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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184화 (181/229)

184화.

그는 충분히 줄리엣에게 수상한 악령이 그녀를 노리고 있음을 경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많이 다쳤어요?"

"이거요? 아뇨.”

줄리엣은 별거 아니라는 듯 손목의 상처를 가리며 멋쩍게 웃었다.

"별거 아니에요. 금방 낫겠죠.”

“잘 듣는 약초가 있어요. 다음에 만날 때 가져다줄게요."

"아….”

줄리엣이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

“왜 그래요?”

“로이, 나 당분간 수도를 떠나 있을 거예요.”

“......"

간신히 유지하던 미소에 금이 갔다.

“북부로 가는 건가요?"

“네.”

"왜요?”

"음…."

줄리엣은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로이도 봐서 알겠지만, 공작가를 증오하던 악령을 잡았거든요.”

당연히 그도 안다.

연회장 한가운데에 놓인, 빛을 발하는 거대한 새장과 그 안에 갇힌 인간 형상을 한 뱀은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뱀을 잡는다고 문제가 가해결되는 건 아니잖아요."

로이는 조금 떼를 쓰듯 말했다.

“잊었어요, 줄리엣? 저 뱀을 잡아가도 공작가의 저주는 풀어 주지 않을 거예요. 그러면 또 원점이죠.

줄리엣은 또 상처받게 될 거고…."

"알아요, 원점인 거."

줄리엣은 싱긋 웃었다. 어쩐지 담백한 미소였다.

“하지만 이번엔 대화해 보고 싶어졌거든요. 도망치지 않고.”

그 순간, 간사하게도 로이는 속이 뒤틀렸다. 어떤 불가해한 직감이 그를 관통했다.

그들은 인간보다 훨씬 긴 수명을 살았다.

기다리는 것은 그의 특기였다. 하지만 영영 기회가 오지 않는다면?

줄리엣이 그녀의 짧은 생 동안 저 오만한 작자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차라리…….

“그래서 당분간은 보기 힘들 것 같아요. 미안해요.”

“……그깟 걸로 일일이 사과하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로이는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정교한 가면을 썼다.

“그럼, 건강히 잘 지내요, 로이.”

줄리엣은 웃으며 손을 흔들어 준 다음, 마차에 올라탔다.

“....…건강해요. 줄리엣."

로이는 줄리엣을 태운 마차가 별궁을 빠져나가는 것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마차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는 난장판이 된 연회장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과연 줄리엣의 설명대로였다.

연회장 가운데는 거대한 새장 모양의 결계가 빛을 발하고 있었고 경비병들이 돌아다니며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로이는 일부러 기척을 숨기고 기둥을 짚고 섰다.

그러자 결계 안에 갇힌 매끈한 금발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드는 것이 보였다.

교활한 보랏빛 시선이 정확히 로이를 향했다. 사람을 홀리는 시선이었다.

말했잖아, 도련님. 다시 날 찾아오게 될 거라고.

먼발치에서도 뱀은 그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본다는 듯 입 모양만으로 벙거렸다.

“닥쳐.”

으르렁거리는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로이는 천천히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약은 단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하려는 일은, 저 뱀의 부추김이 아니라 온전한 로이 자신의 이성적인 판단이다.

로이는 그렇게 착각했다.

잠시 후.

수상한 인물이 새장 모양 결계 근처에 접근했지만, 사고가 터지기 전까지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의심받기에는 몹시도 고귀한 손님이었기 때문이다.

줄리엣은 조금 전 있었던 일을 곱씹고 있었다.

'그 표정.’

순간이었지만 줄리엣이 은잔을 을입에 가져다 댔을 때, 분명 레녹스는 크게 동요했다.

그냥 장난이었지만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줄리엣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설마, 기억하는 걸까.'

이전 생에서 줄리엣은 그가 건넨은잔을 마시고 죽었다.

그때의 잔은 오늘 그녀가 초콜릿을 담았던 잔과 아주 흡사한 모양이었다.

줄리엣은 최근까지 전생에 자신이 독이 든 술잔을 마시고 죽은 것이 그의 뜻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뱀의 정체가 드러나면서부터 줄리엣은 '어쩌면?' 하는 기대를 품게 된 것이다.

술잔에 독을 탄 것은 다름 아닌 그 뱀의 농간이었노라고.

전생의 레녹스는 그녀를 죽일 만큼 미워하지 않았노라고…….

하지만 그러면 뭐가 달라질까?

물론 이전 생의 기억을 가진 것은 그녀뿐이었으므로, 줄리엣은 레녹스가 그 일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냥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인지도 모르지.’

줄리엣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때였다.

투쾅!

“무슨 일이지?"

폭발 같은 섬광이 깜깜한 밤하늘을 선명하게 수놓았다.

히히힝!

놀란 말들이 거칠게 투레질을 했다.

"아가씨!”

마차가 크게 요동쳤지만 다행히 뒤집히지는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공작가의 기사인 주드가 재빨리 마차 곁으로 달려왔지만 본능적으로 직감한 줄리엣은 밖으로 고개를 내밀곤 날카롭게 외쳤다.

“별궁으로 돌아가요!"

"예? 하지만 안전한 곳으로 피하시는 게.”

