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173화 (170/229)

173화.

***

몰래 먹이는 것만으로도 열렬한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묘약이 있다.

연인들의 계절을 앞두고, 수도에는 그런 뜬소문이 돌고 있었다.

“소문이 아니라 진짜예요. 제가 직접 경험했는걸요.”

줄리엣은 남성용 장신구를 파는 부티크에 앉아 있었다.

고급 상점가가 즐비한 백양나무 거리에서도 북쪽에 위치한 회원제 부티크는 휘장으로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다.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다가 카탈로그를 보고 물건을 고르면 점원이 상품을 가져다주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은밀한 대화를 나누기에는 적격이었다.

줄리엣은 이 사치스러운 장소에서 친구인 엠마의 소개로 사교계를 들썩이게 하는 소문의 주인공을 만날 수 있었다.

“딱 사흘이면 충분하답니다."

묘약을 실제로 사용해서 짝사랑하던 상대와 약혼했다는 아가씨, 유니스였다.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꼭 사흘째 되는 날 청혼을 받았거든요.”

유니스는 장갑을 벗어 약혼반지를 내보였다.

발그레한 뺨, 열에 들뜬 눈.

유니스의 모습은 누가 봐도 연인의 마음을 얻어 행복에 겨운 아가씨였다.

"그 약을 어디서 구했다고요?"

"황후궁의 시녀들이 제르망 백작님을 소개시켜 줬어요.”

“제르망 백작 이요?”

“네.”

사실 줄리엣은 수상한 묘약보다는 그 약의 출처에 관심이 있었다.

“제르망 백작님은 정말 놀라운 분이세요.”

유니스는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말했다.

하지만 줄리엣은 이미 유니스의 연애사보다 정체불명의 약을 시중에 마구 팔아 치우고 있는 '제 르망 백작'의 정체가 더 궁금했다.

사실 줄리엣은 약을 퍼뜨린 배후로 뱀의 가짜 신분인 황후궁시녀, 엘리자베스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뜻밖에 제르망백작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올 줄이야.

'어차피 악령은 성별이 없댔잖아.’

게다가 인간을 잡아먹고 겉모습을 훔치는 건 그 뱀의 특기 중 하나였다.

다른 신분을 만들어 내는 것쯤은 숨 쉬듯 쉬운 일일 것이다.

만약 줄리엣의 추측대로 묘약을 만들어 내는 게 그 뱀의 계략이라면, 또 무슨 꿍꿍이인 걸까?

“무척 근사한 신사분이시거든요……."

유니스의 몽롱한 표정이 마음에 좀 걸리긴 했지만.

줄리엣은 어쨌거나 유니스가 잘살기를 빌어 주었다.

"만나서반가웠어요,유니스양.”

“저도요. 그럼 연회장에서 뵐게요.”

유니스와 엠마가 먼저 자리를 뜬 다음에도 줄리엣은 부티크에 남아 있었다.

줄리엣은 다 식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제르망 백작’이라.

그 뱀은 귀신같이 사람의 욕망을 감지했다.

그리고 그 뱀의 탁월한 능력은 사람의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자기 멋대로 휘두를 때 발휘되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줄리엣은 자신의 찻잔 옆에 곱게 놓인 은제장신구를 만지작거렸다.

남성용 브로치인 부토니에 였다.

유노 정화제는 오래된 전통이었다. 그런 만큼 주고받는 선물의 종류도 정형화되어 있다.

주로 여자 쪽에서는 옷깃에 다는 부토니에를 답례품으로 선물하곤 했고, 오늘 외출의 핑계로 줄리엣이 구매한 남성용 부토니에도 바로 그러한 물건이었다.

값비싼 물건은 아니었지만 튀지 않고 무난히 옷깃에 달 수 있을만한 점잖은 은장 장신구였다.

딱히 누구에게 주기 위해서는 아니었지만.

“실례합니다, 아가씨.”

그때, 휘장을 걷고 들어오는 누군가의 인기척이 줄리엣의 상념을 방해했다.

“아, 네. 다 봤으니 가져가세요.”

줄리엣은 들어오는 사람을 보지도 않고 카탈로그를 건네주려고 했다.

안 그래도 슬슬 일어나려던 찰나였다.

휘장으로 공간이 분리되어 있는 이 부티크는 취급하는 물건의 가격대가 상당한 편이지만, 오늘이 대목인지라 카탈로그가 부족해 보였다.

그러나 고개를 든 줄리엣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 할아버지?”

“?"

빙그레 웃으며 맞은편 자리에 앉는 것은 말끔하게 차려입은 리오넬 르바탄이었다.

“오랜만이구나, 줄리엣.”

“세상에.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외조부가 분명 동부로 돌아갔을 거라고 생각했던 줄리엣은 놀라움 반 반가움 반으로 활짝 웃었다.

“하나 있는 손녀 얼굴을 잊어버리게 생겼는데 도통 연락도 없고, 그러니 별수 있나? 한가한 늙은이가 찾아와야지.”

"아…….”

“차를 가져왔습니다."

휘장을 걷고 점원이 따뜻한 차를 새로 내어 왔다.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 달라는 친절한 영업성 멘트와 함께.

