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180화 (177/229)

180화.

“읏.”

레녹스의 표정이 일그러짐과 동시에 줄리엣이 입술을 뗐다.

“...…뭐 하는 거야?"

어처구니없다는 듯 레녹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입 맞추다 말고 줄리엣이 그의 아랫입술을 꽉 깨물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줄리엣은 생글생글 웃으며 톡 쏘아붙였다.

“이왕 하려면 제대로 해야 사람들이 속지 않겠어요?"

어쩐지 말 속에 뼈가 있는 것 같았다.

말과 동시에 줄리엣은 손을 뻗어 레녹스의 보타이를 풀어 헤치고, 셔츠 앞섶 단추 몇 개를 더 끌렀다.

그러곤 단정하게 넘겼던 그의 머리를 마구 헤집은 다음, 마지막으로 발돋움해 그의 쇄골 근처에 입맞췄다.

쪽.

레녹스는 움찔했지만 줄리엣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덕분에 그의 옷깃에도 붉은 입술연지가 번진 듯한 흔적이 남았다.

누가 봐도 농탕치다 온 망나니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레녹스를 위아래로 훑어본 줄리 엣은 자신의 결과물이 만족스럽다는 듯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는 해 줘야 다들 '아, 저 망나니 공작이 진짜 하녀랑 뒹굴다 왔구나.' 하죠.”

어쩐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레녹스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일리 있군.”

하지만 그는 납득이 빠른 성격이었다.

레녹스는 다시 겉옷을 집어 들고 연회장으로 향했다.

“우리도 가요.”

줄리엣이 그때까지 뒤돌아 서 있던 엘리엇을 툭 쳤다.

소스라치며 돌아선 엘리엇은 먼저 나가는 공작의 뒷모습과 태연한 표정의 줄리엣을 번갈아 보았다.

“....…줄리엣 양.”

“왜요?”

"다음에 이런 일을 벌이실 땐 미리 귀띔이라도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당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고 그의 얼굴에 써 있었다.

엘리엇이 애원했지만 줄리엣은 웃기만 했다.

“하지만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잖아요?”

* * *

칼라일 공작이 다시 야외 연회장으로 돌아오자, 가면 쓴 사람들이 앞다투어 몰려들었다.

“공작, 몸은 좀 괜찮으십…….”

하지만 공작을 알은체하려던 사을 사람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어머...…"

줄리엣이 의도한 대로, 제대로 흐트러진 입성에 연회장 사람들이 술렁였다.

"아니 공작, 자네…… 꼴이 그게 뭔가?”

황제 부처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 역시 그의 옷차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모나드 백작은 어디 갔죠?"

"아까 미로 정원에 들어간 뒤로 못 본 거 같은데.….”

“설마 충격을 받아 먼저 돌아간 걸까요?”

"저런. 가엾게도.”

“모나드 백작의 표정을 꼭 보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노골적인 비웃음과 동정을 가장한 조롱어린 말들이 쏟아졌다.

'후후'

정작 줄리엣은 사람들 틈에 섞여서, 무늬 없는 가면 뒤에 숨어서 웃음을 참고 있었지만, 레녹스가 요란스럽게 사람들의 이목을 끌면서 등장한 덕분에 하녀로 변장한 줄리엣은 사람들 틈에 조용히 숨어들 수 있었다.

“어흠, 어쨌든 마침 잘 왔네. 공작에게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네.”

칼라일 공작을 가까이 불러들인 황제는 자신의 옆에 선 화려한 금발의 젊은 남자를 가리켰다.

“이쪽은 제르망 백작이라고 하네.

황후가 말하기를, 무척 재능있는 청년이라더군.”

"......."

검은 머리의 공작과 금발의 제르망 백작은 겉으로 보기에는 얼추나이가 비슷한 젊은 귀족 청년들로 보였다.

그러나 소개한 황제가 머쓱해할 정도로 그들은 서로를 지그시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사이좋은 척은커녕, 마지못해 악수하는 시늉을 할 최소한의 의지조차 없어 보였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레녹스 칼라일이었다.

“잘됐군요. 저도 마침 폐하께 소개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음? 그게 누군가?"

황제는 얼결에 물어 놓고도 좀 불안해졌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않은데….

서걱!

“공작!”

“뭐, 뭐하는 겁니까!"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검을 빼든 칼라일 공작의 검날이 제르망 백작의 목을 베었다.

"허억!”

겁에 질린 황제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칼라일 공!”

곧 제르망 백작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칠 것이다……!

