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론다의 오빠는 2황자 클로프의 보좌관인 안셀 하우저였다.
지금까지는 모든 게 오빠가 일러준 계획대로였다.
"재미없지, 론다?”
"아냐, 괜찮아.”
“괜찮긴, 춤도 못 추고 구경만 하잖아."
론다와 함께 줄리엣을 따라온 하녀, 마리나가 투덜거렸다.
“구경도 재밌으니까 괜찮아. 하녀장님 덕분에 이런 구경을 하네.”
론다는 자신이 오늘 줄리엣을 따라 궁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하녀장을 미리 구슬려 놨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
"응? 아닌데?"
그러나 마리나가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뭐가?”
"너 오늘 여기 따라온 거. 하녀장님이 지시하신 게 아니라, 줄리엣 아가씨가 지명하신 거야.”
“저 여자…… 아니, 아가씨가?”
"몰랐어?”
론다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계획대로라면 줄리엣 모나드는 지금쯤 론다와 공작의 사이를 의심하고 있어야 했다.
설마 눈치채지 못한 걸까?
칼라일 공작이 사용한다는 값비싼 향유까지 동원해서 눈치를 줬는데?
'그렇게까지 눈치가 없어 보이진 않았는데…...’
만약 줄리엣 모나드가 아둔해서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거라면,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주술이 효과적으로 작용하려면 그 여자가 공작을 믿지 못하고 불안에 떨어야 해."
그러니 반드시 칼라일 공작과 줄리엣 모나드 사이에 앙금을 심어 놓는 게 중요하다고, 오빠인 안셀이 당부했었다.
그때였다.
줄리엣이 두 하녀의 이야기를 엿듣기라도 한 듯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리고 론다와 눈이 마주치자, 가면 너머로 생긋 예쁘게 웃었다.
오싹.
론다는 어색하게 마주 웃으면서도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론다는 안정을 얻기 위해 드레스 안쪽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주머니 안에 숨겨 둔 진홍색 약병은 론다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뭐, 줄리엣 모나드가 둔해 빠져서 그렇게 눈치를 줬는데도 알아듣지 못했다면…….
‘어차피 상관없어..'
오늘의 계획은 완벽했으니까.
줄리엣은 미로 정원으로 입장하는 동시에 론다의 오빠인 안셀하우저에게 납치될 것이고, 그리고 자신은…….
론다는 표정 관리를 하려 애쓰면서, 자그마한 약병을 소중히 움켜쥐었다.
*
줄리엣 모나드는 누구와도 춤을 추지 않았지만, 장내를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이목을 끌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사람들은 재밌는 해프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벌어진 광경은 충격적인 수준이었다.
“저건 칼라일 공작 아닙니까?”
줄리엣이 보란 듯이 이목을 몰고 다니던 중,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연회장의 입구 쪽으로 쏠렸다.
마차에서 내려 막 연회장에 도착한 것은 칼라일 공작이었다.
상당히 묘한 장면이었다.
정화제 연회에, 연인으로 알려진 두 남녀가 시간 차이를 두고 각자 따로 연회장에 등장했다는 것은 꽤나 의미심장했다.
"방금 보셨어요?”
“모나드 백작이 칼라일 공작과 마주칠 것 같으니까 왔던 길을 되돌아간 거요?”
"아니면 칼라일 공작이 줄리엣모나드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황제 폐하께 간 거요?"
뜻밖의 구경거리에 사람들은 잔뜩 흥분해서는 이런 무례한 말들을 대놓고 떠들었다.
칼라일 공작의 수행원으로 따라온 비서, 엘리엇은 경박한 언사들에 넌더리를 냈다.
'천박한 인간들 같으니.'
하지만 엘리엇 역시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감지했다.
줄리엣과 레녹스 모두 평소답지 않았다.
“머리가 아파서, 잠시 투왈렛룸에 다녀올게요.”
둘 다 서로가 있는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을 뿐더러, 줄리 엣은 레녹스가 연회장에 들어오자마자 핑계를 대곤 자리를 빠져나갔다.
마치 레녹스 칼라일이 연회장에 들어오는 것이 무슨 신호라도 됐다는 듯이.
레녹스는 그런 줄리엣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주변 사람들이 권하는 술잔을 연달아 비우고 있었다.
그런 냉랭한 공기를 읽은 것은 엘리엇뿐만이 아니었다.
“보셨어요?”
“봤지요.”
지난 7년 동안 '과연 언제 헤어 질까?'의 주제로 툭하면 끌려 나오던 두 사람이었다.
“마차도 따로 타고 왔더군요."
“그리고 방금도 보셨죠? 칼라일공작이 줄리엣 모나드 쪽으로는 눈길 한번 안 주는 거요.”
“봤지요, 봤지요.”
“게다가 칼라일 공작이 저렇게 술잔을 비우는 것도 처음 봐요.”
엘리엇 역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전하!”
걱정스러운 눈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칼라일 공작을 예의 주시하던 엘리엇은 깜짝 놀라 그에게 달려갈 뻔했다.
물론 엘리엇이 달려가기 전에 바로 곁에 있던 다른 시종이 공작을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레녹스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던 것이다.
처음에는 술을 마구 권하며 은근히 재밌어하던 황제도 적잖이 놀라는 눈치였다.
“허어, 칼라일 자네. 벌써 술이 과했나?"
“괜찮습니다.”
레녹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어이쿠, 이 사람!”
하지만 레녹스는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걸.’
공작의 수행원답게 이 모습을 을관찰하던 엘리엇은 왠지 모를 꺼림칙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투왈렛 룸에 갔던 줄리 엣 모나드가 말없이 돌아왔다.
“어머, 저기 좀 보세요.”
“모나드 백작도 술래잡기에 참가하려나요?”
