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185화 (182/229)

185화.

로이의 입가에서도 서서히 웃음기가 가셨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줄리엣은 그에게서 희미하게 풍기는 금목서 향을 오늘 밤 어디서 맡았는지 기억해 냈다.

오늘 밤, 그 뱀에게 석궁을 겨누고 가장 가까이 다가갔을 때.

하지만 로이는 줄리엣에게 해가 될 일을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왜, 로이에게서 그 뱀에게서 나던 진한 꽃향기가 느껴지는 것이며, 그의 손에서 반짝이는 가루가 떨어지고 있는 걸까.

미소가 사라진 로이의 얼굴은 꽤 낯설었다.

“그 뱀을 도망치게 한 게 로이예요?"

로이는 대답 대신 줄리엣을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그는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웃고 있지 않아서인지 로이는 평소보다 훨씬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줄리엣은 금방이라도 뒷걸음질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로이를 올려다보았다.

“…아니라고 말해요.”

하지만 눈이 마주칠라치면 수줍게 눈꼬리를 휘며 다정하게 웃던 남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몹시도 낯설어 보이는 무표정으로, 로이가 긍정했다.

“응, 내가 했어요.”

"왜?"

줄리엣은 멍하니 되물었다. 낯설었지만, 처음으로 로이의 본모습을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줄리엣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모든 걸 다 이야기했었다.

의도적인 건 아니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왜 두려워하는지. 전부다.

이기적이지만 어딘가 털어놓을 상대가 필요했던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내가 상처받는 걸 보고 싶었어?"

배신감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다. 줄리엣은 화가 나기보다는 슬펐다.

“그렇지 않으면 줄리엣이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뭘.”

"레녹스 칼라일, 그 남자를.”

줄리엣은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로이를 보기만 했다.

“나한테 화내면 안 돼요, 줄리 엣.”

로이가 그녀의 손을 끌어다 제 뺨에 가져다 댔다.

“줄리엣이 그 남자와 화해하면 나한테는 영영 기회가 없는 거잖아.”

"이거 놔.”

그러나 줄리엣은 싸늘히 그를 뿌리쳤다.

짝.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테지만 로이는 굳이 피하지 않았다.

차가운 밤공기 탓에 파열음이 크게 울렸다.

“줄리엣 양?”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자리를 피해 주었던 공작가의 기사들이 심상치 않은 공기를 감지하고 다가왔다.

“밀란 경, 이 사람이 결계를 망가 뜨린 범인이에요.”

줄리엣은 싸늘히 눈앞의 로이를 가리켰다.

“예?”

"아니, 모나드 백작. 갑자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숲의 일족은 신전의 귀한 손님입니다!”

놀란 길리엄 추기경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줄리엣과 로이는 싸늘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볼 뿐, 누구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 이러지 마시고………. 아, 마침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난처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던 길리엄 추기경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모든 성유물에는 도난 방지 수단으로 특수한 야광 물질을 묻혀 둡니다! 사실은 대외비입니다.

만….”

길리엄 추기경은 대단한 발견을 했다는 듯 득의양양했다.

“문스톤을 이렇게 비추면, 새장결계에 손을 댄 것이 누구인지 드러날 겁……!”

“……저 늑대의 손에 묻어 있는 연두색이 그 야광 물질의 흔적입니까?"

“아, 아니 이게 어떻게…….”

길리엄 추기경은 당혹을 금치 못했다.

"보셨죠? 어서 체포하세요.”

줄리엣은 끝까지 로이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톡 쏘아붙이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숲으로 사라졌다.

“아가씨!”

“줄리엣 양!”

뒤에서 부르는 소리를 뒤로하고 줄리엣은 성큼성큼 별궁 뒤쪽의 오솔길로 향했다.

줄리엣은 구두와 드레스 밑단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마구 빠르게 걸었다.

줄리엣은 어두운 산책로를 비틀거리더라도 넘어지지는 않았다.

조금 전까지, 줄리엣이 그의 죄를 일러바치는 내내 로이의 시선은 줄리엣을 향해 있었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을 부인하지도, 굳이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그 눈'

줄리엣은 로이의 금빛 눈이 뭔가에 취한 사람처럼 초점이 흐린 것을 좀 더 빨리 눈치챘어야 했다고 자책했다.

왜냐면 묘약으로 약혼자를 얻었다는 그 아가씨, 유니스랑 같은 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줄리엣은 로이보다는 스스로에게 화가 나 있었다.

'멍청한 줄리엣 모나드.'

이래서야 그 뱀의 손 안에서 멍청하게 놀아나던 전생과 달라진 게 없었다.

'분명 욕망에 약한 사람을 노린다고 했잖아!'

그 뱀의 특기였다.

사람의 약한 부분을 파고 들어서 마음대로 착각하게 하고, 세뇌하듯 마음대로 조종해 버리는 것.

그걸 알면서도 마음 놓고 있었다니.

줄리엣은 잔뜩 자만했었다.

정말로 이번에는 모든 게 다 끝났다고.

그렇다.

“나 때문이야….”

