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무척 근사한 신사분이시랍니다.
줄리엣은 조금 전 유니스가 그렇게 말했던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매력적인 금발의 남자와 정체불명의 '엘레노어’.
두 사람을 나란히 놓고 생각하니 줄리엣은 '엘레노어'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줄리엣은 마차를 재촉해 최대한 빠르게 저택에 도착했다.
"아, 아가씨. 이제 오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나중에요!”
“예?”
알은체하는 가문의 기사도 매몰차게 지나치고, 줄리엣은 단숨에 계단참을 뛰어 올라갔다.
'분명 여기서 봤어.'
세도가의 저택이 흔히 그렇듯, 수도의 칼라일 공작저에도 미술품을 늘어놓는 갤러리가 있었다.
물론 자기 모습을 굳이 그림으로 남기는 행위를 이해 못하는 가풍상, 초상화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가문의 초대 가주의 초상화만큼은 어느 저택에나 걸려 있기 마련이었다.
숨이 차도록 뛰어온 줄리엣은 중앙 계단 위, 휘장이 반쯤 내려진 커다란 초상화 앞에 조용히 멈춰서 숨을 골랐다.
'왜 진작 눈치채지 못했지?'
줄리엣은 이 초상화 앞을 백 번은 더 지나쳤을 것이다.
“… 이 사람이었어.”
흑단처럼 검고 긴 머리칼.
반짝이는 루비색 눈과 눈가의 점.
초상화만으로도 사람을 끌어들일 것 같은 대단한 미인이었다.
줄리엣은 눈으로 맨 아래에 적힌 그녀의 이름을 읽을 수 있었다.
'엘레노어 칼라일.'
그녀는 공작가의 초대 가주였다.
**
줄리엣이 '엘레노어의 정체를 눈치챈 그 시각.
“자, 착하지?”
저택의 반대편, 칼라일 공작의 집무실 앞 복도에서는 엘리엇이 천장을 향해 애타게 깃털을 흔들고 있었다.
“삐약?"
눈물겨운 구애의 반대편에는 높은 샹들리에 위로 올라가 버린 아기 용이 있었다.
집무실에 있던 반짝이는 인장반지를 장난감이라고 생각했는지, 오닉스가 반지를 물고 샹들리에 위로 날아가 내려오질 않고 있었다.
샹들리에 위에 올라간 아기 용은 그곳이 마음에 들었는지 삐악거리며 서까래 사이를 요리조리 돌아다녔다. 아무래도 사람을 놀리는 데 재미가 붙은 게 분명했다.
“요 녀석아, 제발 오늘은 이쯤하고 내려와라, 응?"
공작가의 비서, 엘리엇이 애걸 했지만 그조차도 아기 용이 제발로 순순히 내려오지 않을 거란걸 짐작하고 있었다.
아기용은 줄리엣이 아니면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데다가, 무럭무럭 자라는 속도와 비례해 나날이 말썽을 부리는 솜씨가 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특히나 기분이 좋은 듯 삐약삐약 새처럼 지저귀기까지했다.
새끼 용은 반지를 물고 내려와주기는커녕 아예 천장 사이의 좁은 틈에서 몸을 말고 자리를 잡았다.
“끄응…."
이쯤 되면 줄리엣이 돌아오지 않는 이상은 절대 내려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음?”
저걸 어떻게 끌어내리나, 아래에서 이를 갈던 엘리엇은 저기 멀리 복도 끝에서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
칼라일 공작의 집무실 앞에서 웬 여자 하나가 서성이고 있었는 데, 그 뒷모습이 꽤 익숙했다.
호리호리한 체형이나 조금 딸아서 깔끔하게 틀어 올린 업스타일머리 모양, 단정한 비둘기 색 치마 같은 게 그랬다.
'줄리엣 양!’
드디어 저 말썽쟁이를 끌어내려 줄 구세주가 나타났다는 생각에 엘리엇은 단번에 뛰어가서 여자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했다.
“줄리....”
엘리엇은 하마터면 '줄리엣 양?’
하고 반갑게 부를 뻔했다.
그러나 엘리엇이 여자의 어깨를 짚은 바로 그 순간.
“꺄아아!”
“으아악!”
엘리엇을 돌아본 젊은 여자가 화들짝 놀라며 새된 비명을 질렀고, 엘리엇은 덩달아 소리를 질러 버렸다.
“뭐, 뭐, 뭐…… 하는 겁니까!
여기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여자는 는줄리엣이 아니었다.
엘리엇이 줄리엣으로 착각했던 여자는 얼마 전 저택에 새로 들어왔다던 하녀였다.
이름이 론다라고 했던 것 같다.
“죄, 죄송해요! 저는 단지, 공작님께 차를 가져다 드리려고…….….”
론다는 보란 듯이 차 쟁반을 내밀었다.
“고, 공작님은 지금 출타하고 안 계신단 말이오!”
아직도 놀란 게 가라앉지 않아서 엘리엇은 소리를 지르듯 대답했다.
“그, 그럼 언제 돌아오세요?”
“그건 나도 모릅니다!"
론다는 결국 실망한 표정으로 돌아갔지만, 엘리엇은 어쩐지 집 찝하다고 생각했다.
“빡?”
샹들리에 위에서 딴청을 피우던 아기 용이 무슨 일인가 궁금하다는 듯 폴짝 제 발로 도장을 물고 내려왔다.
덕분에 얼결에 문제가 해결됐다.
“.…끄응.”
엘리엇은 재빨리 인장 반지를 를빼앗아 주머니에 챙겨 넣으면서도 조금 전의 하녀가 사라진 방향을 힐끔거렸다.
“모나드 양과 닮았나……?”
"?"
물론 생김새야 전혀 달랐다.
