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
줄리엣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 카우치에 앉아 있었다.
“..…없네.”
줄리엣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엘레노어의 정체를 알게 된 뒤, 줄리엣은 엘레노어 칼라일에 대한 기록물을 탈탈 털었지만 영이렇다 할 소득이 없었다.
너무 만만하게 생각한 걸까?
“……어쩌면 그냥, 할아버지 말대로 치정 관계였을지도.”
줄리엣은 카우치 등받이에 깊게 몸을 묻은 뒤, 다리를 꼬고 발끝을 까딱거렸다.
레녹스는 뱀의 존재를 디폴트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당연히 거기 있는 것, 무슨 자연재해 같은 것처럼 취급했다.
하지만 줄리엣의 생각은 달랐다.
그 뱀이 왜 그렇게 공작가를 미워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면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자연스레 알게 되지 않을까?
흠잡을 데 없는 논리였고, 거기까진 좋았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엘레노어 칼라일에 대한 어느 기록을 뒤져도, 연적이나 '노란 뱀 악령’에 대한 부분은 단 한 글자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득도 있긴 했다.
줄리엣은 손을 뻗어 따로 분류해 둔 종이 몇 장을 뒤적였다.
칼라일 공작가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방대한 기록물을 자랑했다.
회계장부 외에도 몇 년에 한 번씩, 가문이 보유한 미술품이나 귀금속의 목록을 작성하게 되어 있었다.
수백 년간의 기록 중에서 줄리 엣이 주목한 것은 가문의 보물목록이었다.
“보라색 보관.”
줄리엣은 미리 표시해 둔 부분을 손으로 짚었다.
이 '보라색 보관'은 몇십 년 주기로 보물 목록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했다.
보통 가문의 보물은 특별한 일이 아니면 이렇게 나타났다가 사라지지 않는 법인데 말이다.
“아티팩트겠지.”
역시, 이 보관이 '달리아'인 게 틀림없었다.
그럭저럭 한 세대에 한 번씩 나타났다 사라지는 게 시기도 일치했다.
"정말이었네.”
레녹스로부터 악령 들린 아티팩트가 제 발로 가문에서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이렇게 기록된 증거를 보니 믿을 수밖에.
게다가 그 와중에 태어난 첫 아이가 죽었다는 기록과 비교해 보니 이 뱀의 공작가 직계 혈통에 대한 증오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이쯤 되니 줄리엣은 화가 났다.
“아니, 그렇게 오만하고 자기 좋을 대로 사는 사람들이."
줄리엣은 투덜거렸다.
줄리엣이 알고 있는 칼라일 가문 사람들은 세상에서 제일 무자비한 일족이었다.
“후손을 위해 문제를 해결할 의지는 아무도 없었나 보지?"
(그럴 리가.)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줄리엣은 흠칫했다.
놀라 고개를 들자 테이블 바로 옆에 커다란 검은 표범이 길게 드러누워 있었다.
(저 오만한 칼라일들이 시도를 안 해 봤을 것 같아?)
“그럼? 수백 년 동안 다들 저주를 풀려고 시도는 했는데, 모두 실패했다고?”
(말귀가 빠르네.)
".......”
줄리엣은 다시 심란해졌다.
그렇게 풀기 어려운 건가, 저주란 건?
“악령의 저주는 푸는 방법이 아예 없어?"
줄리엣은 별 기대 없이 혼잣말하듯 물었다.
(있어. 무려 세 가지나 있지.)
"어?”
(저주를 건 당사자가 풀어 주거나, 혹은 저주를 건 주체가 소멸하거나, 아니면 아예 다른 차원으로 떠나 버리거나.)
차르륵.
줄리엣은 흠칫했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거울에.
검은 표범의 모습이 비쳤다. 금빛 사슬이 또 하나 나타나 표범의 목덜미를 단단히 옥죄었다.
'아플 것 같은데.'
놀란 표정으로 줄리엣이 쳐다보았지만 검은 표범의 평온한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미안해서 뭘 물어보지도 못하겠다.
줄리엣은 머뭇거리다가 조금 전 들었던 세 가지 방법을 하나씩 따져 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첫 번째가 저주를 건 뱀이 자청해서 저주를 풀어 주는 경우.”
그건 불가능했다.
저 미친 뱀은 공작가를 몹시 증오하므로, 그런 설득이 가능했더라면 이렇게 수백 년 동안 저주가 이어지지도 않았을 테다.
“아, 그럼 두 번째로 뱀이 멀리 떠나 버리면?”
(그것도 불가능하지.)
"어째서? 그게 가장 쉬워 보이 는데?”
(그 미친 뱀은 돌아갈 수 있다고 한들 절대 이곳을 떠나려 들지 않을걸. 그놈은 아마 자기가 어느 차원에서 왔는지, 어디서 왕 노릇을 했는지, 심지어 자기가 누구였는지도 전부 잊었을 거야.)
"......."
(말했잖아. 미쳤다니까.)
검은 표범은 길게 하품을 했다.
“그래……. 그럼 쫓아내지도 못하면.”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소멸시킨다는 건, 죽인다는 뜻이지?”
(비슷하게 들리지만 다르지. 당장 그 뱀을 잡아다가 백 번 목을 베어도 절대 죽지 않을걸.)
