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
“줄리엣 양!”
"여기 계셨군요.”
닉스를 안고 돌아온 줄리엣은 주변을 살피면서 물었다.
“로이는요?"
"아, 그 늑대요.”
공작가 기사들은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자기들끼리 시선을 교환한 다음 말했다.
“일단은, 황궁 경비병들과 그 일족들이 엄호해서 수도로 데려갔습니다.”
“그들 일족이 강력하게 항의해서 당장 죄를 묻기는 힘들겠지만"
기사들은 줄리엣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줄리엣은 이렇다 할 의견 없이 잠자코 그들의 의견을 듣겠다는 태도였다.
“그나저나 어떡하죠? 그 뱀도, 2황자도 도주했으니 말입니다."
“그 론다라는 하녀도 행방이 묘연합니다.”
결정적 증인으로 써먹을 하우저남매였는데.
2황자의 보좌관이자 오빠 쪽인 안셀 하우저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시신으로 발견됐고, 공작저에 하녀로 위장해 숨어들었던 론다는 홀연히 모습을 감췄다.
하지만 론다도 역시 멀리 달아나거나 숨졌을 터였다.
“아마 2황자와 그 뱀은 아예 관계가 없다고 발뺌할 겁니다.”
"황제는 벌써부터 태도를 바꿔서 모르쇠 하는 모양입니다."
황제 입장에서야 증인도 뱀도 사라진 상황이니 2황자의 죄를 인정할 이유가 없었다.
늙은 너구리같은 황제는 2황자가 도망쳤다는 걸 알자 마자 손바닥뒤집듯 태도를 바꿨다.
"2황자와 그 병사들이 도망치면서 증인들도 모두 처리한 게 분명 합니다. 덕분에 황제는 빠져나갈 구멍이 생겼고요.”
그때, 모두가 생각만 하고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을 줄리엣이 내뱉었다.
“....…그 늙은 너구리가.”
“예?”
"황제가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다면, 대가를 치르게 해 줘야죠.”
줄리엣의 푸른 눈이 사납게 반짝였다.
"어…… 하지만 아가씨, 어떻게 말입니까?”
“말씀드렸다시피, 증인도 증거도 모두 사라져서 …."
“있어요.”
“예?”
"2황자와 뱀의 관계를 증언해 줄 증인이요. 아직 남아 있어요.”
* * *
새벽녘, 알카론 항구의 관리들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에 빠졌다.
전날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정체 불명의 선박이 갑자기 항구에 나타난 것이다.
"저게 무슨 배지?"
알카론은 수도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였고, 여러 나라의 배들이 드나들었다.
그러므로 커다란 범선이 정박한 것 자체는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조회해 보니 루체른 국적의 함선입니다.”
"루체른?"
법황이 다스리는 루체른은 중립국인 도시국가였다.
그럼 추기경을 태우러 온 배인가?
펄럭.
항구의 관리들이 고개를 갸웃하던 순간, 검은 기가 나부꼈다.
“저건…?"
그 시각, 멀지 않은 별궁.
"폐하, 칼라일 공작이 왔습니다."
“어서 오게, 공작.”
황제는 점잖은 척 물었다.
“그래, 그 괴물을 다시 잡아올 방도는 생각해 냈나?"
결계를 빠져나온 거대한 뱀이 밤하늘을 가르고 북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모두가 보았다.
황제의 질문은 거의 기만에 가까웠지만 칼라일 공작은 표정 변화 없이 담담히 대답했다.
“아직입니다.”
“허어.”
황제가 애석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거 큰일이겠군. 공작은 북부 영지가 걱정되겠어."
그러는 한편, 황제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요놈이 필시 그 괴물을 뒤쫓는 일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러 온 것 이렷다?’
어젯밤 칼라일 공작이 제시한 증거들은 지난 몇 달간 제국에 일어났던 각종 기이한 재난들의 배후에 그 불길한 뱀이 존재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뱀이 도망친 이상 구두합의는 의미가 없어졌다.
황제는 할 수 있는 한 책임을 회피하고 2황자가 저지른 짓에는 시치미를 떼기로 작정했다.
자식의 허물은 곧 부모의 허물.
2황자 클로프가 뱀 괴물과 손을 잡고 나라를 말아먹을 뻔했다는 게 알려지고, 또 그걸 인정해 버리면 당장 황제와 황실부터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이를 어쩌나? 내 힘닿는 데까지 돕겠지만 황실 경비만 해도 병력이 부족해서...”
“도움을 요청하러 온 게 아닙니다.”
“음?”
도와 달라고 빌러 온 게 아니야?
이 시점에서 황제는 기분이 조금는 이 나빠졌다. 이 어린놈이 구걸하는 꼴을 봐야 하는데.
“?”
“하면?"
레녹스 칼라일은 어제의 연회 때의 흐트러진 옷차림 그대로였다.
이곳에서 꼬박 밤을 새웠을 테니 당연했다. 하지만 새파랗게 젊은 공작에게는 서늘한 예기 비슷한 게 흘렀다.
“잠시 저와 가시죠, 폐하."
* * *
기세에 눌린 황제는 얼결에 칼라일 공작을 따라나섰다.
"알카론 항?”
수행원 몇 명만을 데리고 도착한 곳은 별궁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위치한 항구였다.
