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나비들의 장난이 점점 심해지던 어느 날, 지혜로운 영주님이 심술궂은 나비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지혜로운 영주님이 먼저 물었어요.
'너희는 못 가는 곳이 없다던데, 그게 사실이냐?'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어!”
'다시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심해의 감옥은?'
'물론!’
'출구 없는 사막은?'
'갈 수 있어!’
'그렇다면 이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작은 호리병은?'
'!'
‘당연하지!?
그 순간, 자만한 나비들은 영원히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제야 나비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눈치채고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어요.]
“..……이게 끝이야?”
“끝?"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났다.
줄리엣은 허탈해서 팔랑팔랑 뒷장을 넘겨봤지만 거기부터는 다른 이야기였다.
줄리엣은 이야기를 조용히 곱씹었다.
장난꾸러기 나비라니. 너무 온건한 표현이었지만, 정말 이런 식으로 속아서 스스로 갇힌 거라면 나비들이 분노에 차 있던 것도 이해가 갔다.
인간이란 늘 유리한 쪽으로 이야기를 지어내는군.
불쑥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서 줄리엣은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사두마차 안이 비좁게 느껴질 정도로 커다란 흑표범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검은 표범의 모습을 발견한 줄리 엣은 조금 기뻤다.
“안녕, 야옹아.”
(무례하긴.)
검은 표범은 점잖게 혀를 찼지만, 이전과는 달리 거울에 비친 검은 표범의 몸을 칭칭 옥죄고 있던 금빛 사슬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 뱀이 부상을 입고 도망친 것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뱀의 힘이 약해져서, 검은 표범에게 가해지는 제약이 약해졌다든지.
'그러면 아주 소용없는 짓은 아니었네.’
줄리엣이 조금 뿌듯해하는데 검은 표범이 거만하게 물었다.
(이건 어디서 난 거냐?)
“아는 친구가 줬어.”
(내가 아는 이야기와는 상당히 다른걸.)
“어떤 부분이?”
(네 조상이 '현명한 영주님’ 으로 등장하는 부분이.)
줄리엣은 인상을 썼다. 이 맥락에서 조상이라고 하면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퀴리에 모나드?”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군.)
퀴리에 모나드는 그녀의 선조이자 초대 모나드 백작이었다. 줄리 엣에게는 십대조 할아버지쯤 됐다.
그는 제국의 초대 황제로부터 ‘수호자'의 이름을 하사받은 개국공신 이기도 했으며, 백작가에 수상한 열쇠를 가보로 물려준 인물이기도 했다.
(그놈은 사기꾼이었어.)
검은 표범은 신랄하게 비웃었다.
(저 멍청한 나비들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고는 약속을 지키는 대신 영원히 가둬 버렸지.)
“무슨 약속이었는데?"
(공을 세우게 해 주면 풀어 주겠다고 약속했겠지.)
줄리엣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
퀴리에 모나드가 악령의 힘을 이용해 공을 세웠으리란 부분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줄리엣이 이해할 수 없던 것은 그 다음 부분이었다.
“풀어 주다니?”
(아티팩트에 묶여서 인간의 노예로 부려지는 대신, 속박을 깨고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겠다는 거지.)
"그게 가능한 거였어?' (하지만 네 조상이란 인간은 속임수에 능한 자였던지, 아니면 겁쟁이였던지. 계약을 이행하는 대신 그 나비들을 속여서 필드 안에 가둬 버렸다.)
"필드(field)?"
(인간의 언어로는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너도 본 적 있을 텐데? 그 나비들이 너를 문 앞으로 여러 번 데려갔었잖아.)
아.
줄리엣은 언젠가 의식을 잃었을 때, 커다란 문을 통해 자신의 과거와 마주했던 일을 떠올렸다.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어!)
실제로 지하 감옥이 무너졌을 때 정말로 밖으로 나가는 ‘문'을 찾아서 내보내 주기도 했고.
뭔가 이해가 갈듯 말 듯 했다.
'그 필드라는 게 단순히 공간이 아니라 사람의 기억을 뒤지는 것도 포함인가?'
확실히, 이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은 적 있었다.
‘차원을 넘나들면서 자유자재로 부정적인 에너지를 먹어 치우던 괴물' 이라든가.
줄리엣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 조상이…… 퀴리에 모나드가 나비들을 아티팩트에서 풀어 주겠다고 해 놓고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말이지?”
(그래.)
줄리엣은 조상의 사기 행각보다는 그 나비들이 순진하게 속아 넘어가 수백 년을 갇혀 있었다는 게 좀 더 꺼림칙했다.
"악마를 잡는 데 필요한 두 가지는 자만심과 속임수라는 말이 있단다.”
언젠가 외조부인 리오넬 르바탄이 그런 얘기를 해 준 적이 있었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야? 아티팩트에서 벗어나서,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게?"
(그렇겠지.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한 곳에 묶여 있는 건 고통일 테니까.)
“그건 어떻게 하는 건데?"
(뭘 어떻게 해?)
