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181화 (178/229)

181화.

“저게 뭐야..…?”

줄리엣은 눈을 의심했다.

그녀는 공작의 비서인 엘리엇과 함께 연회장 구석의 계단에 몸을 숨기고 있던 참이었다.

그들이 숨은 계단에서는 뱀이 서 있는 연회장의 풍경이 한눈에 보였다.

갑자기 펑하고 연막탄이 터지나 싶더니, 곧이어 연기를 뚫고 한 무리의 백마 탄 사람들이 나타났다.

“저건…… 신전 기사단 같은데요?”

엘리엇의 말대로였다.

하지만 나타난 기사들은 줄리엣이 알고 있는 '신전 기사단'과는 좀 달라 보였다.

기사들의 맨 선두, 어디서 구했는지 하나같이 흰 말을 탄 몇몇 사람들은 전혀 기사처럼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꼭 사제복처럼 생긴 흰법의를 입고, 양손 가득 번쩍거리는 화려한 무구들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말투도 이상했다.

“순순히 네 죄를 인정해라!”

맨 선두에 서서 화려한 보검을 마구 휘두르며 돌진하는 사람은 은줄리엣도 아는 사람이었다.

'길리엄 추기경?’

“썩 꺼지지 못할까, 이 악령!"

그러나 뱀은 신전 기사들의 공격을 펄쩍 피하며 비웃었다.

“그깟 장난감으로 뭘 하려는 건가? 어차피 인간의 무기로는 내게 상처 하나 낼 수 없는 걸 알 텐데.”

“하, 장난감이라니? 이건 신성한 성유물이다!”

그러자 뱀이 흠칫하는 게 줄리엣에게도 보였다.

'성유물?'

줄리엣은 그제야 왜 사제들이 신전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났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왜 사제들이 번쩍거리는 화려한 무구들을 가지고 있는지도.

저 지극히 비실용적인 모양새의 무기들은 악령을 상대하기 위한 무구였던 것이다.

공작가 기사단이 마수들을 상대하는 동안, 고립된 뱀을 성유물로 잡겠다는 계획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야심찬 양동작전에는 중대한 허점이 있었다.

"순순히 신성한 심판을 받아라!”

신전 기사단, 소위 팔라딘이라고 불리는 기사들은 용맹하게 사제들을 호위했지만 문제는 사제들이었다.

맨 선두에서 성유물로 치장한 이들은 모두 나이가 지긋한 고위 사제들이었다.

쿠당탕!

겉보기에는 화려하지만 이 신성한 무구들은 여기저기 보석을 달 달아 놓은 비실용적인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자칫 잘못했다간 놓치기 십상이었다.

그리고 당혹스럽게도 사제들은 이 신성한 무구들을 다루는 데 서툴러 보였다.

챙그랑.

아니나 다를까, 어설픈 폼으로 석궁을 장전하려고 애쓰던 추기경은 제대로 한번 쏴 보지도 못하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길리엄 추기경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아악! 키벨레의 활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보던 줄리엣은 이마를 짚었다.

'…내가 미쳐!’

번쩍번쩍한 성유물로 무장하면 뭘 하나.

고위 사제들은 조금도 전력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화려하게 치장한 백마에 간신히 올라타 있을 뿐, 차마 눈 뜨고는 못 볼 오합지졸이었다.

활을 놓치고 말에서 떨어진 길리 엄 추기경을 구하기 위해 신전 기사들 두 명이 다급히 다가왔다.

“추기경 예하!”

“한심하군.”

뱀 역시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검 한 자루로 요령 좋게 달려드는 신전 기사들을 상대하던 뱀은 느긋하게 바닥에 쓰러진 추기경을 향해 다가갔다.

"으으….”

낙마한 추기경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뱀을 보고 기겁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예하!"

"비켜요!”

"아, 아가씨!"

줄리엣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날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석궁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불과 몇 분 전 레녹스가

“얌전히 몸이나 숨기고 있으라.”

고윽박지르며 당부하고 떠난 것을 기억했다.

하지만 동시에 줄리엣은 자신이 절대 그의 당부를 지킬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눈앞에는 이전 생의 원수가 있고, 발아래에는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무기가 떨어져 있다.

누가 이런 기회를 날릴 수 있단 말인가?

줄리엣이 바닥에서 집어든 석궁은 요란한 모양새였다.

사실 석궁이라기에는 크기가 좀 작았다. 게다가 복숭아씨만 한 보석이 주렁주렁 달려 있어 우스꽝스러운 연극 소품 같았다.

몸에 익은 버릇대로 석궁을 장전하고, 견착하면서도 줄리엣은 이장난감 같은 석궁이 과연 제대로 나갈까,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팡!

"윽!"

쏘아져 나간 화살이 등을 보이고 있던 뱀의 왼쪽 어깻죽지를 깨끗하게 꿰뚫었다.

“어떤 인간 새끼가…!"

성유물이기 때문일까. 화살이 뚫고 나간 자리는 공작의 검에 베었을 때와는 달리 금방 아물지 않았다.