'엥?' 공작을 감시하느라 바빴던 엘리 엇은 고개를 홱 돌렸다.
야외 연회장에서 아래로 내려가면 커다란 미로 정원이 펼쳐지는 데, 가면을 쓴 남녀가 하나둘씩 미로 정원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건 유노 정화제의 연회 때마다 열리는 술래잡기 놀이의 규칙이었다.
일정 시간의 간격을 두고 가면 쓴 남녀가 차례로 미로 정원에 들어가, 가면과 함께 나눠준 참에 적힌 힌트를 바탕으로 각자의 술래를 찾는 것이다.
술래는 여럿이지만 한 명은 오직 다른 한 명의 술래만 될 수 있었다.
자신의 술래를 찾아서 잡으면 상대의 가면을 벗기고 술래의 진짜 이름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물론 이런 규칙은 어디까지나 핑계였고, 실상은 짝짓기 놀이나다름없었다.
그리고 오늘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던 검은 드레스의 여자가 비척비척 혼자서 미로 정원으로 향하는 게 보였다.
"드디어 줄리엣 모나드가 칼라일 공작과 헤어진 걸까요?”
'술래잡기'는 젊은 남녀가 눈 맞기 딱 좋은 놀이 방식이었으므로, 참가하는 것은 짝이 없는 미혼의 남녀 뿐이었다.
'뭐하시는 겁니까!’
엘리엇은 하마터면 그렇게 외치며 줄리엣을 쫓아갈 뻔했다.
“잠시, 정신 좀 차리고 오겠습니다.”
“그, 그래. 얼른 가 보게.”
어쩐지 창백한 안색의 레녹스가 비틀거리며 연회장을 떠났다.
오늘따라 컨디션이 저조해 보이는 레녹스는 휴게실이 있는 불꺼진 별궁 방향으로 향했다.
'이를 어떡한다?'
엘리엇은 미로 정원 쪽과 조금 전 레녹스가 사라진 별궁 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줄리엣을 쫓아가야 할지, 아니면 칼라일 공작부터 쫓아가 봐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하필이면 언제나 그림자처럼 공작에게 붙어 다니는 기사 하딘도 보이지 않았고, 줄리엣을 보살피러 따라온 하녀 둘도 어딜 갔는지 도통 눈에 띄지 않았다.
안절부절못하던 엘리엇의 눈에 낯익은 여자의 뒷모습이 들어왔 왔다.
'응?'
흰 가면과 갈색 머리. 그리고 드레스의 색이 눈에 익었다.
저건 공작저 하녀들이 입는 외출용 유니폼이었다!
엘리엇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분명 저택에서부터 줄리엣을 따라온 하녀 둘 중 하나가 분명했다.
‘마침 잘됐군!’
엘리엇은 하녀를 붙잡아 줄리엣을 따라가 보라고 말할 요량이었다.
그런 다음 자신은 칼라일 공작을 쫓아가고 말이다.
"이, 이보게!”
그러나 엘리엇이 하녀를 불러 세우기도 전에, 그녀는 매우 빠른 걸음으로 별궁 건물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어라?’
저쪽은 남자용 휴게실 방향인데?
조금 전 레녹스가 비틀거리며 향한 바로 그 방향이었다.
"저런. 저러다 쓰러지겠는걸.”
그때, 등 뒤에서 낄낄거리는 저속한 농담이 들려서 엘리엇은 흠칫했다.
가면을 쓴 채 미로 정원으로 향하는 줄리엣의 뒷모습이 보였다.
과연.
가면 쓴 저속한 구경꾼들의 말대로 검은 드레스의 여자는 비틀거리면서 미로 쪽으로 향했다.
드레스 자락이 바닥에 끌리고 걸음걸이가 불안하게 비틀거렸다.
엘리엇이 보지 못한 사이에 줄리엣도 무슨 음주 가무를 거하게 즐긴 모양이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
엘리엇이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궁정 시종의 부축을 받아 줄리엣이 미로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모르겠다!"
어쨌든 미로로 향하는 줄리엣에게는 궁정 시종과 다른 구경꾼들이 붙어 있으니, 설마 무슨 일이야 없겠지 싶었다.
“전하!”
마음을 정한 엘리엇은 헐레벌떡 깜깜한 별궁 복도 안으로 뛰어들었다.
'여기는 아니고.’
하지만 불 꺼진 별궁 안에는 방이 한두 개도 아닌 데다가, 엘리 엇보다 한 발 앞서 별궁으로 들어온 하녀도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유령처럼 스르륵 사라져 버렸다.
“무슨 하녀가 걸음이……. 아앗!”
기억났다!
투덜거리던 엘리엇은 벼락같이 깨달음을 얻었다.
‘차를 가져오던 하녀!'
오늘 줄리엣과 함께 연회에 온 하녀는 두 명이었지만 엘리엇은 방금 전 공작을 뒤쫓아 간 것이 그 론다라는 하녀라는 데에 돈이라도 걸 수 있었다.
‘그 하녀가 결국 일을 친 건가!?'
엘리엇은 혀를 깨물었다.
누군가와 지나치게 비슷하게 꾸민 하녀와 평소답지 않게 가벼운 술 몇 잔에도 비틀거리던 칼라일공작.
"분명 그 차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엘리엇은 자신의 추리에 감탄하는 한편 왜 더 빨리 눈치채지 못했나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줄리엣도 줄리엣이지만, 약 기운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면 칼라일 공작이 자신에게 약을 먹인 하녀에게 무슨 보복을 할지 몰랐다.
엘리엇은 그 뒷수습을 할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전하! 어디 계십니까!"
빨리 찾아내야 그나마 수습이 쉬워진다. 기겁한 엘리엇은 뛰기 시작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