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167화 (164/229)

167화.

“모나드 백작님!”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린 것은 낯익은 여자였다.

누구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하던 줄리엣의 눈이 동그래졌다.

“엠마?”

엠마는 줄리엣과 친분이 있는 일레나 대부인의 손녀였다.

몇 달 전 줄리엣은 대부인의 초대로 엠마와 함께 남부를 방문하기도 했었다.

“오랜만이에요, 백작님! 우연히 지나가는데 줄리엣을 발견한 거 있죠!”

카나리아처럼 샛노란 드레스를 입은 엠마는 상기된 뺨으로 즐겁게 이야기했다.

“수도에는 어쩐 일이에요?"

“샬롯 언니가 아기를 낳았거든요! 그래서 축성을 받으러 왔어요.”

줄리엣은 남부에서 엠마의 언니, 샬롯을 만났던 일을 떠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인데 제법 오래전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때 만삭의 임산부였던 샬롯은다행히도 무사히 아기를 낳은 모양이었다.

“마침 수도에 법황께서 머물고 계신다기에 혹시 법황성하의 축원을 받을 수 있을까 하고요.”

신분을 막론하고 제국 사람들은 누구나 아이가 태어나면 신전을 찾는다.

딱히 신앙심 깊지 않은 사람들이라도 태어난 아기가 한 살이 되기 전에 사제의 축복을 받는 것을 관례로 여겼다.

불경스러운 북부의 어느 유명한 가문 하나를 제외하면 귀족일수록 지위가 높은 사제로부터 축성을 받고 싶어 했다.

‘하지만 쉽지 않을텐데..'

바로 조금 전 대신전을 방문했다가 문전박대 당했던 줄리엣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법황 성하를 뵙는 건 이틀 뒤에나 가능하다지 뭐예요?”

역시나 곧바로 엠마가 불만스러운 듯 투덜거렸다.

“그래도 행운이네요! 신전에서 돌아가다가 이렇게 줄리엣을 만났으니 말이에요.”

엠마는 신이 나서 줄리엣에게 같이 마차를 타고 가자고 권했다.

“샬롯 언니랑 저는 할머니 댁에 머물고 있거든요!”

“……글쎄요.”

줄리엣은 난처한 듯 공작가의 마차 쪽을 돌아보았다.

거의 줄리엣의 전담 호위가 되어버린 공작가의 기사, 주드가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렇게 하시죠.”

함께 외출한 주드가 흔쾌히 권했다.

“뭐 어떻습니까. 어차피 주군께서도 바쁘시고요.”

주드는 공작가의 마차를 돌려보낸 뒤, 줄리엣과 함께 엠마의 마차에 옮겨탔다.

“잘됐네요! 샬롯 언니도 줄리엣을 보면 기뻐할 거예요!"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엠마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남부는 상황이 꽤 나빴어요.

바다에서 마수들이 튀어나왔거든요.”

엠마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역시나 남부에도 마수들이 출몰했던 모양이었다.

일레나 대부인이 외손녀들을 수도로 급히 불러들인 것은 증손주의 축성보다는 남부 분위기가 어수선한 탓인듯 싶었다.

올해 농사가 어려울 것 같대

“게다가 할머니가 그러시는데, 요……. 참, 모나드 백작님도 만나보셨어요?”

“누구를요?"

“그 유명한 성녀님이요!"

달리아의 이름이 어느새 남부까지 퍼져나간 듯했다.

덜컹.

그러나 줄리엣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마차가 크게 흔들리며 갑자기 멈춰섰다.

“무슨 일이야?”

앞에 황후의 시녀들이 지나가고 있답니다, 엠마 아가씨.”

황후의 시녀들?

“.…내려서 구경할까요?"

눈을 빛내던 엠마는 줄리엣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마차에서 폴짝 내렸다. 덕분에 줄리엣도 반강제로 마차에서 끌어내려졌다.

줄리엣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 풍경을 볼 수 있었다.

파견된 관리들이 구호품이며 약품들을 나눠주고 있던 것이다.

그 뒤로 황후의 시녀들이 차례로 마차에서 내려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성직자처럼 순백의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저분이 성녀님이셔!”

누군가의 외침에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의 관심이 그쪽을 향했다.

금발 여자의 모습에 군중들은 물론이고 엠마 역시 흥분했다.

"어머, 저 분이신가봐요!”

잔뜩 들뜬 엠마가 줄리엣의 팔을 끌면서 속삭였다.

줄 서 있던 사람들은 슬금슬금 대열을 이탈했다. 금발에 흰옷을 고집하는 엘리자베스 틸먼은 누가 봐도 성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인지, 가장자리에 서 있던 작은 아이 하나가 밀려 넘어졌다.

"으아앙! 엄마아!”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쿠, 괜찮느냐?"

다행히 어린아이의 바로 앞에서 있던 경비대원들이 아이를 일으켜 주었다.