“…….엥?”

그러나 목이 잘린 제르망 백작은 피를 뿜어내기는커녕 조금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뿐, 그의 목은 멀쩡했다.

“뭐가 어떻게 된….”

“소개할 사람이 있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레녹스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느긋하게 검을 겨눴다.

“제 가문의 오랜 원수입니다. 아, 생각해 보니 사람은 아니군요."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칼라일공작의 검이 다시 제르망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쯧!”

그러나 제르망 백작 행세를 하는 뱀은 검의 궤적을 훌쩍 뒤로 물러나며 피했다.

따악.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은 금발의 제르망 백작이 경쾌하게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야외 연회장에 굶주린 괴수가 소환되었다.

키르르르르!

* * *

"으아, 으아아악!”

칼라일 공작이 다짜고짜 제르망백작의 목을 향해 검을 날렸을 때만 해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구경하던 사람들은 눈앞에 굶주린 괴수가 소환되자 그제야 패닉에 빠졌다.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폐하를 안으로 모셔라!"

황제 일가와 경비병들, 그리고 다른 손님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연회장 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제르망 백작이 불러낸 괴수는 총네 마리였다.

추운 북부에 서식하는, 날카롭고긴 엄니를 가진 검치호랑이를 닮은 괴수들이었다.

물론 가장 큰 특징은 일반적인 호랑이에 비해 적어도 세 배는 더 거대하고 흉포했다는 점이었지만.

“줄리엣!”

“-!"

…이름을 부르면 기껏 변장을 한 의미가 없잖아!

줄리엣은 항의하려고 했지만, 레녹스가 도망치는 군중 틈에서 그녀를 가볍게 낚아챘다.

그는 비명을 지를 시간도 주지 않고 바깥의 미로 정원으로 훌쩍뛰어내렸다.

그 바람에 줄리엣은 자동으로 말문이 턱 막혔다.

“하! 고작 한다는 게 내빼는 거냐!"

아직도 제르망 백작 행세를 하는 뱀은 광기 어린 비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웃음 끝엔 사나운 분노로 매끈하게 잘 생긴 얼굴이 일그러졌다.

처음엔 그들의 계획대로 되는 듯 싶었다. 칼라일 공작은 약에 취해 사라지고, 줄리엣 모나드는 함정으로 제발로 걸어 들어오고, 하지만 잔뜩 흐트러진 꼴로 레녹스 칼라일이 보란 듯이 등장했을 때 뱀은 계획이 잘못됐음을 눈치다.

줄리엣 모나드의 깜찍한 수작 때문에 그가 획책한 계획은 모두 어그러졌다.

흉포하게 날뛰는 네 마리의 마수들은 사실 칼라일 공작의 눈앞에서 줄리엣을 산 채로 죽이기 위해 준비된 장치였다.

하지만 함정을 눈치챈 줄리엣은 가볍게 하녀로 변장해 달아났고, , 마수 우리에 그녀를 떨어뜨리려던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키르르르!

“막아!”

“그쪽으로 간다!”

굶주린 마수들이 날뛰는 가운데 연회장 곳곳에 숨어있던 공작가의 기사들은 고군분투 중이었다.

문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지만 그건 뱀의 목적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다.

이대로 이번 대의 칼라일 공작놈이 줄리엣 모나드를 데리고 멀리 도망친다면 그는 또 다음을 기회를 노려야 했다.

“쯧.”

뱀은 화풀이하듯 연회장 바닥에 패인 돌부리를 걷어찼다.

“저 칼라일 놈도 지난번의 생에서 배운 게 있는 모양이지.”

비록 레녹스 칼라일은 지난 생의 기억을 다 잃어버렸지만, 어쩌면 소중한 것은 손에 움켜쥐고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만은 짐승 같은 본능으로 기억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펑!

"......?"

돌연 등 뒤에서 흰 연막탄이 터졌다.

뱀은 뒤를 돌아보았다.

다그닥다그닥.

연기를 뚫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흰 말을 탄 한 무리의 기사들이었다.

'공작가의 원군인가?'

뱀은 물론이고 마수를 막아내고 있던 기사들조차 잠시 멈칫했다.

푸르륵!

“날뛰는 건 거기까지니라, 이 악마야!”

그러나 흰 깃발을 나부끼며 나타난 것은 보석이 잔뜩 박힌 무구를 들고 나타난 사람들이었다.

'성유물?'

그렇게 해서 뱀은 자신이 상대하는 게 레녹스 칼라일뿐만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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