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172화 (169/229)

172화.

"뭐, 좋습니다. 뭔가 알아내면 연락드리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에셀리드는 줄리엣에게 거듭 당부하는 걸 잊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의 모습을 훔치는 뱀이라니…….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모르니 늘 조심하십쇼.”

“네, 그럴게요.”

줄리엣이 작은 손거울을 손에 쥔 채 웃으며 그를 배웅했다.

에셀리드가 응접실을 나서던 찰나, 낯선 얼굴의 하녀 하나가 복도 끝에서 손님을 데리고 나타났다.

“아가씨, 친구이신 엠마 양께서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줄리엣. 손님이 계신 줄은…… 어머!"

명랑하게 줄리엣을 향해 인사하던 엠마가 돌연 에셀리드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다시 오겠습니다.

에셀리드는 점잖게 목례하고는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엠마는 마법사용 로브를 입은 에셀리드를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저분은 누구세요?"

“친분이 있는 마법사예요. 이것 저것 도움을 받고 있지요.”

“그렇군요……. 와!"

응접실 안에 가득한 꽃을 보고 엠마가 탄성을 터뜨렸다.

엠마가 응접실을 구경하는 동안 조금 전의 하녀가 새 찻잔을 가져다주었다.

'못 보던 얼굴인데.'

줄리엣은 아직 낯선 하녀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고마워, 론다.”

“별말씀을요.”

하녀가 활짝 웃고는 차 트레이를 놓아 두고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줄리엣은 붙임성 좋은 새 하녀를 눈여겨보았다. 얼마 전 별채로 새로이 배정되었다던 하녀였다.

“듣고 있어요, 줄리엣?"

“아...… 네?”

엠마의 목소리에 줄리엣이 반짝 고개를 들었다.

“미안해요, 엠마. 무슨 말 했어요?”

“혹시 청혼받았어요, 줄리엣?"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심각하게 뱀 악령과 엘레노어에 대해 고민하던 줄리엣은 순식간에 현실로 끌어내려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청혼요?”

갑자기?

"네! 유도 정화제 기간이잖아요?”

얼떨떨한 줄리엣의 반응에도 아랑곳않고 엠마는 어쩐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그리고 유도 정화제는 연인들의 날이고요!”

유도 정화제.

꽃을 선물하고 작은 장신구 따위의 답례품을 주고받는 풍습이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연인들 사이에서 압도적인 인기를 누리긴 하지만, 유노는 가정의 수호성이었다.

가족간의 돈독한 감사와 정을 나누는 풍습이 묘하게 변질됐다.

어쩐지 잔뜩 기대하는 눈치로 로엠마가 물었다.

“이 꽃들을 보니까 혹시 공작님이 프로포즈 하셨나 해서요. 아, 아닌가요?”

특히 이 기간에 꽃을 건네며 청혼하는 연인들이 많았으므로, 엠마가 오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줄리엣은 빙그레 웃었다.

“아니에요.”

꽃 선물은 그냥 면피용이었다.

애초에 종교적 행사에 관심 없는 레녹스는 지금이 뭐 하는 축일인지도 모를 터였다.

줄리엣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들은 한가하게 축일 따위에 에신경 쓸 형편이 아니었다.

“그런가요……. 하지만 줄리엣도 공작님께 선물을 드릴거죠? 네?"

아니. 그럴 생각 없었는데.

엠마는 함께 외출하자고 조르기 시작했지만 줄리엣은 조용히 웃기만 했다.

엠마와의 대화는 꽤 즐거웠다.

엠마는 흥미로운 소문들을 많이 알았고 줄리엣은 적당히 맞장구를 치면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줄리엣을 다시 설득하려던 엠마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참! 줄리엣, 혹시 그 얘기 들으셨어요?”

“어떤 얘기요?”

“사랑의 묘약이요!”

줄리엣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려다 멈칫했다.

"단 몇 방울이면 사람을 반하게 할 수 있대요. 놀랍지 않나요?"