“엘레노어!”

아이의 엄마는 놀라서 허겁지겁 사람들을 헤치고 달려왔다. 다행히 넘어진 아이는 무릎이 조금 까졌을 뿐 크게 다치지 않았다.

'어?’

그러나 순간적으로 줄리엣은 시선을 빼앗겼다.

분명 아이 엄마가 ‘엘레노어!'하고 이름을 크게 부른 순간, 고고 하게 걸음을 옮기던 엘리자베스가 뒤를 홱 돌아보았던 것이다.

그건 단지 넘어진 아이가 걱정된 반응은 절대 아니었다.

마치 그 이름에 놀라기라도 한 것처럼, 무시무시한 무표정으로 그 자리에 멈춰섰던 것이다.

“성녀님!”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이상한 반응을 눈치챈 것은 줄리엣 뿐인 것 같았다.

“부디 저희 아이를 보살펴 주세요!”

딸을 끌어안은 부인이 엘리자베스를 향해 호소했다.

사람들의 기대 어린 열렬한 시선이 엘리자베스를 향했다.

“……그럼요, 부인."

엘리자베스는 언제 무표정이었냐는 듯, 그린 듯한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다친 아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파앗.

엘리자베스가 손을 내밀자 일순 금빛 광채가 흘러나오더니, 아이의 무릎에서 피가 멎었다.

"오오! 역시!”

“성녀님께서 치유력을 보여주셨다!”

“신성력이야!”

사람들 사이에서 기쁨에 찬 반응이 터져 나왔다.

'아냐, 저건.’

줄리엣만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어렴풋이 의심하던 의문점을 확인 사살한 기분이었다.

엘리자베스가 보여준 것은 신관들이 사용하는 치유력이 아니라 단순한 마법 치료다.

치유력이 상처를 아예 없던 것으로 말끔하게 만든다면 마법 치료는 응급처치에 불과하다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줄리엣은 상단의 마법사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이 저런 식으로 지혈해주는 것을 보았다.

“가, 감사해요.….”

눈이 휘둥그레진 아이가 엘리자 베스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자 엘리자베스의 팔에 감겨 있던 붕대가 흘러내리며 불에 덴듯한 흉이 드러났다.

'화상?’

엘리자베스는 잠시 당황한 듯 소매를 내렸지만 사람들은 완전히 감격했다.

“제 몸보다 평민 아이를 살피시다니!”

“역시 성녀님 …… 어이쿠!”

뒤쪽에 있던 남자 하나가 줄리 엣의 팔을 툭 하고 건드렸다.

그러자 주드가 줄리엣을 밀친 사내의 목덜미를 사납게 잡아쳤다.

“이봐, 무슨 짓이냐!"

“죄, 죄송합니다!”

그러나 줄리엣은 사과를 받아줄 상황이 아니었다.

소란 때문이었는지 엘리자베스가 정확히 줄리엣이 있는 자리를 쳐다보았다.

반짝.

그리고 그 순간, 줄리엣의 손에 들려있던 손거울이 햇살을 반사했다.

짧은 찰나였지만 줄리엣은 똑똑히 보았다.

엘리자베스 틸먼이 있던 자리에는 거대한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엘레노어!]

줄리엣은 고통에 찬 남자의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쉬쉬거리는 환청을 똑똑히 들었다.

챙그랑.

그 순간 줄리엣은 휘청이며 손가방을 떨어트렸다.

“어머!"

엠마가 놀라 줄리엣을 돌아보았다.

“괜찮아요, 줄리엣?"

손거울은 물론이고 그 바람에 안에 든 것이 와르르 쏟아졌다.

내용물이라고 해 봐야 별 거 없었기에 바로 옆의 사람들이 주워주었다.

“네, 괜찮아요."

“그 거울 깨지진 않았어요? 얼굴이 창백해요.”

거울은 실금 하나 없이 멀쩡했지만 줄리엣은 덜컥 제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방금 그건 뭐였지?'

선 채로 깜빡 악몽이라도 꾼 걸까.

고개를 들자 엘리자베스는 이미 황후의 시종들에게 둘러싸여 건물 안으로 모습을 감춘 뒤였다.

방금 전 목격했던 장면들과 함께 조각조각 줄리엣의 단편적인 기억과 의문들이 섞였다.

안개 낀 숲 한가운데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거미줄처럼 촘촘한 실타래를 쥐고 있지만 가느다란 실 끝에 무엇이 있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는,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조금 전보았던 엘리자베스의 화상이었다.

그리고 광장에서 줄리엣을 공격했던 정체 모를 존재.

그것은 행방불명된 돌로레스의 겉모습을 흉내 내고 있지 않았더가.

“....…그 뱀이었어."

“네?”

줄리엣을 해치려던 그 뱀은 불길에 휩싸여 사라졌다.

엘리자베스가, 레녹스가 말했던 보관에서 빠져나온 뱀 악령이었던 것이다.

