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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182화 (179/229)

182화.

흙먼지가 가라앉자 줄리엣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줄리엣이 서 있던 곳에는 빛나는 커다란 새장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빛나는 새장한 가운데에 갇혀 있는 것은 제르망 백작의 껍데기를 한 뱀이었다.

“소환진이었구나….”

줄리엣이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어쩐지 일부러 뱀을 연회장 가운데로 오게 하려고 유도하는 것 같더라니.

연회장 정중앙에 미리 함정을 설치해 둔 것이었다.

뱀이 사정거리 내에 들어왔을 때, 결계가 작동하도록.

줄리엣은 그제야 레녹스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깨달았다. 결국 그들이 준비한 것은 각각 달랐지만, 결과적으로는 도움이 된 셈이었다.

"......"

독기 어린 눈으로 사방을 쏘아보는 제르망 백작, 그러니까 새장 모양의 결계 안에 갇힌 뱀을 두 눈으로 확인하니 줄리엣은 어쩐지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정말 갇힌 거야?' 하는 의심과 동시에 끝났나 봐…….' 하는 안도 감이 물밀 듯 밀려왔다.

“하아…….”

“줄리엣 모나드.”

움찔.

줄리엣은 자신의 머리 바로 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자신이 누군가에게 안겨 있는 상태라는 걸 자각했다.

마법진이 발동하기 바로 직전에, 그리고 뱀이 줄리엣의 목을 노리고 덤벼들었을 때.

다급히 줄리엣을 낚아채 같이 바닥을 구른 것은 칼라일 공작이었다.

“얌전히 있으라는 내 말은 말 같지 않았던 모양이지.”

"아….”

힐끔 뒤를 돌아본 줄리엣은 대단히 화가 난 듯한 칼라일 공작과 눈이 마주쳤다.

줄리엣은 뭔가 항변을 하고 싶었다.

어쨌든 뱀을 잡았으니 다 좋게 마무리된 거 아니냐.'든지, '나 없이 저 엉성한 추기경만으로 뱀을 주의를 분산시킬 수 있었을 것 같으냐.' 라든지.

"그….”

하지만 줄리엣은 입술을 뗐다가 그대로 다물어 버렸다. 이런 순간에 레녹스와 논쟁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레녹스가 그녀의 목숨을 구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줄리엣은 대신 고전적이며 몹시 치사하고 가장 간단한 수법으로 이 상황을 벗어나기로 했다.

"아아.”

“-!"

줄리엣이 오른 손목을 움켜쥐고 신음하자, 아니나 다를까, 레녹스는 불에 덴 사람처럼 반응했다.

“주치의!”

레녹스 칼라일이 다짜고짜 신성한 무구들을 잔뜩 내놓으라고 요구했을 때, 길리엄 추기경은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었다.

"이해가 안 가는군요.”

"공작이 이런 게 왜 필요합니까??

악마를 잡을 것도 아니잖습니까?"

“허, 기가 막히는군.”

하지만 길리엄 추기경은 왜 공작이 그런 이상한 조건을 걸었는지 것 .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법황청의 성유물이 만들어 낸 새장 모양의 특수한 결계에 갇힌 뱀악령은 완벽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독기 어린 보랏빛 눈이나 화사한 금발은 흠잡을 데 없는 단정한 미남자의 외양이었다.

“저렇게 인간 흉내를 내는 악령이라니….”

직접 보고도 길리엄 추기경은 믿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칼라일 공작이 요구했던 성유물 중 하나, ‘세실리아의 모노클'을 눈에 댄 채로 보면…….

그르르륵.

"......!"

거대한 뱀 괴물의 실체를 목도한 길리엄 추기경은 기겁하며 모노클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게 대체 무슨 난리요!"

그때, 노성을 터뜨리며 황제가 재등장했다.

마수가 출현했을 때는 급히 별궁을 버리고 몸을 피했다가, 사태가 소강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한 시간 전만 해도 아름다웠던 별궁의 야외 연회장은 돌바닥이 온통 패이고 엎어진 채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저 오망성은 또 뭔가! 감히 짐의 궁전에서 삿된 마법진 따위를 사용해?!”

그것도 허락도 없이!

황제는 노발대발했다.

그런데 진노한 황제에 엉뚱하게도 맞불을 놓은 사람이 있었다.

“마법진이라니오, 황제! 어찌 그런 말을!”

길리엄 추기경이 왈칵 화를 내며 앞으로 나섰다.

“저건 1급 성유물이란 말입니다!

절대 사특한 마법 따위가 아닙니다!”

'성녀 프리스카의 그물이고, 저것은 '성 빈첸시오의 새장' 이다. 그리고 바닥에 그려진 것은…….'

"어찌 흉악한 마법 따위와 비교하십니까! 저건 법황청에 대대로 내려오는 신성한 결계입니다!"

길리엄 추기경은 묻지도 않은 성유물들의 이름을 줄줄 읊었다.

오늘 밤 동원된 성유물은 자그마치 서른일곱 가지였다.

성도 루체른의 보물 창고를 그대로 옮겨왔다고 해도 무방했다.

기세에 눌려 멍하니 듣고 있던 황제는 기가 막혀 했다.

“추기경! 지금 그게 중요하오? 마법진이든 성유물이든! 감히 별궁을 이 꼴로 만든 게 문제 아니오!"

"아, 그 부분은…… 저기 칼라일공작이…….”

퍼뜩 정신을 차린 길리엄 추기경은 슬쩍 한쪽으로 물러나 팔짱을 끼고 관망하던 공작을 가리켰다.

“칼라일!”

황제는 마침내 화를 낼 상대를 찾아냈다.

