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
2황자 클로프는 감금실에 처박혀 덜덜 떨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인 황제가 자신을 내치지 못할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클로프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황자 자리에서 쫓겨나거나 감옥에 갇히는 일이 아니었다.
“며, 명령하신 대로 마수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클로프는 두려운 눈으로 방 한가운데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금발 여자를 힐끔거렸다.
엘리자베스는 더 이상 단순한 황후의 시녀 따위가 아니었다.
'뱀.’
지금은 금발 미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클로프는 잠시나마 저 괴물의 본모습을 엿보았었다.
괴물의 본체는 거대한 뱀이었다.
그리고 뱀은 수시로 겉모습을 바꿨다.
뱀은 때때로 금발의 시녀가 되었고 어린애가 되거나 노인의 모습이 될 때도 있었다. 도대체 본 모습이 있기는 한 것인가 의심스러웠다.
스르륵.
지금만 해도 그렇다.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시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흰 정장을 입은 미끈한 젊은 금발 남자의 의모습이 나타났다.
다만 보랏빛 눈만은 그대로였다.
저 뱀은 황자인 클로프를 노예처럼 부릴 뿐 아니라 그의 부하 들까지도 완전히 장악했다.
“줄리엣 모나드를 적당히 유인 하기만 하면 됩니다.”
2황자의 보좌관이 냉큼 아부하듯 금발 남자에게 다가가 말했다.
클로프를 따르던 그의 부하들도 지금은 완전히 저 뱀에게 충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님, 그 늑대가 따라 주지 않으면 어쩌지요?”
본래 그들의 계획에서 줄리엣을 꾀어내는 것은 그 젊은 라이칸슬로프, 로이의 역할로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늑대는 약병을 깨뜨렸을 뿐 엘리자베스를 향해 손을 뻗지는 않았다.
“혹시 모르니 차선책을 준비해 두는 것이…….”
“걸려들 거야. 정말로 거절할 할 생각이라면 그 자리에서 나를 죽이려 들었을 테니까."
완벽한 금발 청년의 모습으로 외양을 바꾼 뱀이 웃지도 않고 자신했다.
“쯧, 짐승들은 매번 그런 식이지.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뱀이 빙그레 웃었다.
욕망을 기민하게 알아차리는 것이 뱀의 능력이었다.
“그러니 여분의 약을 준비해 두도록.”
금발 청년의 모습을 한 뱀이 약이 든 병을 건넸다.
최근 뱀 악령은 엘리자베스의 명성을 이용해 귀족들 사이에 수상한 약을 잔뜩 풀고 있었다.
젊음을 되찾아 주는 약이며, 미약이나 반드시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묘약까지. 온갖 수상한 약들을 시중에 풀어 막대한 황금을 챙기고 있었다.
악령들은 욕망과 공포, 질시와 탐욕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에너지로 삼는다.
하지만 적당히 인간의 감정을 을먹어 치우며 연명하는 다른 악령들과는 달리 노란 뱀은 맹목적인 증오에 휩싸여 움직였다.
지난 수백 년 동안 뱀은 그토록 증오스러워하는 인간을 먹어 치우고 그 껍데기를 훔치며 살아왔다.
인간 행세를 하며 적극적으로 그들 틈에 섞여 살아남는 방법을 익힌 것이다.
“아주 간단한 계기 하나면 그 늑대 놈은 여자를 손에 넣으려고 무슨 짓이든 할걸.”
뱀은 젊고 치기 어린 늑대가 반드시 함정에 걸려들 거라는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을 테니까.'
아무리 총명하고 강인한 존재라도 유치한 시기심과 질투에 눈이 멀어 쉽게 무너지곤 한다.
“그 계집도 예외가 아니었지.”
자신을 유령 보듯 보던 인간 여자를 떠올리며 뱀은 빙그레 웃었다.
시간 축이 비틀리기 전, 먼 과거에 뱀이 성녀가 될 뻔했던 '예언의 아이'의 시신을 삼켰던 것은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
본래는 회귀 이전, 불완전한 마력을 보완하기 위해 신성력이 필요해 소울 스톤을 훔치고 겸사겸사 성녀의 유해를 훔쳐 먹었을 뿐인데….
“그 인간 계집, 동요하는 게 꽤 재밌었지.”
뱀은 즐거운 듯 킬킬거렸다.
새파랗게 어린 칼라일 놈에게 붙잡혀 북부로 끌려왔을 때만 해도 뱀은 분노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필이면 지금의 칼라일 공작, 그 새파랗게 어린 인간 남자는 는수백 년 전, 그의 연적을 빼다 박았던 것이다.
