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성하!”
당황한 길리엄 추기경이 다급히 끼어들었지만 정작 칼라일 공작은 어깨를 으쓱했다.
“말요
“공작의 말대로요."
법황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노비아는 재능이 넘치는 아이였고, 가끔 어떤 목소리를 듣는다고도 했지만……. 설마 루체 른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가 악령의 목소리를 듣는 줄 누가 알았겠소?”
담담하게 토로하던 힐데가르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가 진실을 알았을 때는 제 노비아의 명성이 너무 높아져서 손 쓸 방도가 없었소."
그러나 칼라일 공작의 표정은 은여전히 무미건조했다.
“그래서 불이 났을 때 죽게 내버려 뒀나?"
“화재로 죽이는 게 가장 고통스럽고, 질 좋은 소울 스톤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그, 그런……!"
정령 친화력이 높은 아이들을 잡아다 끔찍한 실험을 자행했던 기네스 후작의 연구 기록에도 나와 있는 내용이었다.
마력이든 신성력이든, 작동 원리는 놀랍도록 비슷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는 결국 감정의 파동이고, 피험자가 격한 감정, 고통이나 슬픔 등을 느낄 때에 가장 큰 에너지를 방출했다.
그래서 기네스 후작은 질 좋은 소울 스톤을 얻기 위해 애들을 을잡아다 학대했고, 사제들은 화재를 방관했다.
줄리엣에게는 가여운 제노비아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고 둘러댄 모양이지만 말이다.
“……다 아는 사실을 확인하러 온 거요?”
“글쎄, 궁금해져서 말입니다."
레녹스는 비딱하게 턱을 괴었다.
“예언의 아이가 발휘한 놀라운 능력이 사실 신성력이 아니라 악령의 힘이었다는 게 밝혀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공작! 지금 신전을 겁박하는 게요!”
추기경은 발끈했지만 법황 힐데 가르트는 담담하게 물었다.
“원하는 게 뭡니까, 공작?”
“이제 대화가 좀 되는군."
레녹스 칼라일은 빙그레 웃었다.
“내 조건은 두 가지요. 하나는 줄리엣에게 손을 뗄 것. 그리고 두 번째는 ."
**
잠시 후, 칼라일 공작과 그의 심복인 하딘은 유유히 대신전을 빠져나왔다.
“.… 어떻게 아셨습니까?"
“뭘?”
어느 정도 대신전으로부터 멀어지자, 하딘이 공작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 소울 스톤이 이상하단 것 말입니다.”
"아.”
레녹스는 곧장 대답하는 대신 습관대로 목을 죄이는 보타이를 풀어헤쳤다.
“줄리엣이 나한테 소울 스톤을 보냈으니까.”
그건 레녹스가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었을 때의 일이었다.
줄리엣이 눈을 다친 그를 구하겠답시고 대신전의 보물을 빼돌려 그에게 보냈다.
줄리엣이야 소울 스톤을 만져 본 게 처음이라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레녹스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다.
펜던트 가득 찰랑거리고 있는 것은 순수한 신성력이 아니었다.
오히려 줄리엣의 몸에서 찰랑거리는 마력의 파동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하지만 확신한 지는 얼마 안됐어.”
레녹스가 피곤한 듯 눈가를 문질렀다.
정확히는 최근, 힐데가르트 법황이 자애로운 인격자 흉내를 내며 줄리엣을 살뜰하게 챙겨 주는 모습을 본 다음부터였다.
“저 위선자들은 절대 이유 없이 어린 양을 돌보지 않거든.”
줄리엣에게는 '제바스티안 때문에 줄리엣의 목숨이 위험할 뻔했으니까. 혹은 '힐데가르트 법황의 목숨을 살려 줬으니까.' 하는 식으로 이유를 붙여 호의를 베푸는 것처럼 굴었지만 레녹스는 법황이 줄리엣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는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실상 그들이 노리는 것은 줄리 엣이었다.
“아마 루체른에서 줄리엣이 소울 스톤을 사용해 나비들을 불러낸 걸 보고는 확신했겠지."
극히 드물지만 마력의 파동이 비슷한 사람들이 존재했다.
줄리엣이 제노비아의 소울 스톤으로 엄청난 존재를 소환해 내는 것을 보곤 힐데가르트는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잘만 하면 줄리엣 모나드를 이용해 제노비아 때처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 희망도 오늘로 끝이었다.
“한데, 이 소울 스톤은 줄리엣양 수중에 있는 줄 알았는데요."
"맞아. 진짜는 줄리엣이 가지고 있지.”
레녹스는 웃지도 않고 무심하게 대꾸했다.
“이건 가짜야.”
“......예?"
“모조품이지만 감쪽같지. 줄리엣이 솜씨 좋은 세공사를 알고 있더라고.”
줄리엣이 기네스 후작을 함정에 빠뜨렸을 때 써먹었던 수법이었다.
**
칼라일 공작이 귀가한 것은 다음날 새벽이었다.
“전하!"
막 집무실로 돌아온 레녹스는 열렬한 환대에 문 앞에서 멈칫했다.
공작가의 수석 비서, 엘리엇은 집무실에서 꾸벅꾸벅 졸다 말고 일어나 그의 귀가를 반겼다.
“이제 돌아오신 겁니까?”
엘리엇의 환영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충직한 수석 비서는 오늘 종일 텅 빈 집무실을 지키며 칼라일공작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줄리엣 양이 아까 부토니에를 사러 외출하셨습니다.”
“부토니에?”
“예, 남자용 장신구요.”