하지만 머리색부터 머리 모양, 사소하게는 곧은 걸음걸이까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꼭 일부러 따라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
“죄송합니다, 성하. 뭔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길리엄 추기경은 언짢음을 숨기고 법황의 알현실로 돌아왔다.
법황의 수도 방문은 흔치 않은 이벤트였고, 막대한 성금을 내면서 법황을 알현하고 싶어 하는 귀족들은 많았다.
오늘 방문하기로 했던 카루소남작도 그런 귀족들 중 하나였다.
'카루소 남작'은 법황과 한 시간 독대하는 조건으로 큰 웃돈을 주고 급히 약속을 잡았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약속한 시각을 훌쩍 넘기고도 카루소 남작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카루소 남작은 오지 않을…….”
그러나 알현실로 들어오던 길리 엄 추기경은 멈칫했다.
화려하게 꾸며진 알현실 안에는 힐데가르트 법황 외에도 젊은 남자 둘이 더 있었다.
문가에 그림자처럼 조용히 서 서 있는 검은 피부의 남자는 아무래도 호위인 듯했고, 법황의 맞은편 자리, 의자 깊이 몸을 묻은 흑발의 남자에게서는 나이답지 않은 관록이 넘쳤다.
“.…공작?”
길리엄 추기경은 눈을 의심했다.
공작가 특유의 섬뜩한 적안. 검은 물이 묻어날 것 같은 머리칼.
하지만 칼라일 공작가와 신전의 오랜 반목은 유명했다.
"크흠, 미안하지만 나가 주셔야겠습니다, 공작. 이 시간에는 이미 방문 예정자가 있습니다."
“카루소 남작은 오지 않을 겁니다.”
레녹스 칼라일은 단조롭게 말했다. 길리엄 추기경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차렸다.
'카루소 남작'은 허구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래, 공작.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걸음 하셨소?"
법황, 힐데가르트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칼라일 공작은 대답 대신 품에서 뭔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차르륵.
보라색 보석이 달린 목걸이였다.
법황과 추기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제노비아의 소울 스톤이 아니오? 줄리엣 모나드를 대신해서 돌려주러 온 것인가?"
그러나 칼라일 공작은 산뜻하게 웃어 보였다.
“이건 그냥 평범한 소울 스톤이 아닐 텐데요.”
"허. 평범한 소울 스톤이 아니면 뭐란 말이오?"
인자한 노부인처럼 생긴 법황, 힐데가르트는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시치미를 떼는 법황을 노려보는 레녹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제노비아'는 악령과 계약한 천재였지. 내 말이 틀린가?"
“뭐, 뭐요?”
힐데가르트 법황은 입을 다물고 침묵했지만 길리엄 추기경은 당혹을 금치 못했다.
“왜 그런 억측을 하는 겁니까, 공작? 공작도 알다시피 제노비아는 재능이 출중한, 살아 있다면 성녀가 될 수 있을 만큼 특별한 아이였소!”
"아, 그래. 특별한 아이였겠지."
'줄리엣 모나드 처럼 말이야.'
칼라일 공작이 빈정거렸다.
수십 년 전, 법황청에는 '예언의 아이'라는 소녀가 등장했다.
손이 닿기만 해도 어떤 병증이든, 상처는 깨끗하게 치유한다는 놀라운 이야기는 은밀하게 퍼져 나갔다.
어린 천재 '제노비아'를 만나려고 온 대륙의 유력 인사들이 법황청으로 달려왔고, 신전은 황금을 갈퀴로 긁어모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신전의 높으신 분들이 알아차린 거야. 아, 천재 제노비아가 사용하는 힘이 신성력이 아니고 당신네들이 그렇게 끔찍하게 배척하는 사악한 악령의 힘이란 걸.”
“터무니없는 모함이오!"
길리엄 추기경은 더는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렸다.
“그렇게 생각하나, 추기경?"
그러나 레녹스 칼라일의 서늘한 시선이 닿자 길리엄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하.”
칼라일 공작이 눈짓하자 그때까지 문가에서 조용히 침묵을 지키던 공작의 수하가 뭔가를 들고 왔다.
쿵.
제법 묵직한 흑단나무 상자가 뭔지 알아본 길리엄 추기경은 기겁했다.
“이건 관이 아닙니까?"
정확히는 어린 아이를 묻을 때 쓸 법한 작은 크기의 관이었다.
“맞아. 정확히는 '제노비아'를 묻을 때 쓴 관이지.”
대답과 동시에 칼라일 공작은 테이블 위에 놓인 관의 뚜껑을 열었다.
"무, 무슨 짓을……!”
길리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관 안에 들어 있을 어린아이의 유해를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린 제노비아는 불에 타 죽었다.
"......?"
그러나 실눈을 뜬 길리엄 추기 경은 어리둥절해졌다.
작은 관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이상한 것은 관 안쪽의 면적이 완벽히 은으로 덮여 있다는 점이었다.
“왜, 제노비아의 관에 은 처리가……?”
의아해하던 길리엄은 퍼뜩 어떤 사실을 눈치챘다.
순은으로 안을 메운 관은 주로 타락한 성직자를 묻을 때나 사용하는 관이었다.
“서, 설마…….”
“그 설마가 맞아. 제노비아 베링어는, 소울 스톤을 보면 신성력 쪽에 재능이 있는 것도 맞았겠지만, 사실은 동시에 당신네들이 경원시하는 '악령의 힘'을 사용했던 거지. 아닌가?"
그리고 폭발적인 부와 명성을 을가져다주었던 제노비아의 치유력은 단연코 아티팩트와 그 안에 깃든 악령에게서 나온 힘이었다.
"어떻게 알았소?”
법황 힐데가르트의 그 반문은 시인이나 다름없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