레녹스가 신전과 무슨 거래를 한 건진 모르겠지만 저렇게까지 성유물을 잔뜩 동원한 데다가, 추기경에 신전 기사단까지 협조를 얻어낸 걸 보면 엄청난 걸 대가로 주기로 한 게 틀림없었다.

'내가 다 망쳤어.'

화가 나서 마구 걷던 줄리엣은 문득 인적 없는 오솔길 한가운데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고개를 들자 휘영청 뜬 달이 보였다.

갑자기 말도 없이 자리를 떴으니 다들 걱정할 텐데.

스스로가 한심해서 줄리엣은 한숨을 내쉬며 뒷걸음질 쳤다.

'돌아가자.’

그때였다.

“삑!”

뭔가 밟았다는 느낌과 발밑에서 익숙한 비명이 들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놀란 줄리엣은 재빨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닉스?”

구슬프게 삐약거리는 것은 새카만 새끼 용이었다.

놀란 줄리엣은 오닉스를 얼른 안아 들었다.

연회장에서부터 따라온 걸까?

"미안해, 아팠지? 미안....…..”

“끼앙!”

밟힌 게 꼬리인지 발인지는 모르겠지만 줄리엣은 아기 용을 토닥이며 사과했다.

오닉스는 꼬리가 밟혀서 끙끙거리던 것도 잊고 좋다고 얼른 갸르릉거렸다.

단순한 새끼 용은 소리도 없이 줄리엣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꼬리를 밟히기 일쑤였다.

“미안해….”

줄리엣은 한참 동안 그 자세 그대로 오솔길 한가운데에 가만히 서 있었다.

골골거리는 새끼 용을 품에 안고 있자니, 놀랄 만큼 머리가 차분해졌다.

'우선 어떻게 할지부터 생각하자.'

그 뱀이 결계를 깨고 도망치면서 덩달아 2황자와 그의 사병들도 황궁의 지하 감옥을 탈출했다고 들었다.

뱀을 놓친 건 어쩔 수 없다 치지만, 당장 억울한 건 증인도 증거도 모두 사라졌다는 거였다.

'어떻게 잡았는데.'

지난밤에 칼라일 공작은 그 증거들로 황제를 압박해 향후 공작가의 일에 손을 떼고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약조를 받아 냈었다.

물론 황제는 입을 씻을 것이다.

줄리엣이 혹시 몰라 준비해뒀던 증거들, 즉 그 뱀과 2황자 사이가 한패라는 걸 증언해 줄 론다와 안셀 하우저 남매도 사라져버렸으니까.

한숨을 쉬던 줄리엣은 품 안에서 갸르릉거리는 아기 용을 보고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닉스, 여긴 어떻게 들어왔니?”

오늘 저녁 저택을 떠나면서 줄리 엣은 하녀들에게 오닉스를 부탁하고 나왔다.

그리고 그 하녀들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근처 항구로 대피해 있었다.

"혼자 찾아온 거야?"

줄리엣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오닉스도 괜히 심각한 척 그녀를 따라 고개를 기울였다.

“?”

귀엽긴 했지만 애석하게도 도움은 안 됐다.

나는 법을 익힌 뒤로 오닉스는 사방팔방 제멋대로 돌아다녔기 때문에, 사실 아기 용이 여기까지 따라 들어온 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어휴, 발이 다 젖었잖아."

“삐약.”

아기 용을 안고 흙을 털어 주던 줄리엣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파도 소리?’

조금 전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소금기가 섞여 있다 했더니, 별궁 연회장 뒤쪽의 오솔길은 그대로 바다와 연결되어 있었다.

알카론 별궁은 항구 근처에 지어진 궁이었다.

“…이렇게 가까웠구나.”

아마도 오닉스는 혼자 항구 근처에서 놀다가 줄리엣의 존재를 감지하고 쫄래쫄래 쫓아온 모양이었다.

줄리엣은 잠시 거기에 서 있었다.

아직 동이 트기 한참 전이라,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수평선에 떠 있는 커다란 배들의 실루엣은 똑똑히 보였다.

"증인이, 없어졌지."

당장 당면한 문제는 그거였다.

틈만 나면 공작가를 견제하고 호시탐탐 훼방을 놓으려는 황제를 를압박할 수단이 없어졌다는 것.

황실과 공작가의 관계는 항상 불편했다.

칼라일 공작가는 명목상 제국의 신하이지만 사실상 자치권을 행사하며 북부를 마음대로 다스렸다.

공작가가 황제에 충성하는 시늉이라도 하는 것은 1년에 한 번, 마지못해 신년 무도회에나 참석하는 것이 전부.

공작가의 위세가 높아질수록 황제는 전전긍긍했다. 혼인관계를 맺어 아예 같은 편으로 만들어버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칼라일 가는 지금까지 황실과 한번도 피가 섞인 적 없는 유일한 공작가였다.

황제가 어떻게 나올지는 뻔했다.

어렵게 잡은 뱀도, 2황자도, 심지어 증거물까지 싹 다 날아가 버렸으니, 이제는 교묘하게 공작가를 방해하며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일 터였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어쩌면 황제가 도망친 2황자를 몰래 뒤에서 지원할지도 몰랐다.

물끄러미 바다를 바라보던 줄리 엣은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알것 같았다.

“그거라면..….”

“맑?”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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