신이 난 얼굴로 엠마는 꽤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유니스 양도 그 묘약을 써서 고백을 받았고, 벨린저 백작은 젊음을 가져다주는 약을 사들였대요!”

무정한 상대도 금방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는 묘약과 젊음을 가져다준다는 영약.

엠마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꽤 흥미진진했다.

최근 중앙 귀족들을 중심으로 효능이 수상한 약들이 유행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누구든 첫눈에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묘약이래요!"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엠마는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사랑의 묘약이라니.

“아, 하지만 줄리엣은 관심 없겠죠……?"

줄리엣은 싱긋 웃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꽤 무서운 이야기네요.”

“왜요? 짝사랑하는 상대와 맺어질 수 있는 좋은 기회잖아요.”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원하지도 않는 상대와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단 말이잖아요?"

"아…?”

엠마의 순진한 얼굴에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게요…….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랑 사랑에 빠지다니, 그건 끔찍해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엠마가 절 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 말에 줄리엣은 아직 입을 대지 않은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게 진짜라는 가정 하에서지만..

줄리엣은 첫눈에 반하게 해준다.

는 약의 존재를 별로 진지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짝사랑에 시름하는 젊은이들이 넘쳐나는 유노 정화제 무렵에는 사랑의 묘약을 판다는 장사꾼들이 제법 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엉터리 상술에 불과했다. 싸구려 초콜릿이나 술에 묘약이니 미약 같은 이름을 붙여 파는 사기꾼들이었다.

‘하지만 시기가 공교롭네..'

줄리엣의 손끝이 테이블을 톡톡두드렸다.

그리고 안좋은 촉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

잠시 생각하던 줄리엣이 물었다.

“엠마, 혹시 그 약들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도 아나요?"

“어머, 줄리엣도 관심 있어요?”

엠마가 어쩐지 발그레한 뺨으로 눈을 반짝반짝 빛내더니, 대단한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소곤소곤 알려주었다.

"이건 비밀인데요, 실은 로즈궁의 시녀들을 통하면 구할 수 있대요!”

로즈 궁은 황후의 거처다.

'그러면 그렇지.'

짐작대로였다. 수도에 수상한 약을 풀고 있는 것은 엘리자베스, 그 뱀의 소행이 분명했다.

한편으론 역시 지난번의 마수소동의 배후는 그 뱀 악령이었구나, 확신했다.

지난번에는 마수들을 날뛰게하는 연막탄이더니, 이번에는 사랑의 묘약과 젊음의 약이라니.

그 뱀은 약을 마음대로 뽑아내는 능력이라도 있는 걸까?

묘약이 진짜인지는 몰라도 그 뱀이 악령답지 않게 꽤나 세속적인 음모에 능숙한 것만은 분명했다. 꼭 인간처럼.

'내가 본 악령들 중에 제일 유능하고 부지런하네.'

줄리엣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번엔 그 묘약으로 무슨 짓을 꾸미려는 걸까?

'뭐, 미리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줄리엣은 아까 전 응접실을 나간 낯선 얼굴의 하녀를 떠올렸다.

그리곤 엠마 쪽으로 고쳐 앉으며 물었다.

“엠마, 그 묘약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해줄래요?"

*

“… 별 대단한 미인도 아니잖아?”

“응? 뭐라고 했니, 론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응접실을 돌아나온 하녀, 론다는 재빨리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표정을 바꿨다.

별채의 하녀들은 론다를 제외하곤 하나같이 공작가에서 오래 일한 사용인들이었다.

조심스러운 성격인 듯 별채의 의아가씨인 줄리엣은 좀처럼 새로운 사용인들을 가까이 두지 않았던 것이다.

덕분에 공작저에 들어온 지 몇 주가 지났지만, 론다가 가까이에서 줄리엣을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론다는 줄리엣 모나드에 대한 소문을 떠올리며 입을 비죽거렸다.

'뭐 얼마나 대단한 미인인가 했더니. 그냥 평범하게 잘난척하는 귀족이잖아?'

떠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묘사하는 줄리엣 모나드의 이미지는 공작을 치마폭에 감싼 희대의 요부에 가까웠다.

