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166화 (163/229)

166화.

로이를 저택 앞까지 배웅한 줄리엣은 온실로 돌아오다 멈칫했다.

테이블에 비딱하게 걸터앉은 남자가 펼쳐진 책 한권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차.'

페이지를 눌러둔 책이 그의 눈에 띈 모양이었다.

“이건 뭐지?"

“그냥 옛날이야기를 모아둔 책이에요.”

줄리엣은 침착하게 대답했지만 레녹스는 흥미롭다는 듯 책장을 넘겨보았다.

사실 줄리엣은 책에서 뱀 악령의 기록을 찾는 것은 거의 포기했다. 조금이라도 실용적인 조언이라곤 기껏해야 뱀을 만나면 뒤로 도망치라는 정도였을까.

“그럼 이건?”

레녹스가 가리킨 것은 조금 전 로이가 전해주었던 작은 손거울이었다.

“법황으로부터 받은 거예요.”

쓸모는 모르겠지만, 그 말에 레녹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법황이 뭘 약속했지?"

“……노란 뱀에 대해 알아봐주시겠다고 했어요.”

줄리엣은 잠시 망설이다가 설명했다.

법황이 줄리엣의 이름으로 투척된 정체 모를 기부금의 포상으로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노라고.

“그런데 답변 대신 손거울을 보내왔으니 성유물일지도 모르겠네요.”

어부의 반지처럼 뭔가 악령을 을막아주는 기능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작은 손거울을 유심히 보던 레녹스가 불쑥 말했다.

“손 줘.”

“네?”

“손 달라고.”

영문을 모르고 눈을 깜빡이자 레녹스가 손수 그녀의 손 위에 뭔가를 쥐여주었다.

잘그락.

“이건 네가 가지고 있는 게 낫겠군.”

레녹스가 내민 것을 확인한 줄리엣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낯익은 물건이었다.

“아?"

보랏빛 영롱한 광채를 뽐내는 팬던트는 낯익은 물건이었다.

제노비아의 소울스톤이었던 것이다.

“이게 왜 여기에…….”

“쓰지 않았어.”

분명 이전에 레녹스는 그녀를 구한 대가로 시력을 잃었었다.

신성 저주니만큼 소울스톤만한 강력한 신성력이 아니고서는 시력을 되찾을 길은 없어보였다.

그래서 줄리엣은 그를 낫게 할 소울스톤을 레녹스에게 보냈었 었고, 그 덕분에 그가 시력을 되찾았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에게서 받아 든 소울 스톤은 형체가 멀쩡했다.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다는 것이.

그럼 무슨 수로 회복한 걸까?

줄리엣은 의아했지만 레녹스는 어떻게 해서 시력을 회복했는지 영 가르쳐줄 것 같지 않은 표정이었다.

“전하.”

“왜?”

특유의 슬쩍 눈썹을 치켜올리는 시늉만 봐도 뻔했다.

저주에 대해 문외한인 줄리엣도 알고 있었다. 등가교환은 절대적인 법칙이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대체 뭘로 시력을 되찾는 대가를 지불한걸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소 무거운 심정으로 줄리엣은 그의 시선을 피하듯 멀쩡한 소울 스톤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이제 제노비아의 소울스톤은 돌려줘야 하는걸까?

*

그러나 줄리엣은 법황에게 소울 스톤을 돌려주지 못했다.

“안됩니다.”

다음날 대신전으로 향했지만 단호한 표정의 길리엄 추기경에게 가로막혔던 것이다.

“지금은 성하를 만나 뵐 수 없습니다.”

“많이 바쁘신가요?"

“보시다시피 성하의 축성을 바라는 방문객이 잔뜩입니다."

과연 추기경의 말대로 대신전 전 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소울스톤을 핑계로 법황을 만나이 손거울을 보낸 것이 무슨 의미였는지, 그리고 이건 뭐 하는 물건인지 듣고 싶었는데.

“법황 성하는 신전에서 가장 높은 분이십니다. 성하의 옷깃이라도 한번 잡아보고 싶어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 지 알고 계십니까?”

사실 별생각 없이 법황을 만나 고자 대신전으로 걸음 했던 줄리 엣도 꽤 놀라던 차였다.

“얼마 전부터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고 있잖습니까.”

길리엄 추기경이 근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균형이 무너지고 있는데 원인을 밝히질 못하니, 길 잃은 양들이 성하를 찾는 것도 당연하지요.”

정 그렇다면야.

줄리엣은 별로 실망하지 않고 용건을 꺼냈다.

“그럼 저 대신 법황 성하께 이걸 전해주시겠어요?”

“뭡니까? 봉헌물은 검사를 거쳐야.….”

퉁명스럽게 말하며 줄리엣이 건넨 비단 주머니를 열어본 길리엄추기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노비아의 소울 스톤이군요?”

“네.”

“아니 이걸 왜 이제야…….”

그런데 길리엄은 고개를 갸웃했다.

“헌데 사용하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색이 그대로잖습니까."

쿡 하고 길리엄이 소울스톤을 건드렸다.

“신성력이 없는 자가 오랫동안 소울스톤을 사용하거나 지나치게 남용하게 되면 소울스톤도 서서히 바닥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요?”

“그러면 그 자가 가진 마력의 파장 색으로 변하게 되지요."

