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183화 (180/229)

183화.

“그래서 적당히 론다에게 속아넘어간 척하고, 힐베리 경을 불렀어요.”

“우리 주치의 양반 말입니까?”

"네."

혹시 몰라 줄리엣은 시중에 돌고 있는 ‘사랑의 묘약'의 정체가 뭔지를 알아두기로 했다.

만약 줄리엣이 차 찌꺼기를 보여주고 쓰인 재료가 뭔지 알아내라.

식으로 명령했다면 힐베리 경이 죽은 사람을 살리는 전설적인 명의여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줄리엣은 어느 정도 그 '묘약'의 재료를 의심하고 있었고, 실력 좋은 주치의인 힐베리 경은 줄리엣의 추측을 확인해 주었다.

"아니스 뿌리(회향)와 쐐기풀 꿀을 섞어 만든 환각제래요.”

줄리엣이 주치의 힐베리 경에게서 작은 은잔을 받아들고 와서 흔들어 보였다.

둘을 섞으면 설탕보다 강한 단맛이 나고, 구름 위를 걷는 듯 몽롱한 기분이 된다고 했다.

다만 주의할 점은 이 환각제는 적은 양으로도 효과가 매우 강해서, 살짝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중독될 수 있다는 거였다.

사실 줄리엣은 묘약을 써서 약혼자를 얻었다는 소문의 주인공, 유니스를 만났을 때부터 의심했었다.

그냥 사랑에 빠진 아가씨라고 보기에는 유니스부터가 약에 취한 사람처럼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런 수상한 약을 파는 사람이 주의 사항을 제대로 알려줄 리도 없었겠지만요.”

생글거리며 손에 든 조그만 잔을 가볍게 흔들던 줄리엣이 갑자기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아가씨!"

“모나드 양!”

돌발 행동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눈이 튀어나올 듯 놀랐다.

조금 전까지 본인 입으로 설명한 독을 드시다니!

그러나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레녹스였다.

그는 스스로 알아채기도 전에 줄리엣의 팔목을 그러쥐고 있었다.

"너.”

“왜요?”

그러나 줄리엣은 멀쩡한 얼굴로 입술을 핥았다.

“그, 그거….”

"아, 이거요.”

줄리엣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이건 그냥 초콜릿이에요.”

그 말대로였다. 줄리엣이 내민 잔안에 든 것은 약이 든 술이 아니라 달콤한 향이 풍기는 초콜릿 음료였다.

주치의의 말에 따르면, 쐐기풀 꿀의 독성을 중화시키는 데에 초콜릿이 도움이 된다고 해서 준비해 뒀던 것이다.

"...… 십년감수했습니다."

레녹스는 뭔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줄리엣을 놓아주었다.

본의 아니게 속인 게 미안해서 줄리엣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값비싼 우유와 설탕이 아낌없이 들어간 초콜릿을 나눠주었다.

비록 연회는 엉망이 되어 버렸고, 겁에 질린 손님들은 모두 도망쳐버린 데다, 성유물로 만들어진 결계 안에는 신화적인 뱀 악령이 갇혀 있는 상황이었지만.

목적을 달성한 쌀쌀한 한밤에 초콜릿을 나눠 마시는 건 꽤 운치 있는 일이었다.

“고대에는 이 초콜릿을 미약으로 썼다더군요.”

“유노 정화제에 어울리는 음료가 아닙니까?”

"어떤 의미에선 진짜 사랑의 묘약인 셈이지요.”

따끈한 초콜릿은 사람의 기분을 붕 뜨게 하는 효능이 있었다.

줄리엣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은잔을 손 안에서 굴리던 줄리엣은 곁으로 다가온 남자를 힐끔 돌아보았다.

“황제는 뭐라고 하던가요?”

“저 뱀을 북부로 끌고 가면 뭐든 상관없다는군.”

줄리엣은 잠시 생각했다.

“2황자는 죄값을 치르게 될까요?”

“최소 사형부터 시작하겠지."

레녹스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줄리엣이 생각하기에 그건 무척이나 엄청난 일이었다.

황제는 지금까지 어떻게든 둘째 아들을 보호하려고 애썼다.

그건 단지 황제가 아버지 된 도리로서 못난 아들을 보듬어 주거나, 특별히 둘째 아들을 편애해서는 결코 아니었다.

(물론 아주 혈연의 정이 없는 건 아니겠지만….)

그보다는 정치적인 이유가 컸다.

2황자가 그간 크고 작은 죄를 저질러 왔단 걸 인정해 버리면 황제와 황실의 지지도에도 엄청난 타격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금껏 황제는 칼라일 공작에게 애걸하고 그의 요구사항을 다 수용해 가면서 2황자를 살려 두었다.

비록 감금해 두긴 했지만, 어쨌거나 아직 2황자는 부모에게 버림받지도 않았고 공식 법정에 세워진 적도 없다. 아직까지는.

“하지만 이번에는 더 이상 빠져나갈 수 없겠네요.”

과거에 어떻게든 황제가 묻어 주었던 크고 작은 죄들까지 줄줄이 끌려 나올 확률이 높았다.

