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신전의 의뢰를 받아 석판을 감정하러 왔던 로이는 줄리엣에게만 슬쩍 진실을 알려주었다.
로이는 이게 엉성하게 후대에 만들어진 위조품이라고 했다.
수집가들에게 비싼 값에 팔아먹으려고 교묘하게 만들어진 모조품말이다.
'!’
‘이제 그만하게!’
한편 황제는 그렇게 외치고 싶은 것을 혀를 깨물고 간신히 참고 있었다.
“이번엔 또 뭔가?"
황제는 이제 줄리엣이 뭔가 테이블 위에 꺼내놓을 때마다 노이로 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리오넬 르바탄부터 죽은 줄 알고 있었던 기네스 후작까지.
족히 수십 년 치 충격을 이 자리에서 한꺼번에 받는 기분이었다.
'바로 그걸 노린 거지.'
줄리엣은 이 예언서가 조작된 걸 들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지금의 황제는 정신적으로 바싹몰려 있는 상황이었다.
행여나 나중에 이 예언서가 완전 가짜라는 게 들통나도 상관없었다.
'그땐 모든 게 다 끝나고 난 다음일 테니까.'
로이에게서 이 석판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줄리엣은 줄곧 이걸 써먹을 만한 타이밍만을 재고 있었다.
“이 예언서의 해석을 제국어로 옮기자면 '검은 날개를 드리운 채 재앙과 함께 왕이 온다.'라고 해요.”
줄리엣의 말이 끝나는 바로 그때였다.
삐이이.
화답하듯 멀리서부터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까만 무언가가 빠르게 배를 향해 날아왔다.
새인가? 하지만 무슨 새가 저렇게 크담?
그러나 갑판 위에 있던 사람들은 이내 쏜살같이 그들 쪽으로 날아오는 것이 새와는 전혀 다르게 생겼다는 것을 알고 기겁했다.
“…용?”
“용이다!"
때마침 수평선 위로 태양이 떠올라 있었다. 작지만 완벽한 실루엣을 가진 검은 용의 출현은 마치 어떤 신비로운 재앙의 전조처럼 보였다.
"이런, 세상에………!"
황제의 군사들은 경악한 채 우왕좌왕했다.
“삑!”
오닉스는 우아하게 날개를 접으며 돛대 위에 내려앉는 것으로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지고 지엄하신 황제 폐하. 저는 신하된 도리로 이 나라 황실의 권위가 정말로 걱정된답니다.”
줄리엣은 세상에서 가장 무해해 보이는 표정으로 속살거렸다.
“이 예언서의 내용과 저 어린 용이 대중에 동시에 공개된다면 무수히 많은 제국민들은 과연 황실의 권위를 뭐라고 생각하게 될지…”
황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가 리오넬 르바탄의 배에 올랐을 때부터 이미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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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뒤, 리오넬르바탄의 배 위에 남은 것은 조손단 두 사람이었다.
리오넬 르바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손 간은 조용해진 갑판 위에 나란히 앉아서 수평선을 보고 있었다.
“제가 멋대로 일을 벌여서 화나셨어요?”
“그럴 리가.”
줄리엣은 그제야 조금 웃었다.
황제는 줄리엣이 제시한 조건 세가지를 모두 마지못해 수용했다.
어차피 당장 달라질 건 없었다.
줄리엣은 황제가 정말로 공작가에 도움을 줄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단순히 훼방을 놓지 못하게 압박하려는 수단에 가까웠고, 모나드 백작 부부의 죽음에 얽힌 진상을 밝히는 일도 시일이 걸릴 터였다.
게다가 리오넬 르바탄은 동부에서 정말로 왕처럼 군림하며 살아왔고, 또 그의 사면령이 공표되기까지는 절차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최소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수도의 거리를 거닐 자유가 수십 년만에 생긴 것이다.
“언제부터 꾸몄던 거냐?”
“별로 오래되진 않았어요."
줄리엣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할아버지가 수도에 와 계시는 동안 에셀리드가 걱정하길래, 안전장치가 될만한 게 없을까 좀 생각해 봤거든요.”
“허."
리오넬 르바탄은 어색하게 목을 가다듬었다.
“……어쨌든 고맙구나. 네 덕분에"
“그 인사는 북부에 다녀와서 받을게요.”
줄리엣이 생글거리면서 그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손녀는 다시 북부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 중이었다.
"다시 뵐 때까지 건강하세요.”
“줄리엣.”
“네?”
“이게 네 선택이냐?”
잠시 눈을 깜빡이던 줄리엣은 싱긋 웃었다.
“그냥 잠시 북부로 돌아가는 것 뿐이에요. 선택 같은 게 아니라요.”
리오넬 르바탄은 줄리엣이 굳이 생략한 말까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해 줄 수 있는 말이라고는 잘 다녀오라는 당부가 전부였다.
“그래, 몸조심 하거라."
"네, 그럴게요.”
