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170화 (167/229)

170화.

*

칼라일 공작이 줄리엣을 에스코트해서 저택에 당도했을 때, 공작가의 가신들은 주군의 안색이 굳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공작은 어쩐지 흉흉한 기세로 주변을 물리고 방해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심지어 줄리엣은 무척 귀여워하며 떼어 놓지 않던 새끼 용까지도 복도로 내보냈다.

“삐약!”

영문도 모르고 복도로 쫓겨난 아기 용은 굳게 닫힌 문을 구슬프게 앞발로 긁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말수 적은 주군을 수년 동안 모셔 온 가신들은 비상한 촉을 발휘했고 뭔가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이거 들어가서 말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비슷한 상황은 과거에도 몇 번인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심상치 않은 공기를 읽어 냈을 때는 줄리엣모나드가 도주했을 때였던가.

부단장인 밀란과 비서인 엘리엇을 비롯한 공작가의 핵심 인원들의 표정이 덩달아 심각해졌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다섯 명의 인간들과 한 마리의 마수는 침실 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 문에 귀를 바싹 들이댔다.

행여나 큰 소리가 들려오면 당장이라도 안으로 뛰어들어 말릴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그러나 한참 귀를 기울여도 안에서는 조용조용 대화가 오갈 뿐, 그들이 걱정했던 것처럼 싸우는 것 같은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괜찮으신 것 같은데요."

“하! 그러게 제가 뭐랬습니까?

교양 있게 대화로 해결하시는 게 분명….”

그때였다.

“멍청이라고 했어요!”

큰 소리가 들려오기는 했다.

"......?"

다만 그들이 생각했던 심각한 대사와는 꽤나 거리가 있는 고성이었다.

*

레녹스 칼라일은 미움받는 데 익숙했다.

그러나 온갖 욕설과 저주에 이 골이 난 그에게도 이 같은 경험은 처음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셨어요?”

“줄리엣.”

"왜요! 제가 설마 아무것도 모르게 속여 줘서 고맙다고 할까봐요?"

난생처음 듣는 폭언에 그는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린애도 아니고……. 대체 왜 처음부터 말을 안 해요!”

그러면 언제 말하려고 했는데?

"나는, 내가……. 세상에, 그것도 모르고 내가 혼자 남겨져서 무슨 생각을 했는데……!"

한참을 씩씩거리며 퍼붓던 줄리 엣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새삼스럽지도 않네요.”

줄리엣이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매번 그랬으니까. 저는 사실을 확인하기 무서워서 묻지 않았어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그들은 서로를 다 아는 듯 굴었지만 정작 깊은 오해가 있다는것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전하는 저한테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셨던 거겠죠.”

줄리엣의 시무룩한 중얼거림에 레녹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고, 하나하나 설명해 봤자 귀찮고 성가 시기만 하니까.”

“....… 귀찮지 않았어.”

몸을 낮춰 줄리엣과 눈높이를 맞춘 그는 그제야 침착을 되찾았다.

그는 겨우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당장 그녀의 화를 풀기에는 역부족이더라도, 털어놓아야 하는 감정이 한참 쌓여 있었다.

“네가 성가시다고 여긴 적도 없어. 다만.”

줄리엣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무서웠을 뿐이다.

“네가 알면 틀림없이 겁을 먹고 도망칠 거라고 생각했어.”

돌이켜보면 늘 그랬다.

언제든 떠나보낼 수 있다고 스스로를 속였지만 눈속임일 뿐이었다. 자각하기 훨씬 전부터 그는 반해있었다.

그게 수가 놓인 손수건을 받던 순간이었는지, 검은 드레스를 입은 소녀와 마주치던 순간이었는지 불확실할 뿐.

멍하니 그를 보던 줄리엣의 푸른 눈이 아련해졌다.

“…… 제가 진실을 알게 되면 겁먹고 도망갈까 봐 지금까지 말을 안 했다고요?”

“그래.”

“제가 그렇게….….”

줄리엣이 물기 어린 푸른 눈으로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건드렸다.

“멍청이로 보여요?"

"......"

“세상에, 레녹스 칼라일!"

분이 덜 풀린 듯 줄리엣의 푸른 눈이 레녹스를 홱 노려보았다.

“당장 나가요!"

“뭐?”

"아니, 제가 나갈게요.”

그 말과 동시에 줄리엣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나 단번에 침실 문을 양쪽으로 열어젖혔다.

쿠당탕.

“삑!”

"어이쿠!”

덕분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밖에 우르르 몰려 있던 사람들이 연달아 쓰러졌다.

그러나 줄리엣은 그들을 보고 눈살을 한 번 찌푸렸을 뿐이다.

“줄……."

“따라오지 말아요!”

쾅.

줄리엣은 복도 맨 끝의 손님용 침실로 들어가더니 문을 세게 닫아 버렸다.

그 직후, 복도에 남겨진 사람들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내가 분명 주위를 물리라고 하지 않았나?”

“주, 주군. 그게……."

“저희는 걱정이 되어서……

문 앞에 귀를 대고 엿듣던 가신들은 서슬 퍼런 시선에 움찔했다.