“그럼 소멸은 뭔데?”
(그 제노비아라는 꼬마 계집애가 당한 것 같은 거지.)
“....… 제노비아?”
소울 스톤의 그 제노비아?
갑자기 익숙한 이름이 튀어나오자 줄리엣은 당황했다.
제노비아는 넘치는 신성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요절했다는, 불운한 소녀의 이름이었다.
“갑자기 제노비아 이름이 왜 나와?”
(그 계집애도 악령의 계약자였고, 그 꼬마의 악령은 소멸해 버렸으니까.)
줄리엣은 말문이 막혔다.
“그럼 제노비아에게도 계약한 한 악령이 있었어?”
(있었겠지.)
있었겠지?
미지근한 대답에 줄리엣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껏 뭐든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잰 체하던 검은 표범답지 않은 태도였다.
"너희 악령들은 서로에 대해 뭐는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실제로 이 딱히 하는 일은 없어 보이지만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수다스러운 악령은 굉장히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이전에는 알았는데, 잊어버렸어.)
“잊어버려?”
(그래. 그 꼬마 계집애가 불에 타 죽고, 남은 유해를 그 미친 뱀이 먹어 치웠어. 그러고 나니 아무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 꼬마에게 힘을 빌려주던 악령은 존재 자체가 잊혔어.)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는 거지. 이름을 빼앗기고, 존재했다는 흔적조차 사라져 버려.)
물리적 실체가 없으니, 존재를 인지하고 기억해 줄 계약자가 급작스럽게 죽거나 사라지면 영혼으로 계약이 묶여 있는 악령은 그대로 소멸한다는 설명이었다.
검은 표범은 이 같은 이야기를 무척 대수롭지 않다는 듯 조곤조곤 들려주었다.
(더 이상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예 사라지는 거야.)
"......."
어쩐지 섬뜩한 이야기였다.
똑똑.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그때 밖에서 하녀들이 문을 두드렸다.
다시 돌아보니 검은 표범은 또 슬그머니 모습을 감춘 뒤였다.
“응, ”
“응, 들어와."
줄리엣은 작게 한숨을 쉬며 잔뜩 널린 두루마리들을 정리했다.
“어머.”
“설마 한숨도 안 주무신 거예요? 세상에.”
줄리엣은 피곤한 눈가를 문질렀다.
“괜찮아.”
“괜찮긴요. 당장 저녁 연회에 에참석하셔야 하잖아요!”
하녀들이 잔소리하며 창문을 활짝 열고 환기부터 시켰다.
서늘한 새벽 공기가 흘러들어와 기분 좋았다.
줄리엣은 잠시 턱을 괴고 멍하니 생각했다.
'제노비아가 계약자였다고?'
줄리엣은 성녀 후보였다던 어린 제노비아가 어떻게 악령의 계약자일 수 있는지, 혹은 그러면 제 노비아의 아티팩트는 어디로 갔는지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신전이 그다지 선량한 신의 사도가 아닌 건 알고 있었고,하지만 연결된 계약자가 죽으면 악령도 함께 소멸하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니.
그건 섬뜩한 이야기였다.
'그럼 내가 죽으면, 그 나비들도 똑같이 잊히는 걸까?'
줄리엣이 심각하게 자신을 떠난 나비들의 안부를 떠올리는데, 누군가 달칵거리는 찻잔을 들고 나타났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가씨.”
"응. 안녕, 론다.”
생각에 잠겨 턱을 괴고 있던 줄리엣은 고개를 반짝 들었다.
"......?"
코끝을 스치는 냄새가 낯익었던 것이다.
“왜 그러세요, 아가씨?”
"아…….”
줄리엣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만 나가보렴.”
줄리엣은 언제 동요했냐는 듯, 차분하게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론다가 침실을 나가자 줄리엣은 입술에 가져다 댔던 찻잔을 그대로 내려놓았다.
“론다가 여기 온 지 얼마나 됐지?”
“론다요?”
“얼마 안 됐죠. 그런데도 얼마나 잘난 척하는지 몰라요.”
문을 활짝 연 채 청소 준비를 하던 다른 하녀들이 이때다 싶었는지 일러바쳤다.
“맞아요, 맞아요. 어휴, 얼마 전부터는 본채의 공작님께도 차를 가져다드린다고 얼마나 유세를 떨던지.”
줄리엣의 무표정한 얼굴이 갸웃기울어졌다.
“론다가 본채로 차를 나른다고?”
“네, 하녀장님이 허리를 다치셔서요.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공작님의 집무실에 출입 한다고 어찌나 잘난 척을……."
“언제부터?"
“사흘 전부터예요.”
“사흘? 그렇구나……….”
줄리엣은 검지를 입술에 댄 채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머리칼을 뒤로 넘길 생각조차 못 하고, 꼭 무언가에 정신이 팔린 사람처럼.
"아가씨?"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줄리엣이 갑자기 배시시 웃었다.
“머리가 아프네. 주치의를 좀 불러 줄래?”
“할베리 경이요?”
“응, 두통약이 필요할 것 같아서.”
줄리엣의 푸른 눈이 의미심장하게 반짝였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