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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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녹스가 대신전을 막 빠져나왔을 때,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스르륵 검은 표범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봐.)
어쩐지 기분이 들떠 보이는 검은 표범은 대뜸 앞뒤를 잘라먹고 제 용건을 내뱉었다.
(우리 아가씨가 드디어 알아차렸어.)
“우리?”
레녹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 능글맞은 악령이 요즘은 줄리엣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줄리엣은 한 번도 그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틈만 나면 표범은 그녀의 곁에 붙어서 종알거렸다.
레녹스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줄리엣은 어디에 있지?”
법황이 거울을 보냈을 때부터 짐작했던 일이었다.
“괜찮아요, 줄리엣?"
줄리엣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엠마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아까부터 안색이 안 좋아요.”
“저는 괜찮아요.”
줄리엣은 애써 웃어 보였다.
엠마는 그녀의 외할머니인 일레나 대부인의 자택으로 줄리엣을 데려왔다.
인망 있는 일레나 대부인의 살롱에는 손님들이 많았고 줄리엣은 엠마 자매와 대부인의 지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중이었다.
엠마의 언니인 샬롯이 줄리엣의 빈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레몬차예요. 몸을 따뜻하게 해줄 거예요.”
따끈한 찻잔을 손으로 감싸 쥐고서야 줄리엣은 자신의 손이 차가워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줄리엣은 티 테이블에서 오가는 대화에 웃으며 귀 기울여 듣는 척했지만 사실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앉아 있는 내내 줄리엣의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달리 아가, 그 여자가…….
‘엘리자베스가 뱀이었다고..'
평범한 존재가 아니리란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아예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악령에게는 성별이 없다고 했으니 아마 여성체조차 아닐 것이다.
노을 색 홍차를 티스푼으로 천천히 저으며 줄리엣은 얌전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럼 레녹스가 쫓던 것도 그 뱀이었구나.'
줄리엣은 그가 남부로 보관을 찾으러 갔던 것을 기억해 냈다.
정작 보관을 가져온 뒤로는 십수 년 동안 애타게 찾아다닌 게 무색할 정도로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기에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이미 보관에 얽매이지 않는 거고.’
그 표범 악령이 알려 준 것처럼, 뱀 악령은 사람을 잡아먹고 힘을 키웠기에 보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던 듯했다.
보관 안에 갇혀 있던 것이 그 노란 뱀이라는 악령이었고….…
그 뱀은 사람을 잡아먹고…….
'그리고 나는 악령의 미움을 샀나 봐.'
하지만 왜? 뭐 때문에?
줄리엣은 애꿎은 찻잔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원한을 살 만한 짓은 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전 생에서는 아티팩트나 악령과 얽힌 일도 없지 않았던가.
'모르겠어.'
당장 레녹스에게 달려가서 묻고 싶은데, 뭐부터 물어야 할지 몰라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어머나!"
감탄사에 고개를 들자 사람들의 시선이 응접실 입구를 향해 있었다. 낮잠에서 깬 아기가 유모에게 안겨 응접실로 나온 것이다.
“귀엽기도 해라.”
"눈매는 꼭 샬롯을 닮았네요.”
손님들은 유모와 샬롯을 둘러싸고 아기를 구경했다.
아기가 엄마를 닮았다는 둥 화기애애한 덕담이 오갔다.
"어때요, 줄리엣? 한번 안아 볼래요?”
"아. 아뇨, 저는……."
그러나 샬롯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강보에 싸인 아기를 넘겨주었다.
얼결에 아기를 안아 든 줄리엣의 자세는 영 어설퍼서 보다 못한 샬롯이 고쳐 주었지만.
“...… 작네요.”
“그렇죠?”
엠마가 신이 나서 자랑했다.
“손이랑 발은 또 얼마나 신기한 지 몰라요.”
엠마의 말대로 앙증맞은 손에 그보다 훨씬 작은 손가락과 손톱이 있는 것도 신기했다.
인형처럼 조그만 아기를 안고 있으려니 절로 기분이 묘해졌다.