그러고 보니 유도 정화제에는 그런 걸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던가.
하지만 레녹스는 이렇다 할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돌아오실 때는 빈손이셨단 말이지요. 그게 누구 손에 들어갔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파티션 너머에서 옷을 갈아입던 칼라일 공작은 호들갑을 떠는 비서를 힐끔 보곤 입을 열었다.
"엘리엇.”
“네?”
“괜히 떠보지 말고 차나 가져와.”
"… 예.”
엘리엇은 설렁줄을 당겨 하인을 호출했다.
그리고 차를 기다리는 척하면서 공작을 힐끔거렸다.
‘두 분이 싸우거나 사이가 나빠진 것 같진 않은데.'
어쩐지 칼라일 공작과 줄리엣둘 모두.
각자 뭔가에 몰두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줄리엣은 짧은 외출에서 돌아온 다음부터는 줄곧 별채에 틀어박혀 있었고, 레녹스도 좀처럼 저택에 붙어 있지 않았다.
'뭔가 일어나곤 있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단 말이지.'
엘리엇의 궁금증을 부추기는 건 공작가의 기사들조차 뭔가 바쁜 일이 있는지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다는 점이었다.
밀란이나 하딘같은 기사들은 뭔가 아는 눈치였지만 도통 저택에서 볼 일이 없었다.
어쩐지 행정관인 자기만 따돌림당하는 느낌이라 엘리엇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아, 그러고 보니 연회 장소가 바뀌었다고 하더군요."
“알고 있어.”
칼라일 공작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정화제 기념 연회는 이벤트성이 강했다.
본래는 가볍게 황궁에서 열리는 것이 보통인데, 올해는 무슨 변덕인지 연회를 하루 앞두고 장소가 변경된 것이다.
변경된 연회장은 수도에서 두시간 거리에 위치한 해안가 별궁이었다.
“괜찮을까요?”
“뭐가?”
“유노 정화제는 지금껏 줄곧 황궁에서 열렸잖습니까. 궁정 마법사들이 황궁을 감시하고 있으니까요. 한데 갑자기 별궁으로 장소가 바뀌다니, 혹시 만약 마법진 같은 게 설치되어 있다거나 하면…….”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엘리엇은 습관적으로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엘리엇은 생각 없이 문을 열어 준 것을 후회했다.
“분부하신 대로 차를 가져왔답니다.”
차 쟁반을 들고 문 앞에 나타난 하녀가 낯이 익었던 것이다.
낮에 복도에서 엘리엇이 줄리엣과 착각했던 그 하녀, 론다였다.
엘리엇은 수줍어하는 하녀의 앞을 가로막고 차 쟁반을 받아 들려고 했다.
"이리 주고 나가면 됩니다.”
“……하지만 하녀장님께서 직접 가져다주라고 당부하셨는걸요?”
론다는 엘리엇을 지나쳐 직접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칵.
파티션 너머로 무심한 시선이 오갔다.
“저, 그럼…….”
왠지 쭈뼛거리며 론다가 물러갔지만 엘리엇은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뭔가 꺼림칙하단 말이야..'
엘리엇이 낮에 있었던 일을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칼라일 공작이 환복을 마치고 티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대신 찻잔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공작이 불쑥 말했다.
“못 보던 얼굴이던데."
“예?”
엘리엇은 순간적으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가, 이내 그것이 방금 나간 하녀를 두고 한 말이란 것을 눈치챘다.
"아…… 얼마 전에 추천으로 들어온 하녀입니다.”
대답하면서도 엘리엇은 순간 당황해서, 공작이 묻지 않은 점까지 덧붙여서 말해 주었다.
“이름은 론다라고 합니다. 하녀장이 허리를 다쳐서 대신 임시로 차 시중을 들고 있고요."
십년 가까이 칼라일 공작가를 보필해 온 엘리엇은 레녹스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
그의 주인은 시중 드는 사용인들을 기억은커녕 웬만큼 오래 일한 사용인이 아니면 시중인의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심각하다 싶을 정도로 타인에게 무심한 공작인데, 하녀의 얼굴이 낯설더라는 얘기를 먼저 꺼낸다고?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 * *
‘드디어..'
빠른 걸음으로 공작의 집무실을 빠져나온 론다는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이걸로 세 번째야!
론다는 사흘째 칼라일 공작에게 묘약을 탄 차를 먹이는 데 성공했다.
레녹스 칼라일이 좀처럼 저택에 붙어 있는 인물이 아니라,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론다는 겨우 이 정도 성과에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잠시 뿐이지만 공작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기도 했다.
'분명 눈이 마주쳤어.’
드디어 묘약의 효과가 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럼 다음은…….’
론다는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았다.
그녀에게 주어진 역할은 칼라일공작에게 첫눈에 반하는 묘약을 먹이는 것이기도 했지만, 저택안의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는 것도 있었다.
론다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크기가 작은 향수병이었다.
백단향이라던가?
이걸 구해다 준 것은 론다의 오빠이자 2황자의 보좌관인 안셀하우저였다.
안셀은 여동생에게 이걸 전해주면서 눈 돌아가게 값비싼 향수라고 신신당부했다.
"콜록, 콜록.”
그러나 향수를 시험 삼아 가볍게 뿌려 본 론다는 기침을 했다.
“고상하신 취향인가? 알다가도 도모르겠네.”
비 맞은 나무 냄새 같기도, 신전에서 피우는 향냄새 같기도 했다.
비싼 향이라고 했지만, 론다는 왜 이런 향이 그렇게 비싼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