피 늦은 거 얌전히 공작성으로 가는 게 낫다는데요?"

“제, 제 의견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써 있습니다.”

줄리엣의 못마땅한 표정이 풀리지 않자 주드는 또 접힌 쪽지 하나를 슬쩍 꺼내 들었다.

“그래도 납득하지 못하면 이렇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아가씨는 나비도 잃으셨으니, 따라와 봤자 방해가 된다고요.”

“...…하."

줄리엣은 어이가 없다 못해 화가 누그러졌다. 그리곤 문득 궁금해졌다.

“그 종이 몇 개나 있는 거예요?"

“세 개요. 이게 마지막입니다."

주섬주섬 세 개째 쪽지를 꺼내 드는 주드를 보고 줄리엣은 실소를 터뜨렸다.

뼈아프지만, 레녹스의 말은 이치에 맞았다.

"알겠어요. 알겠다고요.”

누군가는 남은 일행들을 이끌고 공작성으로 가는 게 현명했다.

그리고 나비들도 없는 이상, 줄리 엣은 자신의 몸을 건사할 수 있다.

고 확신하기 어려웠다.

냉정을 되찾은 줄리엣은 마지못해 납득했다.

얄밉긴.

줄리엣은 레녹스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 역시 줄리엣의 속을 꿰뚫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쪽지인 '따라와 봤자 방해'에서 쫓아갈 의욕을 잃은 줄리 엣은 영주관의 안락의자에 털썩주저앉아 주드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예?”

"마지막 종이도 줘 봐요."

"아, 넵.”

주드는 냉큼 마지막 세 번째의 종이쪽지를 건네주었다.

그래도 '너 따라와 봤자 쓸모없다'는 좀 심하지 않아?

뾰로통한 표정으로 마지막 쪽지를 펼쳐 든 줄리엣은 잠시 말을 잊었다.

“그건 뭐라고 써 있습니까?"

줄리엣이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한참 쪽지를 들여다보는 걸보곤 주드가 궁금하단 듯 고개를 들이밀었다.

[도주용 짐은 최대한 간단히 챙길것.]

“이게 무슨 뜻입니까?"

“그냥, 그런 게 있어요.”

주드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줄리 엣은 쪽지를 도로 접어 집어넣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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