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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187화 (184/229)

187화.

황제는 분을 삭이며 줄리엣 모나 드를 노려보는 한편, 머릿속에서는 계산기를 두드렸다.

사실상 증거가 명확한 데다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진 거나 다름없었다.

다. 이미 결론은 한참 전부터 내려

“….…알겠네. 내, 2황자를 잡아들이라 수배령을 내리겠네.”

황제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 속이 시원한가, 백작!”

"아뇨, 폐하. 제 요구사항은 모두 세 가지예요.”

"…… 뭐야?!”

"기네스 후작의 반역 모의, 마수난동 사건의 배후에 있는 2황자를 처벌하는 게 첫 번째죠.”

줄리엣은 기막혀하는 황제를 눈앞에 두고도 태연히 손가락을 꼽았다.

“두 번째 조건은, 제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예를 회복해 주십사 하는 거예요.”

벌컥 화를 내려던 황제는 멈칫했다.

“모나드 백작 부부의…?"

“7년 전, 제 부모님이 괴한들에 의해 살해당하셨어요. 기억하시죠?"

기억할 수밖에.

백작 집안의 참극은 당시에도 수도가 발칵 뒤집혔던 사건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수도 경비대는 단순 강도 사건으로 결론지었다.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줄리엣 모나드가 숙부인 가스팔 남작을 용의자로 지목했으나, 남작이 잘 짜인 알리바이를 제시하며 혐의를 를부인했던 것이다.

"가스팔 남작에게는 공범이 있었어요. 배후에서 살해를 종용한 게 바로 저기 있는 기네스 후작입니다.”

줄리엣이 담담하게 재갈을 문 기네스 후작을 지목했다.

“무슨 증거라도 있나?"

줄리엣은 기다렸다는 듯 생긋 웃으며 차르륵 두툼한 편지 봉투를 연달아 내려놓았다.

“압류한 남부 기네스 후작성에서 확보한 서신들입니다.”

"끄응…”

황제는 그제야 줄리엣 모나드가 왜 여태껏 기네스 후작을 구금해 두었는지 알 것 같았다.

모나드 가문은 명예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가문이었다.

황제는 조금 화를 누그러뜨렸다.

줄리엣의 당돌한 태도가 여전히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줄리엣 모나드의 두 번째 조건은 그럭저럭 타당한 요구였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백작영애가 얼마나 모진 풍파를 겪었는지는 황제도 알았다.

살아남은 자식이 부모의 복수를 원한다는데. 어느 누가 끼어들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줄리엣은 마지막 세 번째 조건을 말하기에 앞서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있던 외조부에게 슬쩍 시선을 보냈다.

"......?"

리오넬 르바탄은 줄리엣이 왜 자신을 쳐다보는지 몰라 의아했지만 손녀와 눈이 마주치자 작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자 활짝 마주 웃으며, 줄리엣이 마지막 조건을 말했다.

“세 번째는, 사면령이에요. 제 외조부님의 명예를 복권시켜 주세요.”

“사면령?”

황제는 기억을 더듬었지만, 줄리 엣 모나드의 외가에 대해서는 딱히 기억나는 바가 없었다.

"백작의 외조부가 죄를 지었나?"

"아뇨.”

점점 더 모를 일이었다.

"모나드 백작의 외조부가 누구기에?”

"아.”

줄리엣은 깜빡했다는 듯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이동했다.

“소개가 늦었네요. 이분이 저희 외할아버지세요.”

줄리엣이 활짝 웃으며 맞은편에 앉은 붉은 머리의 노인을 가리켰다.

선장이라고 했던 바로 그 범상치 않은 인상의 소유자였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노인을 은근히 의식하고 있던 황제는 호기심을 보였다.

"리오넬 르바탄이라고 하면 아시겠지요.”

쨍그랑.

황제의 뒤에 서 있던 서기관이 펜대를 떨어뜨렸다.

'누구라고?'

리오넬 르바탄.

그건 수십 년 전 황실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은 반역자의 이름이었다.

잠시 눈을 끔뻑이던 황제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드르륵.

“겨, 경비병!”

황제가 의자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뭐 하는가! 당장 이자를 체포하지 않고!”

그것을 신호로 갑판 위는 아수라 장이 되었다.

“우, 움직이지 마!”

“폐하를 보호하라!”

황제의 친위대는 요란스레 검을 뽑아 들었다.

“저자를 잡아!”

"하!”

“하, 하오나 폐하……!”

그러나 그들은 황제의 명을 수행하지 못했다.

스릉.

황제의 병사들이 검을 뽑는 것과 동시에, 조용히 갑판을 지키고 있던 선원들 역시 무기를 빼 들었기때문이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모나 드 백작!”

검을 든 무리가 대치 상태를 유지했다.

"다 좋네, 모나드 백작. 내 인정하지. 조사가 미흡해서 자네 부모가 살해당한 사건. 다 원하는 대로 처리해 주겠네! 그…… 첫 번째 조건, 2황자 녀석도 잘못했으니 벌을 받게 해야지. 암. 그 뱀인가 악령인가 하는 괴물을 잡는 것도, 원하는 대로 철저히 협력하겠네!"

황제는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리오넬 르바탄은 안 돼!

저자는 대역 죄인이야!”

폭탄을 떨어뜨려 놓고 줄리엣은 태연히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권리로요?”