* * *

한편 복도 끝의 작은 침실로 들어온 줄리엣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리케이드를 쌓듯 손님용 침대 위에 있던 베개들을 문가로 던졌다.

그리고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기가 막혀서!’

“흥…….”

어느 틈에 줄리엣을 따라 쏙 들어온 오닉스가 슬금슬금 줄리엣의 눈치를 보며 다가왔다.

줄리엣은 분이 덜 풀린 채로 아기 용을 꼭 끌어안았다.

사실을 숨긴 레녹스에게 화가 나긴 했지만 그건 스스로에 대한 화풀이에 가까웠다.

아주 오래전부터, 레녹스는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았고 줄리엣은 겁나서 묻지 않았다.

언젠가 여름 별궁에서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했던 것처럼.

그렇게 오랫동안 켜켜이 쌓인 오해가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줄리엣은 자신이 과거에.

겪은 고난이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는지 원한을 잊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게 전부 그 뱀 탓이란 말이지.'

줄리엣의 푸른 눈이 사납게 반짝였다.

상대가 수백 년 된 악령이든 차원 너머에 존재하는 위대한 신격이든 상관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건드린 걸 후회하게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어떻게든 관심을 끌어 보려고 고개를 기웃거리는 오닉스를 무릎에 놓아 준 다음, 줄리엣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노려보았다.

“듣고 있는 거 다 알아."

(……너 설마, 날 부른 거냐?)

“이리 나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검은 표범 악령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타났다.

(너 이 몸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모르는 거냐?)

그러거나 말거나.

줄리엣은 듣는 척도 하지 않고 작은 침실 안을 둘러보았다.

이 작은 손님용 침실은 최근 줄리엣이 수집한 자료들을 보관해 놓는 창고로 쓰이고 있었다.

줄리엣은 쌓여 있는 책 더미를 힐끔 보다가 품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작은 손거울이었다.

"이 거울, 본질을 보여 주는 거지?”

(그래.)

검은 표범은 의외로 순순히 시인했다.

조심스레 손거울을 비추자,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금빛 사슬에 칭칭 묶인 검은 표범이 비쳤다.

(설마 그걸로 악령의 정체를 폭로하려고?)

표범이 재밌다는 듯 물었지만 줄리엣은 태연하게 말했다.

"내 눈에는 네가 사슬에 묶여있는 모습으로 보여."

(…… 그렇겠지.)

"이 노랗게 빛나는 사슬이 너희가 말하는 '제약'이지?"

표범은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다. 정답인 모양이었다.

줄리엣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녀의 추측에 따르면, 이 검은 표범과 줄리엣의 나비처럼 악령들은 어쩐지 노란 뱀에게 약점을 잡힌 것처럼 보였다.

직접적으로 노란 뱀에 대한 약점이나 정보를 누설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줄리엣은 악령들을 다루는 데 제법 능숙했다.

“그 뱀이 너희 우두머리라도 돼?”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검은 표범은 그녀의 예측대로 발끈했다.

(그 뱀은 그냥 늙은이일 뿐이야.)

태초의 뱀, 가장 오래된 악령이란 이야기는 줄리엣 역시 들은 적 있었다.

“그럼 왜 꼼짝 못하는데?"

(그게 과거에 늙은 뱀이 내건 제약 조건이라 그래. 그뿐이야.)

표범은 조금 불편한 기색이었다.

대체 악령들이 말하는 '과거'에 뱀이 무슨 짓을 한건지는 모르겠지만 표범이나 그녀의 나비들이 과거의 일을 직접 언급하는 것은 금기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겠지..'

줄리엣은 검은 표범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비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표범 악령도 그녀에게 뭔가를 바라는 것처럼 주변을 얼쩡거렸다.

직접적으로 말은 못하는 주제에 단편적인 과거 기억만 보여주면서 눈치 채기를 바라다니.

줄리엣은 눈을 깜빡이다가 불쑥 물었다.

“그 뱀의 이름이 엘레노어야?”

(……너 지금 나한테 다른 악령의 진짜 이름을 알려 달라고 하는 거냐?)

검은 표범은 기가 막힌다는 듯 투덜거렸다.

(악마의 진짜 이름은 그렇게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러나 줄리엣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아니라는 거네. 그럼 달리아가 그 뱀의 진짜 이름인가?”

(그건 그 뱀이 갇혀 있던 보관의 이름이지. 물론 악령을 봉인하는 데는 아티팩트의 이름도 필요하지만 정작 악령의 진짜 이름을 모르면 별로 치명적이지도 않은…….)

주절주절 떠들던 검은 표범은 은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채고 고개를 갸웃했다.

줄리엣이 의미심장하게 눈을 빛내고 있었던 것이다.

(음? 왜 그렇게 보는가?)

“그러니까 아티팩트와 악령의 진짜 이름이란 걸 알면 그 뱀을 봉인할 수 있다, 이거구나?"

(……젠장.)

표범은 어쩐지 스스로에게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차르륵.

그와 동시에 금빛 사슬이 표범의 목을 감는 것이 줄리엣의 눈에도 보였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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