“아티팩트에 묶여 있는 거, 풀어주려면 뭘 해야 해?”
(왜, 네가 대신 풀어 주려고?)
검은 표범이 킬킬거렸다.
(그보다는 그 멍청한 나비들의 숨이 붙어 있기를 바라는 게 좋을 거다.)
아야.
줄리엣은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내심 뱀을 잡으면 나비들이 자동으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허무하게 뱀을 다시 놓쳐서, 그녀의 나비 마물들은 어떻게 된 것인지 불안해하던 차였다.
차르륵.
마차 바퀴가 멈추는 소리가 들리더니, 행렬의 앞쪽에서 기사들이 외쳤다.
“방금 경계를 넘었습니다!”
지금부터는 북부의 영역이라는 뜻이었다.
똑똑.
“잠시 쉬어 가시죠.”
밖에서 기사가 문을 두드렸다.
그와 동시에 검은 표범은 흔적도 없이 모습을 감춰 버렸지만.
대신 새끼 용이 번쩍 눈을 떴다.
“꾸륵?”
마차 문을 열어 주자 오닉스가 제일 먼저 밖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용이 추위를 탈 것 같지는 않았지만 하녀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한 덕분에 오닉스에게도 후드가 달린 작은 망토가 생겼다.
연한 하늘색 망토를 입은 새끼 용은 난생처음 보는 눈이 신기한 듯 눈밭 위를 데굴데굴 마구 굴러다녔다.
하압.
오닉스는 커다란 눈덩이를 욕심껏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가 펄쩍 뛰어올랐다.
"므양?”
에퉤퉤.
새하얀 눈은 차갑기만 하고 아무 맛이 없었다.
새끼 용이 질색하며 고개를 부르르 흔들자 구경하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부터는 공작령입니다."
마차 밖으로 나올 수 있게 손을 잡아 주며 기사가 말해 주었다.
눈 덮인 풍경을 보며 줄리엣은 잠시 감상에 젖었다.
"결국 돌아왔네.”
북부를 떠난 지 꼬박 수개월 만이었다.
계절이 바뀌고도 남았어야 하지만 때아닌 겨울이 찾아온 탓에 겉으로 보기엔 그녀가 떠났을 때와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북부, 겨울의 편애를 받는 땅.
고개를 든 줄리엣은 말을 끌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검은 머리의 의남자를 발견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줄리엣.”
말고삐를 쥐고 다가온 레녹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에게 손을 요구했다.
“이리 와.”
줄리엣은 순순히 커다란 흑마에 가까이 다가갔다.
레녹스는 줄리엣을 안장 위에 옆안장으로 앉혀 준 다음, 그 자신은 고삐를 쥐고 흑마를 천천히 걷게 했다.
눈길을 마차와 말로 이동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기사들이 말과 마차와 행렬을 정비하는 동안 그들은 눈 덮인 숲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
푸륵.
혈통 좋은 흑마는 사나운 생김새와는 달리 점잖아서, 오랜만에 줄리엣을 태우고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눈밭을 걸어 주었다.
줄리엣을 말에 태운 채 고삐를 쥐고 숲 방향으로 걷던 레녹스는 마차 행렬이 보이는 적당한 거리에 멈춰 섰다.
여유를 즐길 상황은 아니었지만 눈 내리는 평원을 구경하는 건 꽤 근사했다.
“걱정돼?"
“네?”
"아까부터 손을 가만 못 두고 있잖아.”
"아….”
줄리엣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장갑 한 짝을 잃어버린 덕분에 짝 안 맞는 장갑을 비틀고 있었던 모양이다. 줄리엣은 별생각 없이 남은 한 짝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무슨 걱정.”
“그냥 이런저런 생각이요. 공작성에도 눈이 많이 쌓였을 텐데, 온실 지붕이랑 도개교가 괜찮을지 모르겠고, 뒤뜰에 내려오는…….”
"눈 여우가 굶어 죽을까 봐 걱정이다?”
아?
줄리엣은 순간 놀란 표정으로 레녹스를 쳐다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거요.”
꼭 그녀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듯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그 뱀 말이에요."
줄리엣은 조심스레 말했다.
"아주아주 오래 살았다던데, 어떻게 증오하면서 사는 게 가능한지 모르겠어요.”
검은 표범은 그 뱀이 칼라일 가문의 인간들을 증오하다 못해 미쳤다고 했다.
하지만 줄리엣은 선뜻 그 설명을 납득할 수 없었다.
"글쎄.”
레녹스는 묻지도 않고 줄리엣의 손에 검은색 가죽 장갑을 끼워 주었다.
남자용 장갑은 그녀에게는 턱없이 컸지만.
줄리엣은 잠자코 크고 모양 좋은 손이 느리고 섬세하게 움직이는 걸 보기만 했다.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증오하는데 수백 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닐지도 모르지.”
어쩐지 그답지 않게 감상적인 말이라 줄리엣은 희미하게 웃었다.
장갑에 남아 있는 온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