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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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 인근의 우거진 깊은 숲.
금발에 보랏빛 눈을 가진 매끈한 미남자 하나가 숲 한가운데에 조용히 서 있었다.
사르륵.
바람이 살랑거리며 그의 발치의 낙엽을 쓸었다.
그러자 그의 발밑에 묻혀 있던 금괴가 모습을 드러냈다.
'뱀'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너무 쉽네.”
이건 모두 지난 며칠간 수도에 '수상한 묘약'을 인간들에게 판매 한 대가로 굴러 들어온 황금이었다.
“……어쩌면 이다지도 욕망에 약한 건지. 불쌍할 지경이군.”
'뱀'은 현재는 제르망 백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욕망에 눈이 먼 인간들을 속이는 건 그에겐 아주 쉬운 일이었다.
숨 쉬듯 자연스러운 본능이었으니까.
그러나 뱀은 능력을 발휘해 멍청한 인간들을 이용하고 속이는 데에서 더 이상 어떠한 즐거움도 얻지 못했다.
너무 오래 살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마지막으로 즐거움을 느꼈던 게, 언제더라?
'역시 그때였지.’
아, 가련한 줄리엣.
뱀의 입꼬리가 자동으로 올라갔다.
그를 배신한 엘레노어의 후손들.
엘레노어를 닮은 오만한 일가가 절망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걸 구경하는 것은 퍽 즐거운 일이었으나 그 무렵 뱀은 슬슬 흥미를 잃고 있었다.
몇 번이고 도망쳤다가 붙잡혀왔다. 칼라일 가문과 뱀의 관계는 절대 끝이 나지 않는 꼬리잡기나 다름없었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눈에 띈 것이 바로 줄리엣 모나드였다.
'뱀'은 줄리엣 모나드를 처음 보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당신이 동쪽 탑의 손님이신가요?”
보통 예민한 기질은 풍부한 마력의 원천이었지만, 그녀의 경우에는 그것이 오히려 독이었다.
그때의 줄리엣 모나드는 겁에 질려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리고, 불안하고, 아기를 가진 인간 여자는 그가 조종하는 대로 손쉽게 움직여 주었다.
뱀이 한 일이라곤 옆에서 그녀의 불안감을 부채질한 것뿐이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물기 어린 푸른 눈을 가진 줄리 엣은 사랑스러운 먹잇감이었다.
어리석고, 맹목적이고, 초식동물처럼 겁이 많은 여자를 속이기는 쉬웠다.
그때 뱀은 결정한 것이다.
이 여자를 이용해서 도박을 해보기로.
레녹스 칼라일. 이번 대의 칼라일 공작이라는 놈은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칼라일 가문의 핏줄이야 늘 재수없었지만 뱀에게는 그를 망가뜨려야 하는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그 어리석은 여자를 이용하면…….'
아주 희박한 가능성이지만, 성공만 한다면 이 길고 지루한 복수극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
"내 이름은 엘레노어야.”
“.....… 이번엔 성공할 거야, 엘레노어.”
이번에는 만날 수 있어.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줄리엣모나드가 죽어 줘야 했다.
그게 전제조건이었다.
레녹스 칼라일의 줄리엣 모나드가 가장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주는 것.
"제르망 백작님!”
경박스러운 인상의 인간 남자 하나가 그의 상념을 방해했다.
헐레벌떡 달려온 인간 남자의 이름은 안셀 하우저로, 2황자 클로프의 보좌관이었다.
안셀 하우저는 생긴 것만큼이나 약삭빠른 자였다.
그는 2황자의 지시에 따라 뭐든했지만 2황자가 감금된 이후로 실질적으로는 '제르망 백작' 에게 충성하고 있었다.
"방금 론다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론다는 안셀의 여동생이었다.
“줄리엣 모나드가 속아 넘어간 것 같답니다.”
지금쯤 줄리엣은 '누구든 세 방울이면 사랑에 빠지게 한다는 묘약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이고,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가 값비싼 백단향을 쓴다는 것도 눈치 챘을 것이다.
뱀은 싱긋 웃었다.
그는 이번 생의 줄리엣 모나드도 전생만큼 잘 속아 넘어가는지 궁금했다.
“아, 그리고 론다 말이 공작가 안에 이상하게 생긴 짐승이 돌아다닌답니다.”
이상한 짐승?
"온몸이 까맣고 족제비처럼 재빠른데, 날개 달린 고양이처럼 생겼답니다.”
설명을 듣는 순간 뱀은 눈치챘다.
“용이군.”
그거라면 이번 생의 줄리엣이사념체의 저주를 피해 간 것도 설명이 됐다.
뱀은 절로 인상을 찌푸렸다.
“옛날에 씨가 마른 줄 알았는데.”
용은 골치 아프다.
인과율을 비틀만큼 강대한 마력을 가진 생물. 그것은 언제나 변수를 가져오곤 했다.
번번이 운이 좋은 계집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더 엄청난 게 붙어 있었던 모양이다.
“뭐, 상관없어.”
뱀은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쳐 놓았다.
그는 줄리엣 모나드에게 고통스러운 죽음을 선사할 무대를 준비해 두었고, 거기에 새끼 용 따위가 변수로 끼어들 틈은 없었다.
줄리엣은 함정에 걸려들 것이고, 이전 생과 마찬가지로 레녹스 칼라일의 눈앞에서 끔찍한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빨리 만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군.”