줄리엣은 잠시 어린 시절의 친구였던 2황자비 파티마를 생각했다.

가 이내 깔끔하게 결론지었다. 차라리 이편이 파티마에게도 나을 터였다.

사실 남 걱정을 해 줄 만큼 그녀의 상황이 여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에게도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들이 남아 있었다.

“저 뱀은 다시 보관에 가두는 건가요?”

“그래.”

줄리엣은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감시가 약해지면 또 도망칠지 몰라요.”

“그러니 이번엔 잘 처박아 둬야지.”

레녹스의 붉은 눈이 줄리엣을 향했다.

"다시는 기어 나오는 일이 없도록.”

“......"

사실 줄리엣도 이런저런 방법을 생각해 봤지만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검은 표범의 말에 따르면, 지금으로선 딱히 저주를 풀 방법도, 저 악령을 쫓아내거나 없앨 방도도 도없는 것 같았으니까.

최소한 수십 년간은 문제가 되지 않도록 다시 가둬 두는 게 최선이었다.

"저 뱀은 초대 칼라일 공작의 계약자였대요. 아셨어요?"

레녹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엘레노어 칼라일.”

“네, 아마 그 뱀은 한때 계약자였던 엘레노어를 미워한 것 같아요.”

미워하게 된 정확한 원인은 모르지만.

하지만 엘레노어 칼라일은 이미.

수백 년 전에 죽은 사람인데.

줄리엣은 이렇게 후손까지 고통 받는 건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가문의 저주 같은 건 처음부터 풀 방도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럼 이게 끝인 걸까?'

줄리엣은 자신의 인생이 드라마가 아닌 건 알았지만 어쩐지 허무하다고 생각했다.

힘들게 돌고 돌아왔는데, 겨우 원점이라니.

난간에 앉아 발목을 까딱이던 줄리엣이 불쑥 말했다.

“궁금한 게 있어요, 전하."

"말해.”

"아까 별궁에서, 뒤따라오는 게 론다가 아니고 저인 걸 알고 계셨어요?”

그러자 몹시 드물게도 레녹스 칼라일이 소년처럼 씩 웃었다.

“그럼 내가 외간 여자가 뒤쫓아 오는데 문도 안 걸어 잠그고 있었을까.”

“꼭 그렇다기보다는……"

“내가 네 기척 하나 구분하지 못할 것 같아?”

“눈이 멀든 약에 취하는 너는 구분할 수 있어."

솔직히 좀 의심스러웠지만 줄리 엣은 넘어가기로 했다.

“좋아요. 믿어 드릴게요."

“나도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하세요.”

“부토니에는 어떻게 했나?"

“무슨 부토니에요?"

“고급 부티크에서 남자용 장신구를 샀다던데. 아닌가?"

줄리엣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줄리엣은 일부러 모호하게 말했다.

“…제가 무척이나 존경하고, 사랑하는 신사분께 드렸는데요?"

"......"

레녹스의 표정이 굳는 걸 보는 건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얼마쯤 웃던 줄리엣은 사실대로 말해 주었다.

“할아버지 드렸어요.”

“그럼 됐어.”

레녹스는 약간 안도한 것 같기도 하고, 반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줄리엣.”

레녹스가 손을 내밀었다.

“집에 갈까.”

줄리엣은 그가 말하는 '집'이 수도의 공작저가 아니란 걸 알아차렸다.

내밀어진 손을 보다가 줄리엣은 희미하게 웃었다.

줄리엣은 연회장을 떠나기 직전 도착한 한 무리의 훤칠한 미남미녀를 만났다.

"로이?”

"안녕, 줄리엣.”

로이와 그의 일족들이었다.

“연회에 참석하기에는 조금 늦었네요?”

난장판이 된 연회장을 힐끔 본 로이가 말했다.

“저희가 뭔가 큰일을 놓쳤나 보군요.”

“아뇨, 늦어서 다행이에요!"

줄리엣은 조금 피곤한 표정으로도 활짝 웃으면서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주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로이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마주 웃으면서도 어쩐지 심장이 뻐근하다고 생각했다.

휘영청 달빛 아래에서 줄리엣의 연한 갈색 머리칼은 은빛으로 반짝였고, 뭘 마셨는지 뺨이 발그레상기되어 있었다.

“무사해 보여서 다행입니다, 줄리 엣.”

위선자.

로이는 스스로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로이는 사실 오늘 연회장에서 뭔가 일이 일어날 거란 걸 눈치채고 있었고, 그래서 일부러 늦게 도착했다.

그는 저 악령이 줄리엣을 꾀어내라고 그를 부추겼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 방울이면 그녀를 가질 수 있을 텐데요."

물론 로이는 그 얄팍한 꼬임에 넘어가지 않았다.

로이는 얼마간은 그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그는 고귀한 일을 한 것이다.

얄팍한 욕망과 충동에 지지 않고, 줄리엣을 위험에 빠뜨릴 일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고귀했던가?'

줄리엣의 손목에 감긴 붕대를 보는 순간, 로이는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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