간밤의 어수선한 사건 때문에 이제 막 해가 뜨기 시작하는 항구에는 사람도 몇 없었다.
황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칼라일 공작이 안내한 곳에는 커다란 범선이 한 척 세워져 있었다.
배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한눈에 보기에도 꽤 훌륭한 배였다.
“이거 공작의 배인가?”
“제 배는 아닙니다.”
황제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레녹스 칼라일은 무미건조하게 답하고는 먼저 갑판 위로 올랐다.
"올라오시죠.”
'어쩐지 저놈의 수법에 말려드는 것 같은데.’ 황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실 이렇게 크고 훌륭한 배에 오르는 건 흔히 있는 기회가 아니었다.
커다란 함선답게 갑판은 탁 트여 있었다.
갑판 위에 올라와 있는 선원은 몇 명 되지 않았지만 특이하게도 갑판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테이블과 빈 의자 몇 개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빈 의자에 앉아 있던 여자 하나가 그들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나드 백작?”
"안녕하세요, 폐하.”
역시 지난밤과 똑같은 옷을 입은 줄리엣 모나드였다.
황제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백작이 날 여기로 부른 겐가?”
"네. 제가 칼라일 공에게 폐하를 모셔와 달라고 요청했어요.”
이제는 하다 하다 공작의 정부 따위가 일국의 황제를 오라 가라 하다니.
황제는 확 기분이 상했다.
"그럼 저자는 누군가?”
황제는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테이블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붉은 머리칼의 노인을 가리켜 물었다.
노인치고 체격이 상당한 데다 어쩐지 묘한 위압감을 풍기는 게 볼수록 희한했다.
줄리엣은 자신의 옆자리에 조각상처럼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노인을 힐끔 돌아보았다.
노인의 정체는 그녀의 외조부인 리오넬 르바탄이었지만, 줄리엣은 간략하게 말했다.
"이 배의 선장이세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 함선은 리오넬 르바탄의 배였으므로,
"그래, 모나드 백작이 날 보자고 했다니. 뭐 때문에?"
황제는 퉁명스레 물으며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가장 친애하는 벗, 수호자 모나 드.
제국의 초대 황제, 에른스트 대제는 모나드 백작가에 친히 명예로운 호칭을 하사했다.
지금이야 몰락 귀족이지만 줄리 엣 모나드는 유서 깊은 집안의 마지막 핏줄이었다.
황제는 죽은 모나드 백작 부부의 얼굴을 봐서라도 참을성을 발휘해 보기로 했다.
갑판 출입구 쪽을 조용히 가로막은 채 비딱하게 기대 선 칼라일공작 놈의 눈치가 좀 보이기도 했고,
“뵙자고 한 이유는, 다름 아닌 2황자 전하의 혐의를 뒷받침할 증거가 있어서예요.”
“아, 그래, 그래. 내가 어제는 좀 당황해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렸네.”
황제는 짐짓 너그러운 척 능청을 떨었다.
“당황한 나머지, 칼라일 공작의 일방적인 주장만 듣고는 선부르게 2황자와 그 사악한 뱀 괴물이 연관이 있을 거라 믿는 실수를 저질렀지. 하지만 보게, 증인도 증거도 없지 않은가?”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줄리엣이 생긋 웃었다.
"증인이 있어요, 폐하.”
“뭐라? 그, 그게 누군데?"
"기네스 후작이요."
"뭐?"
황제의 얼굴에 경악한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네! 기네스후작은 죽었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갑판 아래에서 족쇄를 찬 늙은 남자가 비척비척 끌려 나왔다.
“...…기네스 후작?"
10년은 족히 늙은 것 같았지만 그는 틀림없는 기네스 후작이었다.
황제는 침음을 삼켰다.
“하지만 저자가 기네스 후작이라고 치더라도, 그게 어떻게 2황자의 반역죄를 증명한단 말인가!"
"어머? 아직 눈치채지 못하셨나요. 폐하?"
“무엇을?”
“2황자와 기네스 후작이 손을 잡고, 기네스 후작이 그 뱀의 하수인으로 반역을 꾸민 것은 어제의 사건이 벌어지기 훨씬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2황자와 기네스 후작이 한 패이며, 물론 그 뱀 악령과 함께 음모를 획책했다는 암호문들도 증거로 제시할 수 있답니다."
물론 혐의의 증명은 2황자와 기네스 후작 간에 오간 암호 편지만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 황제가 받아들이느냐는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그런 맥락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진 기네스 후작이 나타나 황제의 멘탈에 타격을 입힌 것이 주효한 모양이었다.
"…내게 원하는 게 뭔가, 모나 드 백작?”
"2황자가 그 뱀 괴물에게 놀아나서 제국을 도탄에 빠뜨렸음을 공표하고, 그들을 쫓을 수 있게 수배령을 내려 주세요.”
“짐이 왜 그래야 하나?"
“그렇지 않으면, 의도적으로 공작가를 비롯한 대귀족들을 깎아내리기 위해서 혼란을 야기한 배후에 황실이 있다는 의심이 돌게 될 테니까요.”
줄리엣이 눈을 예쁘게 접으며 웃었다.
“폐하께서는 온 제국민의 어버이 시니, 어느 쪽이 현명한 일인지 잘 아시리라 생각한답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