그러나 막상 가까이에서 본 줄리엣은 좀 예쁘장할 뿐 얌전떨기 좋아하는 여느 귀족 영애들과 다를 게 없었다.

눈만 마주쳐도 사람을 홀릴 것 같은 대단한 미인을 상상했던 론다는 조금 우쭐해졌다.

론다 역시 평생 미인 소리를 들으며 살아왔던 것이다.

아래층으로 내려오면서 론다는 앞치마 주머니 안에 든 것을 만지작거렸다.

진홍색 액체가 담긴 작은 유리 병이었다.

1층 부엌에 도착하자 나이 지긋한 하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가씨께 차는 전해드렸니?”

“네, 하녀장님. 허리는 좀 어떠세요?”

론다는 싹싹하게 안부를 물었다.

칼라일 공작가에 하녀로 위장해 숨어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작가에 들어오는 데만 꼬박 몇 주가 걸렸지만, 조작된 추천장과 위조 신분 덕분에 론다는 별채의 하녀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소개장을 중간에서 가로채고 몰래 뒷공작을 꾸미는 등 결코 쉽지 않았지만 론다의 배후에는 2황자 클로프가 있었다.

물론 이틀 전 '우연히' 저택의 하녀장이 허리를 다친 것도 단순한 요행만은 아니었다.

본래 이 시간에, 칼라일 공작에게 약차를 내가는 것은 하녀장의 업무였다.

그러나 허리가 많이 아픈 듯 하녀장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럼 마리나, 네가 이걸 본채에…….”

론다는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손을 번쩍 들었다.

“저, 제가 대신 갈게요!"

하녀장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론다, 네가?”

"네. 어차피 마리나 언니도 팔목을 다쳤잖아요?"

“나 괜찮은데......”

“하녀장님, 제가 잘할 수 있어요!”

"흐음.”

론다가 워낙 적극적으로 나서자 하녀장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하지만 명심하거라. 차만 엘리엇 비서님께 넘겨드리고 바로 나와야 한다. 알겠지?"

“네!”

하녀장은 차를 내가기 직전까지 론다에게 신신당부했다.

“절대 공작님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된다.”

론다는 고개를 끄덕이는 척 했지만 한귀로 흘려버렸다.

공작저에 들어온 순간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주의사항이었다.

되도록 저택의 주인인 공작과 마주치지 말 것.

처음에는 신분 낮은 연인들을 가차 없이 내쳤다는 소문 때문인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지난 몇주간 공작가를 유심히 관찰했지만 칼라일 공작은 방종하다는 소문과는 영 거리가 멀어 보였다. 오히려 금욕적이었다.

“공작님은 누가 몸에 손 대는 걸 싫어하시거든."

그래서 옷시중을 드는 하인조차 따로 두지 않는다고 했다.

높으신 분의 결벽증인가 싶었다.

‘드디어..'

이윽고 하녀장이 공작에게 내갈 뚜껑달린 찻잔을 들려주었다.

얼른 쟁반을 들고 본채로 향한 론다는 애써 침착한 척 했지만 그간 깐깐한 하녀장의 비위를 맞추려 고생했던 것을 떠올렸다.

'이번 일만 잘 끝내면 보상을 을준다고 하셨어.'

론다는 2황자인 클로프의 수족이었다.

달그락거리는 찻잔이 놓인 쟁반을 들고 본채의 계단을 오르면서 론다는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이틀 전 2황자로부터 은밀리 전달된 명령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공작가에 뭔가 강력한 마력을 가진 정체불명의 존재가 있는지 확인하라는 것.

예를 들어서 강력한 힘을 가진 마법유물, 혹은 대마법사 같은것 말이다.

그러나 줄리엣의 손님인 마법사가 방문했을 뿐. 론다는 수상쩍은 존재나 강력한 마력의 징조는 찾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두 번째 명령은.

'기회를 봐서 둘 사이를 갈라놓을 것.'

론다는 굳이 2황자가 미모가 뛰어난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잊혀진 줄리엣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