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엘리엇은 깜깜한 별궁 곳곳을 헤매고 다니다가, 결국 복도 저쪽 끝에서 불이 켜진 방을 하나 발견했다.
“전하…!”
엘리엇은 헐레벌떡 불빛이 새어 나오는 문 앞으로 뛰어갔다.
"…내가 너를 미끼로 써야 할 만큼 절박해 보이나?”
"어머, 그러면 고매하신 공작께서 스스로를 미끼로 쓰는 건 괜찮으신가요?”
“이게 지금 입씨름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그럼 애초에 말을마셨어야…….”
열린 문틈으로 불빛과 함께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엇이 조금만 침착했더라면 약에 취한 남녀의 대화치고는 내용이 지나치게 전투적이라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충성심에 눈이 먼 공작가의 비서, 엘리엇에게는 공작을 빨리 수상한 하녀의 마수에서 구해 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엘리엇은 급한 대로 눈앞에 보이는 무기 복도에 덩그러니 놓인 대자루 - 를 집어 들고 방안으로 몸을 날렸다.
“전하!”
와장창!
"......?"
방 안에 있던 두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난입한 엘리엇에게로 쏠렸다.
엘리엇의 짐작대로 방 안에는 칼라일 공작과 흰 가면을 쓴 여자, 두 사람뿐이었다.
하녀용 코스튬인 흰 가면을 쓴 여자가 공작의 멱살을 움켜쥔 채로, 카우치에 등을 기대고 있는 공작의 위에 올라타 있었다.
“다, 당장 떨어지시오!"
엘리엇이 기겁해서 대자루를 휘둘렀다.
“이게 다 그쪽을 위해서 하는 말이니까……!"
“여기서 뭐 하나, 엘리엇?”
음?
막대를 들고 허우적거리던 엘리 엇은 드디어 짜증 어린 레녹스칼라일의 표정을 발견했다.
조금 전 술 좀 깨고 오겠다고 말하며 사라졌던 사람답지 않게, 칼라일 공작의 안색은 멀쩡했다.
"어…… 위험하신 게 아니었습니까?”
“위험?”
셔츠 단추가 몇 개 풀린 채 카우치에 기대어 있던 칼라일 공작은 확실히 위험한 모습이긴 했다.
본인이 타인을 위험하게 하면 모를까, 절대 위험에 처할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는 뜻이다.
"분명 저 하녀가 차에 독을……
아니, 전하께 수상한 약을 먹여서….”
지나치게 멀쩡한 칼라일 공작의 모습에 혼란스러워진 엘리엇이 횡설수설하는 사이.
하녀가 아니, 론다의 옷을 입었던 여자가 한숨을 내쉬며 흰 가면을 벗었다.
“엘리엇, 나예요.”
스르륵. 덩달아 간단하게 틀어 올렸던 긴 머리채가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그녀는 엘리엇이 잘 아는 사람이었다.
"…주, 줄리엣 아가씨?"
엘리엇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네.”
연한 갈색 머리를 늘어뜨리고, 하녀용 드레스를 입은 채 푸른 눈을 깜빡이는 여자는 줄리엣 모나드였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엘리엇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하여튼 층 깨는 데는 일가견이 있지.”
카우치에 반쯤 누운 채 비스듬히 턱을 괸 레녹스가 쯧, 하고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왠지 모르지만 자신을 보는 칼라일 공작의 시선이 서릿발 같아서 엘리엇은 어깨를 움츠렸다.
칼라일 공작 역시 약에 취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전 야외 연회장에서 술에 취한 것처럼 보이던 것이 거짓말이었다는 듯, 지나치게 멀쩡한 얼굴이었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엘리 엇은 소심하게 항변했다.
“하, 하지만 분명 저는 아가씨가 미로 정원으로 가시는 걸 봤는데요?”
오늘의 줄리엣은 화려한 의상덕분에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줄리엣이 그 다이아몬드가 잔뜩 달린 검은 드레스를 입고 미로 정원으로 들어가는 걸 본 목격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제가 미로 정원으로 들어갔나요?”
줄리엣이 생글생글 웃었다.
엘리엇은 그녀의 혼란스러운 화법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지금 줄리엣은 여기 있는데 '제가 그랬나요?'는 무슨 말이란 말인가?
“잘됐다니요?"
"엘리엇과 다른 사람들 모두 봤다니, 계획대로 됐으니까요.”
계획대로……?
핫.
엘리엇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줄리엣 양.”
지금쯤 미로 정원에 갔어야 할 줄리엣 모나드가 여기에 있다는 뜻은…."
“.....… 그럼 그건 누굽니까?"
*
엘리엇의 질문에 대한 답은 술래잡기가 한창인 미로 정원에서 찾아야 했다.
'술래잡기'는 가면을 쓴 남녀가 미로 정원을 헤매며 즐기는 오늘의 메인 이벤트였다.
그리고 2황자의 보좌관이자 현재 '제르망 백작'의 수족인 안셀하우저는 숨을 죽이고 부하들과 함께 수풀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으읍…!"
그리고 예의 빛나는 드레스를 를입은 줄리엣 모나드가 미로 정원에 막 발을 들였을 때, 안셀 하우저는 재빨리 그녀의 입부터 틀어막았다.
'생각보다 손쉬운데?'
안셀과 부하들은 포박한 여자를 재빨리 들쳐 메고 미리 준비해둔 이동진 쪽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읍! 으읍!”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가면을 쓴 여자가 뭐라고 욕을 퍼붓는 것 같았지만 안셀은 마음이 급했다.
