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줄리엣이 오닉스를 안고 어르는데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마차 문이 열렸다.
“칼라일 공!”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홀에서 귀족 여럿이 누군가를 를쫓아 다급히 달려 나왔다. 그들을 아는 척도 않고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줄리엣이 기다리던 남자였다.
"어처구니가 없군.”
슬쩍 눈살을 찌푸린 레녹스는 조금 전 홀에서 했던 말을 반복했다. 사실 이 말은 클로프가 아니라 줄리엣에게 했던 말이었다.
“네게는 두 손 다 들었다.”
레녹스가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줄리엣은 태연히 물었다.
"2황자는요?”
“황제에 의해 우선 구금되겠지.”
줄리엣은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황자가 누구와 공모했는지 실토할까요?”
그러자 레녹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줄리엣이 뭘 묻는 것인지 눈치챘다. 얼마 전, 기네스 후작을 붙잡았을 때 후작은 깔끔하게 달리아에 대한 기억만을 잃어버리지 않았던가. 편리하게도.
황자 또한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다.
“어쩌면 클로프 황자도 이미 달리아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을지도 몰라요.”
“그 문제를 처리하는 데 황자의 증언은 필요 없어.”
하지만 레녹스는 가볍게 코웃음쳤다.
“그건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야.”
줄리엣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레녹스는 별다른 설명 없이 마차를 저택으로 돌려보냈다.
레녹스가 홀 안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클로프는 황궁 시종들의 손에 의해 구금실로 끌려가고 있었다.
“아, 아버지! 폐하! 모함입니다.
저는…!”
“시끄럽다! 저놈을 당장 가둬놔라!”
클로프는 끝까지 죄를 부인했지만 증거가 자명했다.
황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사과했다.
“… 미안하게 됐네, 칼라일 공작.”
구겨진 체면이 말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체면 따위를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이 일이 알려지면 필시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걸세.”
“그렇겠지요.”
“그러니까…….”
황제는 불편한 심기를 대놓고 드러내지도 못하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비딱한 태도가 몸에 익어 버린 레녹스는 느긋하게 시간을 끌었다.
줄리엣 덕분에 일이 뜻하지 않게 쉽게 풀렸지만, 그는 처음부터 클로프 황자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그것'의 숨을 끊어 놓는 것이었다.
“폐하.”
"왜, 왜 그러나?”
“들어주셔야 하는 조건이 몇 가지 있습니다.”
“조건이라니……?”
황제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 * *
마차가 공작저에 도착할 무렵, 오닉스는 크게 하품을 하더니 줄리엣의 무릎 위에서 몸을 말고 곤히 잠들었다.
줄리엣은 그런 새끼 용을 쓰다듬다가 문득 그녀의 나비들에 대해 떠올렸다.
나비들이 사라지고 난 다음부터 줄리엣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거나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다.
이전 삶의 기억을 반복해서 봤던 것은 모두 나비들의 영향이 분명했다.
(우리는 이 순간을 기다려왔어.
아주 오래.)
하지만 과거의 장면을 보여 주며 나비들은 분명 저렇게 말했다.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들기 위해서 과거의 기억을 보여 주거나 악몽을 꾸게 했다기보다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지만 어떤 제약에 걸려 있고, 그것 때문에 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녀의 기억이 왜곡되었다는 걸 알려 주기 위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봐야 해. 이거.)
나비들은 연신 눈치를 살피면서도 줄리엣에게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데에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뭐 때문에?'
줄리엣을 의아하게 하는 것은 하나 더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나?)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불쑥 목소리가 들려왔다.
줄리엣은 무덤덤하게 맞은편 자리로 시선을 옮겼다. 검은 표범이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점잖게 앉아 있었다.
“달리아 말이야.”
(아하.)
줄리엣은 익숙한 듯 검은 표범에게 말을 건넸다.
사실 검은 표범이 줄리엣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표범은 레녹스의 검에 붙어 사는 악령 주제에, 틈만 나면 그의 눈을 피해 줄리엣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래 봤자 레녹스가 나타나면 금방 모습을 감춰 버렸지만.
처음에는 꽤 신경 쓰였지만 최근에는 줄리엣도 개의치 않고 말을 건네곤 했다.
“왜 번거롭게 기네스 후작이나 클로프 황자를 이용하는 거지?”
줄리엣이 설핏 미간을 찡그렸다.
“내가 목적이라면 그냥 내 기억을 건드리는 게 훨씬 간단하지 않아?”
심지어 이전 삶에서의 달리아는 그렇게 했었다. 줄리엣의 기억을 왜곡해서 그녀의 오해를 부추기고, 줄리엣이 도망치도록 도왔으니까.
하지만 검은 표범은 느긋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대답할 수 없게 되어 있어. 그게 약속이야.)
"저 얘기는 나비들도 했던 것 같은데.”
(이크.)
그러나 줄리엣이 뭔가 더 캐묻기 전에 검은 표범은 놀라는 시능과 함께 모습을 감춰 버렸다.
그리고 마차에서 막 내렸을 때, 줄리엣은 뜻밖의 불청객과 맞닥뜨렸다.
“안녕, 줄리엣.”
“로이?”
줄리엣이 의외의 방문객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와중에도 레녹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로이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신전에서 심부름을 하러 온 것 뿐입니다.”
심부름?
"아.”
줄리엣은 로이의 손에 들린 작은 미색 종이 꾸러미를 보자마자 알아들었다.
법황의 심부름이었다. 줄리엣은 얼마 전 그녀에게 노란 뱀 악령에 대해 법황청의 자료를 살펴봐달라고 부탁했었다.
왜 법황의 심부름을 로이가 대신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줄리 엣은 로이를 저택 뒤쪽의 온실로 안내했다.