이번에는 줄리엣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울스톤의 색이 변한다고요?”

“예, 마력이든 신성력이든 고유의 파장 색이 있으니까요.”

난생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제노비아의 소울스톤이 보랏빛인 이유는 그녀의 신성력 파장이 같은 색이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달리아가 가지고 있던 소울스톤은 노란색이었나?'

전생에서 얼핏 그렇게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어쨌든 이걸 성하께 좀 전해주시겠어요?”

그러나 뜻밖에도 잠시 생각하던 길리엄 추기경은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물건이니만큼 직접 성하께 드리는 게 좋겠군요."

그러면서 도로 줄리엣에게 소울 스톤을 돌려주는 게 아닌가.

아니, 신전의 보물을 가로챘다며 화낼 땐 언제고?

"아, 그리고.”

길리엄 추기경이 돌아서려다 말고 멈칫했다.

“성하께 뱀 악령에 대해 알아봐달라고 부탁하셨다지요?"

“네. 그런데요?"

“……성하께서 제게 조사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조금 오래 걸렸지만, 마침 이렇게 직접 오셨으니 잘 됐군요.”

추기경은 주섬주섬 웬 종이 쪽지를 끄집어내 읽었다.

“뱀은 인간을 한 입에 삼킬 수 있을만큼 거대하다라고 하더군요.”

“...…그게 다예요?”

“답니다.”

길리엄 추기경은 무뚝뚝하게 종이를 내밀었다.

대충 어디서 뜯어낸 종이에 필사한 듯 휘갈겨 쓴 글씨가 빼곡했다.

“그럼 또 뵙지요."

추기경이 자리를 떠난 다음 줄리엣은 그 자리에 서서 받은 종이를 유심히 읽었다.

‘태초의 밤..'

세상 전체를 휘감고 자기 꼬리를 물고 있을만큼 거대한 뱀이 그려져 있었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위대하고 사악한 뱀은 가장 오래된 죄악이다.]

어디 성서에서 필사한 내용 같았다.

[뭐든 한입에 집어삼키며, 희생양의 능력과 외양을 흉내내곤 한다.]

“……일곱 가지 죄악이란 나태와 질투, 탐식과 정욕, 오만과 탐욕과 분노를 가르킵니다.”

줄리엣이 고개를 들자 어느새 몰려온 신도들에게 둘러싸인 길리엄 추기경이 강론을 펼치고 있었다.

신전을 빠져나온 줄리엣은 잠시 한가한 백양나무길을 기웃거리다가 조금 외진 티 하우스 앞에 마차를 세웠다.

최근 클로프 황자가 친 사고 내용을 수습하느라 황제와 고위 귀족들은 정신이 없는 듯 했다.

자초지종을 알 리 없는 황도 시민들이나 일반 귀족들은 마수들이 사라지자 행복해하며 신성한 사순절을 만끽하는 모양이었지만.

고급 상점가가 늘어선 백양나무 길은 한가했다.

모두들 대신전이나 광장으로 몰려간 거겠지.

덕분에 줄리엣은 방해받지 않고 티 테이블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광장에는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성녀님'의 구호 천막이 아직 있었다.

습관적으로 은 열쇠를 만지작거리던 줄리엣은 문득 손가방을 뒤적였다.

소울스톤에 정신이 팔려있어서 정작 법황에게 받은 손거울은 뭔지 추기경에게 묻지도 못 했던 것이다.

'이것도 뭔가 의미가 있는 물건 일까?'

(기적을 행하는 성녀라)

줄리엣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태연하다 못해 뻔뻔하게 줄리엣의 발치 아래에 커다란 검은 표범 한 마리가 엎드려 있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악령을 물끄러미 쳐다보 보던 줄리엣은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너는 왜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거지?”

(음? 무슨 소린가?)

"악령이면 그 검에 붙어있어야 하는 거 아냐?"

물론 줄리엣의 나비들도 열쇠에 종속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흑표는 정도가 심해도 너무 심했다. 누가 보면 그의 계약자가 칼라일 공이 아니라 줄리엣인 줄 알 정도로, 그건 내가 힘을 조금 더 얻었기 때문이지. 네 덕분에.

표범은 의미심장하게 씩 웃었다.

“힘을 더 얻으면 어떻게 되는데?"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지. 더 이상 아티팩트나 계약자에게 얽매이지 않아도 되고.)

신나게 떠들던 검은 표범은 갑자기 멈칫 하더니 의미심장하게 눈을 빛냈다.

(누구처럼 모습을 바꾸는 것도 가능해지지.)

“누구?”

(가령, 인간을 잡아먹고 그 가죽을 뒤집어 쓴다든지 말이야.)

줄리엣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저 얘기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 긴데.

“어?”

손거울을 만지작거리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던 줄리엣은 순간 멈칫했다.

(음? 왜 그래?)

“아니..….”

'방금 그건 뭐였지?' 아주 잠시 뿐이었지만 손거울에 비친 검은 표범은 온 몸이 빛나는 금빛 사슬에 칭칭 감겨있는 형상을 본 것 같았다.

그러나 줄리엣이 다시 확인하기도 전에 표범이 어떤 기척을 느낀 듯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아니나 다를까.

바퀴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웬 사륜마차 한 대가 티 하우스앞에 멈춰섰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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