'증오스러운 핏줄.'
그것만으로도 그 인간 남자는 위대한 뱀의 분노를 샀다.
그걸로도 모자라 위대한 악령인 저를 제압해 놓고는 다짜고짜 가문에 걸어 둔 오래된 저주를 푸는 파훼법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던 것이다.
오랫동안 갇혀 있느라 힘이 완전하지 못했던 뱀은 이를 갈면서 후회했다.
쓸데없는 성녀의 유해 말고 좀 더 건강한 먹이를 먹을걸.
최소한 건장한 인간 남자의 육신을 먹어 치웠더라면…….
그러나 북부의 성에서 어떤 인간 여자와 마주친 순간 뱀은 자신이 젊은 여자의 외양을 훔치기를 아주 잘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순진하고 어리석은 줄리엣 모나드.’
그 여자는 자존감이 낮고, 이용해 먹기에 적합한 먹잇감이었다.
아기를 가진데다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그때의 줄리엣은 뱀의 세뇌에 간단히 걸려들 만큼 연약했다.
그 여자가 연인에게 버림받았다.
고 오해하고 상처받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무한한 애정이 배신당하는 순간 증오로 이성을 잃는 것은 위대한 존재인 그 역시 경험해 본 일이었으니까.
“똑똑히 봐 뒤, 엘레노어. 이게 네가 치를 대가야.”
"엘, 제발……. 나한테 이러지 마!”
새삼스레 오래전의 기억이 떠올라 위대한 뱀은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네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대가로 네 첫 아이를 받아 가야지.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어.
엘레노어?"
대체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긴 세월 동안 증오로 몸을 불사르느라 뱀은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렸다.
그건 위대한 존재인 그에게도 엄청난 희생이었다.
'….… 상관없어. ’뱀은 사납게 보랏빛 눈을 빛냈다.
“하지만 신중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때 황자의 보좌관이 그의 상념을 방해했다.
뱀은 짧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칼라일 공작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닙니다. 번번이 위기에서 잘도 빠져나갔잖습니까.”
“일리가 있군.”
미끈한 금발 미남자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그러나 뱀이 염려하는 것은 칼라일 공작 쪽이 아니었다.
뱀은 줄리엣 모나드를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껏 몇 번이고 그의 마수에서 벗어난 그 연약한 여자.
먼 과거에 뱀은 그 여자를 세뇌해 망가뜨리는 데에 성공했었다.
그때 줄리엣은 드물게 정령사의 자질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저 겁에 질린 연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 그녀는 몇 번이고 위험을 비껴갈 뿐만 아니라, 역으로 기네스 후작과 저 멍청한 2황자에게 타격을 입히기까지 했다.
단순한 행운이라기에는 과했다.
'내가 뭔가 놓친 게 있나?'
심지어 지금 그녀의 나비들은 뱀의 손아귀에 떨어져 환술을 쓸 수도 없을 텐데.
대체 무슨 힘으로 위기를 벗어난 것인지 의아했다.
심지어 기네스 후작이 사용한 사념체는 파훼법이 사라진 강력한 고대의 저주였는데…….
"뭐,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둬서 나쁠 건 없겠지."
잡아먹을 때 잡아먹더라도 일단은 그 여자가 무슨 패를 숨기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
“삐약!”
이른 아침, 레녹스는 자신의 집 무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은 전설적인 마수를 발견했다.
새끼 용은 레녹스를 보자 반가운 듯 쪼르르 달려왔다. 발치에 매달리는 마수를 내려다보던 레녹스는 줄리엣을 찾았다.
“……줄리엣은?”
“줄리엣 양은 별채에 계시지요.”
공작의 비서가 냉큼 대답했다.
“저건 왜 여기 있어?"
“아가씨의 친구이신 엠마 양이 방문하시기로 예정되어 있어서요.”
새끼 용을 보고 놀랄까 봐 본관에 잠시 맡겨 뒀다는 이야기였다.
“요 녀석아! 얌전히 굴어야지."
비서인 엘리엇이 혀를 끌끌 차며 새끼 용을 혼내는 시늉을 했다.
위대한 마수의 왕은 위엄 있게 커튼을 앙앙 물어뜯는 중이었다.
레녹스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지난 이틀 내내 줄리엣은 별채에 틀어박혀서 그에게 얼굴조차 보여 주지 않았다.
그녀가 머무르는 별채에는 아무나 들락거릴 수 있지만 딱 한 사람, 칼라일 공작만은 출입이 금지되었다.