“자네 정말 왜 이러나!"

황제가 분통을 터뜨렸다.

"내가 하는 일마다 쫓아다니며 훼방을 놓기로 작정이라도 한 게야!”

칼라일 공작은 잠자코 듣기만 하다가 황제가 제풀에 지칠 때쯤 입을 열었다.

“제게 감사하셔야 할 텐데요.”

“뭐? 감사?!”

“추기경.”

칼라일 공작이 고갯짓하자 옆에서 있던 길리엄 추기경이 냉큼 다가와 외알 안경을 황제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

“그거 이름은 '세실리아의 모노클'이라고 합니다. 숨겨진 진짜 모습을 보게 해 주는 성유물입니다."

추기경의 설명에 황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외알 안경을 눈에 가져다 댔다.

“…아아악!”

다른 사람들은 왜 황제가 갑자기 새장에 갇혀 있는 제르망 백작을 보고 기겁하는지 연유를 몰랐다.

고, 공작! 왜 내 궁에 저런 괴물이 있는건가!”

“말씀드렸다시피, 저게 지난번 마수 사건의 배후입니다.”

“그럼 저게….”

황제는 두려운 눈으로 결계 안에 갇힌 뱀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저 괴물은”

"간단한 방법과 어려운 방법이 있습니다.”

“말해보게!”

“먼저 폐하께서 2황자를 법정에.

세우셔야 합니다.”

"내…… 내 아들을?”

칼라일 공작은 태연한 어조로, 그러나 상식적이고도 핵심적인 요구사항을 내놓았다.

지난 수 개월간 벌어졌던 음모의 배후에 2황자가 있었음을 공표하고, 관련자들을 엄중히 처벌할 것.

앞으로 칼라일 가의 일과 이후 저 뱀을 어떻게 처분하든 관여하지 않을 것 등등.

하지만 그 조건을 받아들이기에는 황제는 영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이었다.

“그, 그럼 다른 방법은 뭔가? 어려운 것 말고, 간단한 방법도 있다.

고 했잖은가!”

“폐하."

“말하게!”

칼라일 공작의 단정한 눈매가 서늘하게 빛났다.

“방금 그게 간단한 방법입니다."

“그, 그런….”

공작의 말뜻을 이해한 황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레녹스 칼라 일은 나직한 목소리로 통보했다.

“방금 말씀드린 '간단한 방법'이 싫으시다면, 제 가문과 북부를 적으로 돌리고 2황자를 끌어안은 채 황실이 박살나는, 보다 어려운 선택지도 있습니다.”

거기까지 본 다음 줄리엣은 슬쩍 연회장 밖으로 빠져나왔다.

바깥에서는 경비병들이 제르망백작에게 가담했던 2황자의 사병들을 줄줄이 체포하는 중이었다.

“살려 주세요, 아가씨!"

바닥에 꿇어앉아 있다가 줄리엣을 발견한 론다가 급히 외쳤다.

오빠인 안셀 하우저는 물론이고, 2황자의 군사들이 모조리 쇠고랑을 차고 감옥으로 끌려가는 것을 본 론다는 하얗게 질렸다.

“저는 시키는 대로만 했어요!"

론다는 상황 판단이 빠른 편이었고, 지금 상황에서 자신의 목숨이 줄리엣에게 달려 있는 것을 재빨리 깨달았다.

“누가 죽인대?"

“네?”

"나는 너를 아주 소중하게 여길 거란다.”

줄리엣은 예쁘게 활짝 웃었다.

"네에…?”

론다는 불신의 눈초리로 줄리엣을 쳐다봤지만 줄리엣은 진심이었다.

줄리엣은 론다를 반드시 살려 둘생각이었다.

그녀를 따라 나온 엘리엇이 물었다.

“하지만 굳이 왜 살려 두시는 겁니까?"

“쟤가 아니면 누가 증언하겠어"

“예?”

론다는 2황자가 뱀 악령을 끌어들여 뒤에서 온갖 나쁜 짓을 꾸몄다는 걸 증언해 줄 살아 있는 증거물 1호였다.

증거물 2호는 론다의 오빠이자 2황자의 보좌관이라는 안셀 하우저였고 말이다.

즉, 조금 전 칼라일 공작이 황제를 압박했던 것처럼 나중에 요긴한 증거물로 써먹을 수 있었다.

물론 황제가 조금만 현명하다면

'간단한 선택지를 고르겠지만, 혹시나 황실은 모르는 일이라며 발뺌할 때를 대비해서 증거물은 많을수록 좋았다.'

줄리엣은 하우저 남매가 혀를 깨물어 자진하지 못하게 재갈을 물리는 걸 확인하곤 공작가의 기사들과 함께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저 론다라는 하녀가 수상하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엘리엇이 묻자 줄리엣은 생글생글 웃으며 놀리듯 되물었다.

"엘리엇도 론다가 수상한 걸 눈치챘장아요? 엘리엇은 어떻게 알았는데요?”

“저야 물론 하녀가 공작 전하를 뒤따라가는 걸 보고 뒤늦게 안 거 죠.”

“그렇구나.”

줄리엣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공작가는 일하는 사람을 잘 바꾸지 않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낯선 하녀가 차를 나르기에 뒤에 누군가 있구나 했죠."

물론 결정적인 건 백단향이었지만.

가뜩이나 정체 물명의 ‘사랑의 묘약'으로 신경이 거슬리던 차에 줄리엣 앞에 백단향을 듬뿍 뿌린 론다가 나타난 것이다.

'어서 미끼를 물렴. 하고 외치는 낚싯대처럼.'

줄리엣은 그런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이는 얄팍한 수에 낚여 줄 생각이 없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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