줄리엣은 빙그레 웃으며 가볍게 포옹했다.
"아, 그리고.”
리오넬 르바탄이 지나가듯 가벼운 어조로 덧붙였다.
“그놈에게 전해다오.”
"네? 뭐라고요?”
"아까 황제가 저 반역자의 편을 들 자가 있으면 어서 나서라고 했잖으냐.”
“그랬었죠?"
분명 황제가 그렇게 말했었다.
'지금 저 반역자의 편을 들 자가 있으면 어서 나서게! 내 친히 함께 사형대에 세워 줄 테니!’
-라고.
대답하면서 줄리엣은 조금 불안해졌다. 외조부의 눈이 장난스럽게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그렇게 외쳤을 때, 내 그 칼라일 녀석이 팔짱만 끼고 꼼짝도 않는 것을 아주 잘 봐 두었다.
고 말이다.”
10. 북부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공작령입니다.”
여러 대의 마차가 줄지어 설원을 내달렸다.
북부 공작령으로 돌아가는 칼라일 공작가의 일행들이었다.
마차가 스무 대나 되었고, 기사단의 반절이 움직이는 대인원이었다.
대규모 인원이다 보니 게이트를 이용해도 좀처럼 속력이 나지 않았지만 그들의 발목을 잡아채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날씨였다.
북부는 대륙에서 봄이 가장 늦게 오는 지역이었다. 완전한 여름이 오기 전까지는 눈이 녹지 않는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계절에 눈이라니요?"
줄리엣이 탄 마차 옆으로 나란히 말을 걷게 하던 기사들이 혀를 찼다.
계절상으로는 엄연히 늦봄이었지만 그들은 눈 덮인 평원을 헤치며 북부로 이동해야 했다.
심지어, 지금도 조용히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올해 수확량이 걱정이군요.”
이건 전부 그 뱀 악령이 결계를 깨뜨리고 도망쳤을 때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거대한 뱀이 꼬리를 끌며 하늘 저편으로 날아간 이후로 기온이 조금씩 떨어지더니, 순식간에 계절이 겨울로 바뀐 것이다.
줄리엣은 창 너머로 반쯤 피다만 꽃나무들이 그대로 얼어 죽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것도 그 뱀의 권능일까?'
다시 이 땅에 겨울을 가져온 것이?
“겨우 겨울옷을 정리해서 넣어 놨는데요.”
공작가 사람들은 투덜거리면서도 재빨리 짐 속에서 겨울 외투를 찾아 익숙하게 다시 꺼내 입었다.
추위에 익숙한 북부 사람들은 불평에 비해 손이 재빨랐다.
"춥지 않으십니까?"
“견딜 만해요.”
"그래도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 두세요. 아직 공작성까지는 한참 더 가야 하니까요.”
“네.”
얌전히 대답했지만 줄리엣은 잠을 청할 기분이 아니었다.
마차에 타고 있는 줄리엣의 맞은편에는 어린 하녀와 아기 용이 도로롱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줄리엣은 싱긋 웃으며 담요를 덮어주었다.
황제는 결국 백기를 들고 줄리엣이 내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들어주었다.
대신 석판을 넘기는 조건으로.
‘어차피 가짠데..'
하지만 줄리엣은 목적을 달성하고도 영 마음이 좋지 않았다.
“.…다 잡았었는데."
눈앞에서 뱀을 놓치질 않나, 도로 겨울이 오질 않나.
'만약 이대로 뱀을 못 잡아서, 겨울이 영영 끝나지 않으면 어떡하지?'
덜컥 겁이 났다.
게다가 뱀을 풀어 준 범인은 로이였고, 덕분에 줄리엣은 좋은 친구를 잃었다.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 내기 위해줄리엣은 낡은 책을 한 권 꺼내들었다.
줄리엣이 수도를 떠나기 직전, 혈레벌떡 달려온 에셀리드가 그녀에게 건네준 책이었다.
“뱀에 대한 기록은 못 찾았지만, 이것도 꽤 흥미로우실 겁니다.”
마법사인 에셀리드의 말에 따르면 마탑의 서고에서도 어렵게 구한 고서적이라고 했다.
"제목을 붙이면 '제 꾀에 넘어간 나비' 정도의 우화거든요? 아마 재밌으실 겁니다.”
마법사는 그렇게 장담했지만 줄리엣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낡은 책장을 넘겼다.
[옛날 옛날에,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나비들이 살았습니다.]
우화는 그렇게 시작했다.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마법의 날개를 가진 나비들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몹시 교만하고 심술궂었어요.]
줄리엣은 마법사가 재밌으리라고 장담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야기잖아?’
[강한 힘을 가진 나비들은 마구잡이로 장난을 쳤습니다. 어디에나 문을 열 수 있는 능력을 사용해서, 아무 데나 뒤죽박죽으로 통하는 문을 만들어 버렸고, 세상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여기까지만 읽고도 줄리엣은 알것 같았다.
이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 말이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