당장 그를 버리고 도망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지.
“꽃은?”
“보냈습니다만….…."
엘리엇은 말꼬리를 흐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안 들어도 뻔했다.
지난 이틀간 줄리엣이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질 않자 초조해진 레녹스는 애꿎은 가신들을 닦달했다.
북부 제일의 인재들이 머리를 를맞대고 이것저것 권했지만 별채로 뭘 보내도 줄리엣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단단히 화가 난 게 분명했다.
"...… 돌겠군.”
레녹스는 신음했다.
줄리엣의 화가 쉽게 풀릴 듯 보이지 않았다.
주인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던 공작가 가신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슬슬 그를 향해 측은하다는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게 평소에 행실을 잘하셨어야…….”
“뭐?”
"제가 방금 입 밖으로 말했습니까?”
그 시각, 줄리엣은 꽃 무더기에 둘러싸인 채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지난 이틀간 칼라일 공작은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온갖 호화로운 선물들을 보내왔는데, 오늘 아침 도착한 것은 어마어마한 봄꽃이었다.
“벌써 봄이 온 것 같아요, 아가씨.”
별채의 하녀들은 꽃들을 끌어안고 행복해했다.
“하지만 정말 저희에게 나눠주셔도 괜찮으세요? 전하께서 아시면…….”
“괜찮아. 마음대로 나눠 가지 렴.”
줄리엣은 입매로만 빙긋 웃는 시늉을 했다.
그러라지.
줄리엣은 단단히 화가 나 있었으므로 레녹스가 화원을 사 오든 튤립밭을 통째로 사들이는 신경쓰지 않을 작정이었다.
별채에 틀어박혔지만 줄리엣은 보란 듯이 손님들을 불러들였다.
상단의 마법사 에셀리드도 손님들 중 하나였다.
줄리엣은 다 털어놓지는 않았지만 에셀리드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간 알아낸 사실을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허, 그러니까 아가씨 말씀대로…… 그 시녀란 여자가 뱀이었다고요?”
에셀리드가 입을 딱 벌리고 되물었다.
“여성체도 아닐 거예요.”
악령은 성별이 없고, 그 뱀은 인간이 아니니까.
“그 뱀은 사람을 잡아먹고 겉모습을 바꿀 수 있대요."
“그러면 누구로든 변장할 수 있겠군요. 으스스한데요."
에셀리드는 심각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줄리엣은 응접실 안에 잔뜩 쌓인 꽃송이들을 둘러보았다.
(애초에 너는 내 계약자도 아니잖아!)
검은 표범은 화를 내고 허공으로 사라진 뒤로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심심해 죽겠다며 찾아와서 조잘거릴 때는 언제고.'
하지만 얻어 낼 정보는 다 얻어냈기 때문에 줄리엣은 크게 아쉬워하지도 않았다.
“그럼 그 뱀의 진짜 이름을 알아내야 하겠군요?"
“네.”
아티팩트의 이름과 악령의 진짜 이름. 이렇게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했었다.
"흠,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있습니다. 사제들이 악마를 물리 칠 때 그 이름이 약점이었다던가요.”
에셀리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가씨 부탁대로 조사는 해 보겠지만……. 만약 단서가 있다면 북부에 있지 않을까요?"
“북부에요?”
그럴듯한 지적이었다.
줄리엣은 북부의 공작성에 수백년 된 석판 기록들이 쌓여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러나 줄리엣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면 레녹스가 진즉 처리했을 거예요.”
레녹스는 저주를 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가 만일 뱀을 봉인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았더라면 지금껏 손 놓고 있진 않았겠지.
“알겠습니다. 알아보지요. 혹시 다른 단서는 더 없습니까?”
단서라.
잠시 생각하던 줄리엣은 어떤 이름 하나를 떠올렸다.
"엘레노어.”
“엘레노어요?”
줄리엣은 며칠 전 광장에서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잠시 뿐이지만 그 뱀은 분명 그 이름에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에셀리드가 눈을 빛냈다.
“그게 혹시 정답 아닐까요?"
“아니랬어요.”
줄리엣 역시 혹시나 해 물어봤지만 검은 표범은 이름이 아니라고 확인해 주었다.
‘그리고 악령은 거짓말을 못한 댔지.’
그러니까 그건 그 뱀의 이름이 아닐 것이다. 애초에 엘레노어는 너무 흔한 이름이기도 했다.
‘어디서 들었더라.'
하지만 왜 뱀은 그 이름에 반응을 보였을까?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