“무슨 권리라니!”

"본인이 참석하지도 않은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게 정당한 판결인가요?”

"그렇다 해도 엄연한 판결이야!

모나드 백작, 그리고 칼라일 공!

반역 죄인을 숨겨 주거나 돕는 자도 즉결 처분 대상인 걸 모르나?"

줄리엣이 또박또박 말했다.

"아니에요.”

“그래! 아니… 뭐?”

줄리엣은 테이블 위에 도르르 말려 있던 두루마리를 툭 건드렸다.

그러자 촤르륵 하고 커다란 종이가 펼쳐졌다.

“그게 뭔가?”

“이건 40여 년 전 선황제 폐하께서 직접 승인하신 판결문입니다.”

정확히는 '리오넬 르바탄 재판'판결문의 사본이었다.

줄리엣은 이걸 언제 쓰게 될지 몰라 몰래 미리 준비해 두었다.

'이런 시점에 쓰게 될지는 몰랐지만.’

“그런데?”

피고 부분에 쓰인 이름은 분명 '리오넬 르바탄'이라고 쓰여 있는 걸 황제와 다른 이들 역시 확인했다.

"그리고 결론 부분에는 이렇게 쓰여 있어요. '황제의 모든 땅에 발을 들이는 즉시 사형' 이라고요."

“하! 내 말이 바로 그 말일세!”

황제는 다시 득의양양해졌다.

“뭐하나, 공작! 당장 이 반역 죄들도!”

인을 체포하는 걸 돕지 않고! 자네 황제는 당장이라도 눈앞의 리오넬 르바탄을 교수대로 끌고가려는 눈치였다.

“지금 저 반역자의 편을 들 자가 있으면 어서 나서게! 내 친히 함께 사형대에 세워 줄 테니!”

삿대질 당한 리오넬 르바탄은 눈썹을 까딱했고, 칼라일 공작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조용히 관망했다.

그러나 줄리엣은 고개를 살살 저었다.

"모르시겠어요, 폐하? 여기에는 '황제의 모든 땅'이라고 쓰여 있어요.”

“하, 백작! 나도 글은 읽을 줄 아네.”

“그리고 폐하께서는 바다 위에 계시죠.”

“그런데?”

“국제법상 항구를 포함한 모든 바다는 영토가 아니란 뜻이에요.”

“하! 무슨 말장난인지-”

황제는 금방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저, 모나드 백작의 말이 옳습니다. 폐하.”

갑자기 끼어든 것은 황제의 서기관이었다.

"아니, 자네는 또 왜 그러나?"

“지금 폐하께서는 리오넬 르바탄소유의 배에 타고 계시잖습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이곳은 '황제의 모든 땅'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저자를 체포할 수 없고, 즉결처분권 또한 없다는 뜻입니다.”

직업의식 투철한 궁정 서기관은 상황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덕분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줄리엣이 뭘 믿고 이런 짓을 벌인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 말은….”

눈앞에 수십 년간 수배를 내렸던 대역 죄인을 두고도 잡을 수 없다.

는 의미였다.

잠시 침묵하던 황제는 곧 원망할 대상을 찾아냈다.

“칼라일 공작! 자네가 감히 날 함정에 빠뜨려!”

처음부터 황제를 굳이 리오넬 르바탄의 배로 유인한 것은 이런 꿍꿍이였던 것이다.

물론 줄리엣 외에는 누구도 그녀의 속셈을 몰랐고, 레녹스 역시 그녀의 부탁을 들어준 것뿐이었지만.

칼라일 공작은 결백을 주장하는 대신 무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당황한 것은 황제뿐만이 아니었다.

'그래서였군.’

리오넬 르바탄은 줄리엣을 조용히 곁눈질했다.

"할아버지의 배가 필요해요."

줄리엣은 그렇게만 말했을 뿐, 리오넬에게 이런 계획을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단순히 기네스 후작을 이용하려는 건 줄 알았는데.'

줄리엣이 굳이 기네스 후작을 살려 두라고 당부했었기에, 언젠가 이렇게 써먹을 목적임은 짐작하고 있었다.

갑자기 여기서 자신의 문제가 나올 줄은 몰랐지만, 황제는 여전히 납득을 하지 못하고 길길이 날뛰는 중이었다.

"황실의 권위를 위해서라도, 이런건 용납할 수 없네!"

“황실의 권위요?”

“그래! 당장에 저 대역 죄인을 잡아 처넣지 않는 것만 해도 고마운 줄 알아야지!”

달그락. 줄리엣이 테이블 위에 웬석판 하나를 내려놓자 황제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이게 뭔지 아시나요?"

"신전에서 발굴했다는 그 석판 조각이 아닌가?"

고대 유적에서 발견됐다는 석판에는 황제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신전에서 선수를 쳐서, 숲의 일족이자 라이칸슬로프 로드의 아들에게 석판의 해독을 의뢰하는 바람에 손을 떼야 했지만.

황제는 줄리엣이 무슨 꿍꿍이인지 몰라 잔뜩 경계하는 눈치였으나, 줄리엣은 아랑곳 않고 생글거리며 경쾌하게 손뼉을 쳤다.

“맞아요. 역시 폐하께서는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그건 얼마 전, 로이가 신전으로부터 해석을 의뢰받은 고대의 석판이었다.

'사실은 가짜지만,'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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