점원이 나가자 리오넬 르바탄은 점잖은 차림새로 앉아서 꽤 진지하게 카탈로그를 넘겨보는 척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줄리엣은 눈을 깜빡였다.

리오넬 르바탄은 황제에 의해 반역죄로 수배된 신분이었다.

물론 리오넬 르바탄 입장에서는 모함이었다.

오래 전 동부에서 리오넬 르바탄이 적왕이라고 불리던 시기, 그를 추종하는 세력이 커지자 위협을 느낀 황실이 역모죄를 뒤집어씌운 것이다.

어쨌든 수십 년 전의 판결은 지금도 유효했다.

-황제의 땅에 발을 들이는 즉시 사형.

그 판결 직후 리오넬 르바탄은 자취를 감췄고, 오랫동안 동부에 숨어 살았다.

방금 나간 점원조차도 잘 차려 입은 점잖은 노인이 설마 반역죄인이라고는 상상도 못하는 눈치였지만,

‘이렇게 버젓이 돌아다녀도 괜찮은 걸까.'

그것도 바로 코앞에 황제가 사는 황궁이 있는데?

“왜 그러냐?”

빤히 쳐다보는 줄리엣의 시선을 느낀 리오넬 르바탄이 물었다.

슬그머니 걱정이 되면서도 줄리 엣은 철없는 소리를 했다.

“할아버지가 계셔서 좋아요.”

"녀석, 싱겁기는.”

줄리엣은 배시시 웃었다.

“할아버지.”

“음?”

“할아버지는 모르는 게 없으시죠?”

“그럼.”

“그러면,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말해 보거라.”

"만약에요. 누군가 어떤 가문을 대대로 저주할 정도로 오랫동안 미워한다면, 그건 원인이 뭘까요?”

리오넬 르바탄은 난처한 듯 눈썹을 까딱였다.

“너무 애매하구나. 힌트 좀 다 오.”

“힌트요?”

하지만 이건 줄리엣도 답을 모르는 문제였다.

심지어 저주받은 가문의 당사자인 레녹스도 답을 모를 텐데.

"음…… 그 누군가가 '엘레노어’라는 사람과 잘 아는 사이였던 모양이에요.”

“엘레노어?”

"네”

매우 흔한 이름이다.

줄리엣은 이걸론 별 단서가 못될 거라고 후회했지만, 시종일관인자한 표정이던 리오넬 르바탄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슬쩍 목소리를 낮춰물었다.

“혹시 그 누군가가 그 놈팡이냐? 설마 엘레노어란 여자가"

"네? 아뇨! 아니에요."

줄리엣은 다급히 부인했다.

“그냥 다른 사람 얘기예요.”

엄밀히 따지면 그 뱀은 사람도 아니 었지만, 리오넬 르바탄은 미심쩍다는 표정이었지만 일단은 생각에 잠겼다.

“대개 뿌리 깊은 원한을 품을만한 이유는 하나뿐이지.”

별 기대 없이 던진 질문이었지만 줄리엣은 솔깃했다.

"그게 뭔데요?”

“치정이지.”

“.....… 치정이요? 사랑싸움?"

줄리엣은 맥이 빠졌다.

“저 놀리시는 거죠?”

그러나 리오넬 르바탄은 손녀의 실망한 표정을 보고서도 껄껄 웃을 뿐이었다.

“원래 세상 일이 그렇단다. 뭔가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 같아도, 막상 진실을 알게 되면 시시했던 적이 있지 않니?"

“있지요.”

“그것 보렴.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인 걸.”

줄리엣은 여전히 납득이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왜 그렇게 확신하세요?

단순히 엘레노어가 여자 이름이라서요?”

“그것보다는 감정의 문제란다.”

리오넬 르바탄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미워하는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고 했잖니."

"네, 이유는 몰라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집요하게 미워하는 것 같았어요."

“누군가를 그렇게 감정과 에너지를 쏟아 미워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란다. 그리고 보통 그런 집요한 행동은 깊은 감정과 연관되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고, 또 그 증오 자체가 정반대 행동의 결과물일 수도 있지."

"정반대 행동……? 그게 뭔데요?”

리오넬 르바탄이 빙그레 미소지었다.

“증오의 반대가 뭐겠니?”

"아.”

줄리엣은 그제야 리오넬이 치정이라고 답한 의미를 깨달았다.

리오넬 르바탄은 지나가는 투로 가볍게 말했지만 그의 답을 곱씹는 줄리엣의 표정은 꽤나 진지했다.

'그 증오가 애정에서 비롯되었다면?'

“허허, 그렇다고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그냥 늙은이의 헛소리 거니……."

드르륵.

“음?”

줄리엣이 갑자기 굳은 얼굴로 로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카우치가 밀릴 정도로 다급한 동작이었다.

“할아버지, 저 가 볼게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났어요!"

리오넬 르바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줄리엣은 외조부를 한번 와락 끌어안은 다음, 뭔가를 그의 손에 덥석 쥐여 주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은제 부토니에였다.

줄리엣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할아버지는 제가 아는 가장 현명한 분이세요!”

그러곤 그대로 부티크를 뛰어나왔다.

".… 얘야, 줄리엣!"

뒤에서 리오넬 르바탄이 뛰지 말라고 만류하는 것 같았지만 줄리엣의 머릿속에는 빨리 저택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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