'이번 일만 잘 끝나면…!'
사실 안셀 하우저는 제르망 백작의 정체에 대해 잘 몰랐다.
"무조건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하게!”
2황자는 제르망 백작을 몹시 두려워했다.
안셀은 2황자가 왜 그러는지는 몰랐지만, 제르망 백작이 대단한 수완가라는 것만은 알았다.
안셀은 겁에 질린 2황자보다 오히려 더 약삭빠른 구석이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2황자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제르망 백작'이라고 불리는 저 정체불명의 남자는 단 며칠 만에 어마어마한 황금을 벌어들이는 는놀라운 수완을 보여준 데다가, 심지어 어떻게 황제를 구워삶은 것인지 연회장마저 별궁으로 바꿔 버렸다.
본래대로 오늘 연회가 황궁에서 열렸다면 궁정 마법사들의 감시 때문에 이동 마법진을 이용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알카론의 별궁.
“서둘러라!”
안셀 하우저는 부하들을 재촉했다.
제르망 백작이라는 새 황금 동아줄을 잡은 안셀은 꿈에 부풀어 있었다.
잘만 하면 그의 여동생은 공작부인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안셀은 2황자에게 충성하던 때보다 큰 것을 얻을지도 몰랐다.
빠른 걸음으로 이동 마법진 근처에 도착한 그들은 들쳐 업고 온 여자를 마법진 위에 내려놓은 다음, 야외 연회장 쪽을 예의 주시했다.
이제 연회장에 있는 제르망 백작의 신호를 기다렸다가, 신호에 맞춰서 이동 마법진을 작동시키면 오늘의 계획이 완벽하게 끝나는 것이다.
이동 마법진을 작동시키면, 줄리엣 모나드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갑자기 나타난 마물들에 의해 끔찍한 최후를 맞게 될 예정이었…….
순간 안셀은 멈칫했다.
"으읍!”
바닥에 내려놓은 여자가 몸부림치는 바람에 그녀의 눈을 가리던 가면이 벗겨지면서 여자의 얼굴이 드러났던 것이다.
“로…… 론다?"
안셀은 여동생의 얼굴을 알아봤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하지만 틀림없이 줄리엣 모나드의 드레스를 입고 있는 것은 그의 여동생인 론다였다.
안셀은 허겁지겁 론다의 입에 물린 재갈부터 풀었다.
“안셀 이 멍청아! 어서 이거 풀어! 나라고!”
“뭐, 뭣들 하느냐! 어서 풀어!”
그 순간이었다.
번쩍.
안셀 하우저는 연회장 쪽에서 제르망 백작이 보낸 신호를 포착했다.
“꺄아아!”
이동진이 발동하면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계획을 잘 알고 있는 론다는 공포에 질려 하이톤의 비명을 질러 댔다.
“빠, 빨리! 빨리!”
번쩍.
론다는 간발의 차로 포박을 풀고 마법진 위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마수의 밥 신세를 벗어나자마자 론다는 오빠에게 화를 냈다.
“안셀, 이 멍청아! 뭐 하는 거야!”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안셀은 완전히 당황해 버렸다.
“론다, 대체 네가 왜 줄리엣 모나드의 옷을 입고 있는 게냐!"
하마터면 여동생을 산 채로 마수들에게 찢겨 죽게 할 뻔한 안셀은 모공이 송연해졌다.
간발의 차였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이동진이 발동했을 테고, 그러면 줄리엣 모나드 대신에 굶주린 마수들에게 내던져지는 것은 론다가 될 뻔했다.
“네 역할은 칼라일 공작을 마크하는 거였잖아? 애초에 왜 여기에 그 여자 옷을 입고 있는 거냐고!”
“그, 그건……!"
론다는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흐…… 으아앙!"
“뭐, 뭐야! 뭘 잘했다고 울어!”
론다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울면서 손에 든 가면을 내팽개쳤다.
“처음부터 망한 계획이었어! 오빠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줄리엣 모나드! 그 여자,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어!”
*
“....… 그러니까 론다라는 하녀가 수상하다는 걸 눈치채고 중간에 일부러 하녀와 옷을 갈아입으셨다, 이 말씀이십니까?”
“네.”
“그럼 그 하녀가 차에 약을 타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까?"
“최근에 알았어요.”
줄리엣이 평소답지 않게 화려한 드레스를 고른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뇌리에 한 번 화려한 의상이 각인되면, 중간에 그게 론다로 바뀌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를 줄리엣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줄리엣이 엘리엇에게 속성으로 상황을 납득시키는 동안 잠자코 듣고만 있던 레녹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지.”
“어…… 어딜 말입니까?”
“이 웃기지도 않는 연극을 끝내야지.”
“잠시만요.”
줄리엣이 외투를 집어 드는 레녹스를 붙잡았다.
“왜?”
그러나 줄리엣은 대답 대신 그의 옷깃을 확 끌어당겼다.
"!"
"...… 어이쿠.”
멍하니 서 있던 엘리엇은 기겁해서 다급히 뒤를 돌아 버렸지만, 줄리엣은 아랑곳 않고 레녹스의 목덜미를 홱 잡아당겨 깊이 입 맞췄다.
균형을 잃을 뻔했지만 레녹스는 익숙하게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기습적인 입맞춤은 길지 않았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