뱀이 요요하게 웃었다. 그건 진심이었다.
줄리엣 모나드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미끼였다.
올해의 유노 정화제 연회는 장소가 조금 바뀌었다.
바닷가 근처의 별궁으로.
줄리엣은 일부러 남들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별궁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려 연회장 입구에 에서자마자 시종이 다가왔다.
“가면을 골라 주시지요.”
줄리엣은 가면들을 쿠션에 받쳐 내온 시종을 잠시 힐끔거렸다.
금발의 키 큰 시종도 무도회의 콘셉트에 맞게 밋밋한 가면을 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진 않았다.
금발의 시종이 쓴 것은 사용인들이 쓰게 되어 있는 아무 무늬없는 흰 가면이었다.
줄리엣이 시종에게 잠시 시선을 준 것은 그의 차림새 때문은 아니었다.
시종의 목소리가 기억에 남을 만큼 벨벳 같았던 것이다.
줄리엣은 아무렇지 않은 척 시종이 내민 가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고르라고 해도.
늦게 도착한 탓인지 남아 있는 가면의 종류는 한정적이었다.
줄리엣은 다른 아가씨들이 고르고 남은 가면들 중 적당한 하나를 골라 들었다.
검은색 나비 가면이었다.
아무래도 색상이 칙칙해서 별로 인기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시종이 그녀를 야외 연회장까지 안내했다.
연회장까지 짧은 거리를 걷는 동안, 줄리엣은 장갑 낀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가면과 한 세트인 손톱만 한 나비 모양 참이 줄리엣의 손목에서 달랑거렸다.
'괜찮을까…….’
줄리엣은 지난밤에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름을 빼앗기고, 존재했다는 흔적조차 사라져 버려.)
(기억하는 사람이 없으면 아예 사라지는 거야.)
줄리엣은 그제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기묘한 공생 관계에 가까웠던 나비들이 필사적으로 그녀를 보호하려고 했던 이유도.
계약자와 연결되어 있는 상태에서 한쪽이 죽어 버리면 악령의 의존재도 위태로워진다고 했다.
'반대로 말하면 아직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 나비들도 소멸한 건 아니라는 건데…….’
줄리엣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목숨이 붙어 있으면 만날 수 있을 터였다.
줄리엣은 눈부신 조명이 놓인 연회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
“세상에, 저것 좀 보세요.”
알카론의 별궁은 탁 트인 야외에 연회장을 꾸며 놓았다.
여기저기에 놓인 특수한 조명들은 샹들리에 못지않은 밝은 빛을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시시한 조명 따위가 아니었다.
“저게 대체 얼마짜릴까……?"
화려하다 못해 호화로운 드레스를 입은 줄리엣 모나드가 그 주인공이었다.
평소 단정한 걸 선호한다고 알려진 줄리엣의 취향을 고려하면 상당히 의외인 의상 선택이었다.
오늘의 줄리엣은 허리선이 도드라지는 검은 드레스 차림이었다.
평소의 연회장이었다면 검은 드레스는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색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단정하다 못해 음울하다는 평가라면 또 모를까.
하지만 유노 정화제답게 분홍색, 빨간색, 노란색 등 사랑스러운 색채의 드레스들이 가득한 연회장에서 검은 드레스는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게다가 줄리엣 모나드의 검은 드레스는 그냥 평범한 의상이 아니었다.
줄리엣이 사뿐히 걸음을 옮길 때마다 부드러운 천이 흔들리면서 별 가루를 흩뿌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는데, 그건 모두 드레스에 알알이 세공된 수많은다이아 덕분이었다.
“…… 사치스럽기 짝이 없군요."
“모나드 백작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요."
사교계 사람들은 줄리엣에게 감탄과 험담을 동시에 보냈다.
게다가 물론 정화제 연회는 가면을 쓰는 게 원칙이었지만, 오늘 호화로운 검은 드레스를 입은 주인공이 줄리엣 모나드라는 것은 어쩐 일인지 모든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된 까닭은 연회장에 입장하고 나서야 줄리엣이 보란 듯이 가면을 썼기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요?”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모나드 백작은 소란스러운 연회도, 지나치게 눈에 띄는 화려한 의상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안녕하세요, 유니스 양.”
오늘의 줄리엣은 평소의 단정한 모습과는 달리 호화로운 의상을 걸쳤을 뿐만 아니라 친분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서글서글하게 말을 붙였다.
사람들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아, 네에, 모나드 백작님. 오랜 만이네요.”
“어쩜. 드레스가 말 그대로 눈부시네요.”
“분명 어렵게 맞춘 거겠죠?"
검은 가면을 쓴 채, 생글거리며 사뿐사뿐 야외 연회장을 누비는 줄리엣은 흑조처럼 빛이 났다.
줄리엣 모나드의 드레스는 어느 각도에서 봐도 눈 돌아가게 화려했다.
'저게 대체 얼마람.'
칠흑의 드레스 위에 별 가루를 뿌린 것처럼 반짝이는 점들은 모두 진짜 다이아였다.
줄리엣을 보살피러 연회장에 따라온 론다는 입을 비죽였다.
옷이 날개라고, 저 정도 드레스라면 굳이 줄리엣 모나드가 아니라 누가 입어도 빛이 날 터였다.
'어차피 앞으로 몇 시간만 더 기다리면 돼.'
론다는 의미심장하게 시계를 흘끔거렸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