'아기.’
모처럼 사르르 마음이 편안해지 는가 싶었던 줄리엣은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달리아를 처음 마주쳤을 때.
그때 줄리엣은 한계에 몰려 있었다.
레녹스에게 이제나 저제나 쫓겨 나지 않을까, 혹은 아이를 빼앗기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 때문에 제 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욕망을 가진 사람은 현혹되기 쉬우니, 경계할 것.]
그리고 달리아의 악령에게 홀려서 이용당한 멍청한 기네스 후작과 2황자도 욕심에 눈이 멀어 있었다.
줄리엣이 이해한 것이 맞는다면 악령은 사람의 약한 부분을 파고들었다.
노란 뱀은 욕망을 가진 사람을 교묘하게 부추겨서 파멸로 이끄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똑똑.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부인. 찾아오신 객이 있으십니다."
왠지 잔뜩 긴장한 듯한 시종이 입구에 나타나 방문객을 알렸다.
응접실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온통 입구 쪽으로 쏠렸다.
“어머……."
“저분이 칼라일 공작이에요?"
그때까지 샬롯의 아기를 조심스레 안고 있던 줄리엣은 익숙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레녹스는 잠시 줄리엣과시선을 마주했을 뿐 이렇다 할말을 하지도 않았다.
줄리엣 역시 아기를 샬롯에게 돌려준 다음 싱긋 웃으며 인사했다.
"초대 즐거웠어요, 엠마. 다음에 또 놀러 올게요."
“아, 네…….”
“이만 가요.”
줄리엣은 속삭이듯 레녹스의 팔을 잡아 끌었다.
자연스럽게 자리를 빠져나오는 두 사람을 붙잡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칼라일 공작가의 마차는 대부인의 저택을 빠져나왔다.
“전하.”
붉은 휘장이 내려지고 소음이 차단되자 줄리엣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저 오늘 엘리자베스를 봤어요.”
줄리엣은 시선을 창밖에 고정한 채로 여상하게 말했다.
“그 뱀이요.”
레녹스는 어느새 줄리엣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줄리엣의 안색은 나쁘지 않았다. 최소한 화가 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는 점에 그는 안도했다.
“뭘 먼저 물어야 하는지 몰라서 계속 고민했는데…… 좀 알겠어요.”
줄리엣은 호흡을 가다듬듯 조곤 조곤 말했다.
창밖에서는 사순절을 맞아 꽤나 시끌벅적한 풍경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줄리엣의 목소리는 나직하면서도 묘한 힘이 있었다.
“예전에 제가 용서를 빈 적이 있었어요.”
레녹스는 줄리엣이 말하는 것이 어느 시기인지 단번에 알아들었다.
“전하는 화를 내시고, 저는 울고, 난장판이었죠.”
줄리엣은 그를 보지도 않고 가볍게 싱긋 웃었다. 그에게는 가벼이 웃으며 넘기기에는 고통스러운 장면 장면이었다.
그는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울기만 하는 줄리엣을 버려두고 자리를 피해 버렸다.
“궁금한 게 있어요.”
"말해.”
“그때…… 그 다음에, 전하가 달리아를 찾아오신 건 맞아요?”
“그래.”
“왜요?”
줄곧 앞을 보고 있던 줄리엣의 푸른 눈이 그를 향했다. 그건 줄리엣이 그동안 한 번도 떠올린 적 없었던 질문이었다.
“그러니까 왜 하필 그때 그 보관을 찾아온 거예요?"
왜 하필 그 시기였을까?
아이의 존재를 숨긴 줄리엣의 비밀이 들통나고, 그가 성을 떠나 버리고.
그리고 며칠 뒤 그는 달리아를 찾아내서 돌아왔다. 악령이 담긴 보관을 동쪽 탑에 가둬 둔 채였지만…….
“뭐 때문에 달리아를 찾아서 가져오신 거예요?”
여느 때처럼 차분한 푸른 눈이 그를 보고 물었다.
레녹스의 기억도 줄리엣처럼 조각나 있었다.