어느 정도 무의식적으로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줄리엣은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직 설명되지 않는 것이 잔뜩 있었다.

어쩐지 이걸로 끝이 아닌 것 같았다.

'만약 저 엘리자베스란 여자가 악령이라면 어떻게 사람 모습을 하고 있단 말이야?'

능글맞은 검은 표범도, 말이 서툰 나비들도, 줄리엣이 본 악령들은 하나같이 물리적 실체를 가지지 않았다.

(우리는 간섭할 수 없게 되어있어.)

그래서 큰 영향을 끼칠 수 없다고 했다.

인간의 정신에 간섭해서 환영을 보여주는 게 고작이었다.

심지어 줄리엣의 나비들은 말이라도 좀 많이 할라치면 어김없이 차원 저쪽으로 역소환 당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떻게?'

줄리엣은 손거울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이건 본모습을 보여주는 거울인 듯 싶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저 뱀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인간 행세를 할 수 있지?

"힘이 강해지면 뭘 할 수 있는데?”

(누구처럼 모습을 바꾸는 것도 가능해지지.)

머릿속이 새하얘진 것과는 별개로 줄리엣의 머리는 착실히 지난 몇 달간 모은 조각들은 착착 짜맞추고 있었다.

[사악한 뱀은 가장 오래된 죄악이다.]

추기경이 전해준 필사본에는 분명 그런 말이 있었다.

그 뱀은 한입에 집어삼킨 희생양의 능력과 외양을 흉내낸다고 했지.

'이 이야기를 어디서 처음으로 들었었더라?’

잠자리 동화책에서 읽었던 흉내쟁이 뱀 이야기였다.

흉내쟁이 뱀.

본모습이 없어서 사람을 잡아먹고 먹이의 모습을 흉내 내며 살아가는 이상한 뱀의 이야기.

"아가씨.”

“네?”

줄리엣이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이거 떨어뜨리셨습니다. 아가씨물건이죠?”

“아…… 고마워요.”

주드가 내민 것은 보랏빛 광채가 영롱한 소울스톤이었다.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 했다.

줄리엣은 깜짝 놀라서 소울스톤을 소중히 움켜쥐었다.

소울스톤은 신성력이 없는 사람도 신성력을 쓸 수 있게 해 주는 귀한 성유물이었다.

그리고 이 보라색 소울스톤은 놀라운 신성력을 타고났다는 소녀, 제노비아의 유해로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그리고 그 제노비아는…….

'지금의 엘리자베스와 생김새가 닮았지.'

엘리자베스를 먼발치에서 봤던 테오와 에셀리드는 입을 모아 말했었다.

"저 여자, 그 미친 법황의 누이 동생이랑 똑같이 생겼어.”

“그 아이가 죽지 않고 성장했다면 지금 저 여자랑 많이 닮았겠네요.”

제노비아가 요절하지 않고 자랐다면 지금의 엘리자베스처럼 생겼을 거라고, 그때는 그저 대수롭지 않게 넘겨 들었지만 이제 줄리엣은 알것 같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실타래를 손에 쥔 느낌이었다. 투명하고 힘주기 두려울 정도로 연약하지만, 분명 그 곳에 존재하는 무언가.

분명 이전의 삶에서 달리아라는 여자는, 지금의 엘리자베스는 신성력과 마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하지만 이번 생에는 군중 앞에서 자애로운 성녀 행세를 할 뿐 신성력은 보여주지 않았다.

지금의 엘리자베스는 어째서 전 생과 달리 신성력을 쓰지 못하는 걸까?

'아.’

줄리엣은 소스라쳤다.

완전하진 않지만 그럴듯한 설명이 떠올랐던 것이다.

분명 이전 생에서 달리아는, 그 보관의 악령은 노란색 소울스톤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조차도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게 아니니. 조작된 기억일수도 있지만.'

줄리엣은 제 손 안에 남겨진 소울스톤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전생에서 달리아가 신성력을 제멋대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게 그 소울스톤 덕분이었다면?

'사용하지 않는 게 아니라, 쓸 수 없었던 거야.'

불과 몇 시간 전에 길리엄 추기 경은 그녀에게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소울스톤은 그 자가 가진 마력의 색으로 변하게 되지요."

'애초에 다른 소울스톤이 아니었어.' 처음부터 소울스톤은 하나였다.

전생에서 제노비아의 소울스톤은 달리아의 손에 들어갔고, 색이 변한 것 뿐.

그렇다면 지금의 엘리자베스가 신성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도 설명할 수 있다.

이번 생에는 제노비아의 소울스톤이 줄리엣의 손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줄리엣?”

마차에 오르던 엠마가 고개를 갸웃하며 줄리엣을 불렀지만 그녀는 듣지 못한 듯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줄리엣은 그제야 확신했다.

제노비아 역시 뱀의 희생양 중 하나였던 것이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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