"얼른요!”

"아…… 예!”

주드는 얼른 마차를 돌려세웠다.

줄리엣은 창밖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별궁 방향에서 불길한 연기가 계속해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 * *

“...…그 악령이 도망쳤습니다!"

왜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을까.

다급히 별궁으로 돌아온 줄리엣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돌아오니 새장 모양의 결계는 처참하게 박살이 나 있었고, 어찌된 영문인지 뱀은 유유히 도망친 뒤였다.

몰래 도망친 것도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목격했다.

깜깜한 밤하늘을 가르고, 거대한 뱀이 꼭 구름 같은 흔적을 남기며 저 산맥 너머로 날아가 버린 것을 말이다.

꼭 별자리가 움직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건 하나 더 있었다.

"저 뱀이 어디로 가는 걸까요?"

뱀은 긴 꼬리를 끌며 북쪽으로 향했다.

“원 세상에...”

“정말 괴물이었군요."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어쩐지 너무 쉽게 풀린다 했더니….”

"이게 대체 누구의 소행입니까!"

공작가 기사단의 부단장, 밀란 경이 나타나 경비병들에게 따져 물었다.

“말도 안 됩니다! 이 정도 결계를 뚫을 수 있는 건 대마법사가 아니 고서야…!"

"이제 어떡한다...…?"

말꼬리를 흐리며 길리엄 추기경이 줄리엣을 힐끔거렸다.

하지만 줄리엣은 딱히 알고 있는 게 없었다.

길리엄 추기경이 입이 마르도록 찬탄하던 성유물, 무슨 성인의 새장이라는 철장은 아예 한쪽이 완전히 뜯겨 나가 있었다.

공작가 기사단의 부단장인 밀란과 신전 측 책임자인 길리엄 추기 경은 언성을 높이며 대립했다.

“추기경! 분명 이 결계는 확실하다 하셨잖습니까!”

“하, 하지만 그 사악한 악령의 힘으로는 신성한 결계를 못 깨뜨린 단 말이오!"

길리엄 추기경은 억울하다는 듯 소리 높여 주장했다.

“필시 누군가 외부의 조력이 있었던 게 분명하오!"

“지금 문제가 이것만이 아닙니다.”

“황궁 감옥에 구금되어 있던 2황자와 사병들이 탈출했다고 합니다.”

'마법이든 성유물이든. 물리적으로 깨뜨리면 그만이란 건가.' 하긴, 아까 레녹스도 뱀의 목을 날려 버렸지. 단순하다 못해 명쾌한 해결책이었다.

돌계단 위에 오도카니 앉아 턱을 괴고 있던 줄리엣은 멍하니 그런 생각이나 했다.

허탈하다 못해 현실감이 없었다.

의외로 레녹스는 화를 내거나 동요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문제 상황을 파악하고수습하기 위해 황실의 고위 관료들과 자리를 떠났다.

줄리엣은 속이 상했다.

'겨우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어이없이 놓쳐 버리다니.

“줄리엣?”

별궁 뜰 구석에서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고 있던 줄리엣은 반짝 고개를 들었다.

“여기서 뭐 해요?”

“로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로이였다.

“....…뱀이 도망갔어요."

줄리엣은 풀이 죽어서 대답했다.

“저런, 어쩌다가요?"

“모르겠어요. 그냥… 와 보니까….”

약간 멍한 상태의 줄리엣은 두서 없이 로이에게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이거 줄 테니까 화 풀어요.”

한참 동안 그녀의 횡설수설을 들어 주던 로이가 슬쩍 내민 것은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꽃송이였다.

주변이 어두울수록 빛을 발하는 별맞이꽃이라고 했다.

“달빛을 흡수했다가 주변이 어두워지면 빛을 내는 거예요.”

로이가 듣기 좋은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와.”

줄리엣은 조금 전까지 침울했던 것도 잊고 손안에서 신비로운 빛을 뿌리는 꽃송이를 정신없이 들여다보았다.

별맞이꽃은 세계수라고 불리는 거대한 나무에서 피는데 꼭 목련처럼 하얗고 커다랬다. 투명한 꽃잎은 신기하게도 고무처럼 말랑하면서도 꽤 단단했다.

그리고 몹시 진한 꽃향기가 났다.

여성용 향수에 주로 쓰이는, 머리가 아플 만큼 달콤한 향.

익숙한 금목서 꽃 향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줄리엣은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투로 물었다.

“로이, 이 꽃도 남부 요정의 숲에서 난 건가요?”

"네."

남부에 머무는 동안 줄리엣은 평범한 사람은 출입이 금지된 요정의 숲에 대한 이런저런 신기한 이야기를 제법 많이 주워 들었다.

그리고 줄리엣은 꽤 정확하게 그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요정의 숲에서 나는 꽃들은 자가생식을 하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도 않고, 향기도 없다.

는 걸.

“그럼요, 요정의 숲에서 피는 꽃들은 향이 없다던데 정말인가요?”

로이가 부드럽게 웃으며 긍정했다.

“네, 맞아요. 잘 알고 있네요.”

“로이.”

“응?”

줄리엣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아까, 뱀이 갇혀 있던 결계 가까이 갔었어요?”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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