검은 표범은 종종 그가 망각한 기억들을 끌어올려서 보여 주곤 했는데, 그의 무의식에서 가장 빈번하게 되풀이되는 장면은 언제나 스스럼없이 웃는 줄리엣의 모습이었다.
사실 그건 악몽이라기에는 애매했다. 그는 이따금 그 악몽을 기다리기까지 했다.
되레 그것이 악몽이 되는 것은 현실에 머물러 있을 때였다.
조금 전, 대부인의 저택에서 아기를 안고 생각에 잠긴 줄리엣을 마주쳤을 때처럼.
“줄리엣.”
레녹스가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을 때, 때마침 마차가 멈춰섰다.
“네가 알아야 할 게 있어.”
그건 그가 두 번의 생 내내 그녀에게서 의도적으로 숨겼던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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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더니 금방 하늘이 어두워졌다.
칼라일 공작저는 수도에서도 손꼽힐 만한 규모를 자랑했다. 저녁이 되자 일제히 노란 불이 밝혀지는 장면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저택 밖 커다란 느릅나무에 시선을 주는 이는 없었다.
높고 튼튼한 가지에 가볍게 올라 앉아 있던 것은 훤칠한 체격의 남자였다.
로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막 저택 앞에 멈춰선 것은 흑단 목으로 만들어진 사륜마차였다.
로이는 마차에서 내리는 한 쌍의 남녀가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조용히 지켜보다가 아래로 뛰어내렸다.
가볍게 착지한 다음 로이는 손에 쥐고 있던 비단 끈을 내려다보았다.
얼마 전 앰버 궁에서 줄리엣과 우연히 마주쳤을 때 그녀가 흘린 것이다. 줄리엣은 잃어버린 것을 알지도 못하는 듯 했지만.
로이는 가지런한 푸른 비단 끈에 입을 맞췄다.
기다리는 것은 그의 장기였음에도, 최근 들어 로이는 부쩍 조급해졌다. 자칫 성급하게 굴면 미움을 살 거라는 걸 알면서도,
“모나드 백작이라.”
돌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로이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두운 수풀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로이는 인상을 썼다. 숨어있는 자의 존재를 자신이 알아채지 못했다는 게 이상했다.
“아름다운 분이죠?”
“나와.”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존재는 순순히 모습을 드러냈다.
정체불명의 로브를 벗자 로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기척을 능숙히 숨길 거라고 생각될 만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금발의 여자는 나붓이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엘리자베스 틸먼이라고 해요.”
“압니다.”
로이는 다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 역시 엘리자베스의 이름을 들은 적 있었다.
황후의 총애를 받는 치료사라던가.
최근 평민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군.
이런 시각에, 이 인간 여자가 칼라일 공작가 앞에 나타나다니.
영 그림이 수상했다.
왠지 불쾌한 냄새가 났다. 로이는 이마를 찡그렸다.
물론 줄리엣은 로이에게 달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 없었다.
하지만 로이는 그녀의 생각 이상으로 수도의 소문에 밝았다.
로이는 이 황후의 치료사가 공공연히 모나드 백작과 부딪쳐 소란을 일으켰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게 경계하실 것 없어요.
저는 그냥 도와드리려는 것뿐이에요.”
“돕는다고?”
로이는 더는 참지 못하고 코웃음 쳤다.
줄리엣 앞에서는 세상 순한 척하고 있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오만한 이종족이었다.
눈앞의 엘리자베스는 흠잡을 데 없는 인간의 겉모습을 하고 있었다. 감히 인간 따위가 그의 사정을 꿰뚫고 있다는 양, 도움 운운하다니.
“저는 알고 있거든요."
그러나 로이의 비웃음에도 엘리자베스는 주눅 든 눈치가 아니었다.
“위대하신 숲의 왕께서 진실로 원하는 게 뭔지.”
금발을 늘어뜨린 여자는 되레그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로이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아주 간단한 일만 해 주시면, 원하는 걸 손에 넣게 되실 거랍니다.”
여자의 보랏빛 눈이 기이할 정도로 반짝였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