분노에 찬 뱀은 어깨를 부여잡고 홱 돌아섰고, 석궁을 든 줄리엣과 눈이 마주쳤다.

“하! 너로군."

줄리엣을 발견한 뱀의 보랏빛 눈이 환희와 광기로 번들거렸다.

“드디어 단둘이 만나게 됐는데, 초면에 화살을 쏴? 이 배은망덕한 인간 계집-.."

짧은 순간 줄리엣은 생각했다.

'확실히 관심을 끄는 건 성공했네.’

다만 이제는 뱀의 목표물이 그녀로 바뀐 것 같았다.

철컥.

하지만 줄리엣은 겁먹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거짓말.”

그녀는 중얼거리면서 그 어느 때 보다도 냉정하게 남은 거리를 계산하며 석궁을 장전했다.

“너, 나랑 초면 아니잖아.”

팡!

말과 동시에 쏘아져 나간 두 번째 화살은 뱀의, 제르망 백작의 잘생긴 오른쪽 뺨을 길게 스치고 지나갔다.

피 대신 검은 체액 비슷한 게 팟하고 스며 나왔다.

확실히 성유물은 효과가 있었다.

그래봤자 저 악령에게는 생채기 정도겠지만,

"너, 이.”

그러나 길게 찢어진 뺨을 더듬더듬 손으로 확인한 뱀이 돌연 송곳니를 드러내며 분노했다.

“…네깟 게 감히 이 얼굴에 흉터를 내?”

조금 전 어깨를 꿰뚫렸을 때보다 더 화가 난 것 같아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엘레노어가 이 얼굴을 얼마나 좋아했는데.”

'또 엘레노어.’ 아무래도 외조부의 추측대로 연적이 맞았던 모양이다.

줄리엣은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뱀에게서는 어울리지 않는 짙은 꽃향기가 풍겼다.

머리가 아플 만큼 달콤한 금목서 향.

그러고 보니 칼라일 가문의 묘, 엘레노어 칼라일의 무덤 근처에는 금목서가 잔뜩 핀다던가.

끼기긱.

벌써 두 발째 빗나갔지만, 줄리엣은 초조해하지 않고 느릿하게 세발째 화살을 당겼다.

'첫발은 왼 어깨, 두 번째는 오른쪽 뺨.’

아무리 봐도 장난감 같은 요란한 석궁은 영점조차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줄리엣은 세 번째 화살은 원하는 곳에 꽂아 넣을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마지막 세 번째 화살의 목표는 두 눈 사이.

'뱀도 어차피 짐승이잖아.'

급소인 미간을 꿰뚫리고 살아남을 수 있는 짐승은 없다.

가늠쇠 너머의 뱀을 노려보면서, 줄리엣은 화를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사실 줄리엣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이렇게 화가 나 있는 줄 몰랐었다.

찰칵.

하지만 뱀의 눈앞으로 뛰어들어서 석궁을 겨눈 그 짧은 찰나, 줄리엣은 왈칵 치미는 분노를 느꼈다.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뱀의 계획은 교묘하고 유치했다.

공작가에 론다를 들여보내고 백단향을 써서 줄리엣을 흔들려고 하고,

'바보도 아니고 똑같은 수법에 두번 당할 리 없잖아?'

하지만 뱀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줄리엣의 화를 돋우고, 불안하게 만들면 또 이전처럼 제멋대로 휘두를 수 있으리라 여겼던 걸까.

왜냐면 전생의 그녀는 멍청하게도 그 얄팍한 수법에 당했었으니까.

줄리엣은 입술을 깨물었다.

눈앞의 이 뱀이 전생에 얼마나 교묘한 거짓말로 그녀를 속이고 망가뜨렸는지,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어이없이 놀아났던지 아주 생생했다.

“하… 하하!”

독니를 드러낸 뱀이 미친 듯 웃음을 터뜨리며 줄리엣을 향해 달려들었다.

동시에 줄리엣은 활시위를 놓았다.

쐐애애액.

화살이 공기를 가르고, 뱀이 줄리 엣을 노리고 몸을 날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파앗!

“-!"

돌연 조금 전까지 줄리엣이 딛고 서 있던 돌바닥이 눈부신 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세 가지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하나, 석궁의 화살이 떠나는 순간 줄리엣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고.

둘, 그와 동시에 뒤에서 누군가의 억센 팔이 줄리엣의 허리를 낚아채, 뱀의 사정거리 밖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쿠당탕.

줄리엣은 누군가의 품에 안긴 자세 그대로 돌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쿵!

굉음과 함께 자욱한 흙먼지가 내려앉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줄리엣이 간신히 눈을 떴을 때는.

“자, 잡았다!”

“성공입니다!”

“뭐? !

“뭐? 와하하하!”

“보시오, 공작! 성공이라오!"

저 멀리에서 어린애처럼 폴짝폴짝 얼싸안고 좋아하며 연신 성공했다고 연호하는 이들은 흰 법의를 입은 길리엄 추기경과 신전 기사단이었다.

그들의 말대로였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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