그러나 꾸러미 안에 든 것은 작은 손거울이 전부였다. 혹시나 해서 동그란 손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가장자리에 웬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꼼꼼히 읽어 본 줄리엣은 로이에게 물었다.
“이게 전부인가요?”
“네.”
거울에 적힌 글귀는 틀에 박힌 격언이었던 것이다.
[욕망을 가진 사람은 현혹되기 쉬우니, 경계할 것.]
글귀는 그게 전부였다. 그마저도 손거울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줄리엣은 조금 실망했다.
달리아에게 이용당한 2황자 클로프는 권력을 갈망했고 기네스후작 역시 탐욕스러운 인간이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줄리엣이 기대한 것은 좀 더 도움이 될 만한 무언가였다.
“법황께서 전하고자 하신 내용은 이게 전부인가요?"
“네.”
예컨대 노란 뱀의 정체나 약점혹은 뱀에게 물려 가도 죽지 않는 방법이라든지.
거울을 한쪽으로 치워 놓은 줄리엣은 로이가 다른 손에 검은 석판을 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건 뭐죠?”
“예언서입니다.”
예언서?
줄리엣의 눈이 흥미로 동그래졌다.
“법황께서 진위 여부를 감정해 달라고 로이를 부른 건가요?”
줄리엣이 관심을 보이자 로이가 빙그레 웃었다.
“네. 하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가짜니까요."
그 말에는 줄리엣도 멍해졌다.
“네?”
“가짜였습니다, 이 예언서.”
로이는 놀란 줄리엣의 얼굴을 보고 즐겁다는 듯 조금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줄리엣의 솔직한 반응이 신선한 모양이었다.
“누군지 몰라도 정교하게 만들었더군요. 신성력까지 넣어서."
줄리엣은 가짜라는 말에 오히려 고개를 반짝 들고 흥미를 보였다.
신전과 황실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유물이 실은 가짜였다니.
“뭐라고 써 있던가요?"
"'검은 날개를 드리운 채 재앙과 함께 왕이 온다..'라고 써 있습니다.”
"와.”
줄리엣은 뭐라 말할 수 없는 애매한 표정으로 감탄했다.
로이가 조금 멋쩍은 듯 괜히 헛기침했다.
“굳이 제국어로 해석하자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이거든요.”
“가짜라서 그런진 몰라도 굉장히…… 멋 부린 문장이네요.”
“예, 조악하네요.”
뭔가를 잠시 생각하던 줄리엣이 물었다.
“로이, 이게 가짜라는 건 로이 말고 또 누가 알고 있어요?”
“아직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당분간 저게 가짜라는 걸 말하지 않고 기다려 줄 수 있나요?”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어째서요?”
로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신전의 사제들이 조사하면 곧 그들도 저 예언서가 가짜라는 걸 알게 될 텐데요.”
“상관없어요. 며칠이면 돼요."
줄리엣은 어쩌면 써먹을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로이가 막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던 찰나, 줄리엣은 그들이 앉아 있던 온실 문가에 익숙한 그림자가 드리운 것을 눈치챘다.
“전하?"
줄리엣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궁에서 돌아온 듯 보타이를 풀어헤친 셔츠 차림의 칼라일 공작이 문가에 서 있었던 것이다.
“언제 오셨…….”
드르륵.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심장이 떨렸다.
하지만 최근 로이의 이름만 나와도 잔뜩 날을 세우던 레녹스를 떠올리면 줄리엣은 절로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하필 이럴 때.’
로이 또한 뒤따라 천천히 일어났다.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습니다.
지금 일어나려던 차였으니까요.”
로이는 어쩐지 여유롭게 웃었다.
정작 레녹스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줄리엣은 불편해지던 찰나였다.
“손님 배웅은 안 하나?”
“네?”
줄리엣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아…… 손님을 배웅하고 올게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줄리엣은 순간적으로 로이의 얼굴이 굳는 것을 보았다.
“.…그럼.”
물론 이내 태연한 미소로 고개를 까딱해 인사를 건넸지만.
온실을 나서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보던 레녹스가 입을 열었다.
"엘리엇.”
“예, 전하."
“공작성 남관 서재에 청혼서를 보관하던 것 기억하나?"
“아, 예. 기억납니다.”
공작의 수석 비서인 엘리엇은 은공작성 어디에 무슨 서류를 보관해 두었는지 훤했다.
그러고 보니 북부로 돌아가지 않은지도 벌써 석 달째 접어들고 있었다.
엘리엇은 당초보다 늦어진 북부로의 귀환 일정을 떠올리곤 눈을 흐릿하게 떴다.
북부의 공작성이 어떻게 생겼는지 가물가물할 지경이었다.
“그거 태우라고 전해."
"…예?”
잠시 감상에 젖어 있느라 엘리 엇은 반박자 늦게 반응했다.
“전부 태워 없애라고."
그렇게 지시하는 칼라일 공작의 시선은 유리 온실 밖, 멀리 보이는 줄리엣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흔적도 없이. 알겠나?"
그러나 느긋한 표정과는 달리 거듭 명하는 목소리는 서늘하다 못해 북풍한설 같았다.
* * *
한편, 2황자가 구금되었다는 소식은 금방 황후의 귀에 들어갔다.
“클로프는 폐하의 자식입니다!
어떻게 그런……!"
그러나 단단히 화가 난 황제는 절절매는 황후의 간청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황후는 한발 물러나야 했다.
“클로프가 잘못을 했더라도 소명의 기회는 주셔야지…….”
황후가 휘청거리자 그녀의 치료사인 엘리자베스는 재빨리 다가가 황후를 부축했다.
“너무 걱정 마시어요. 제가 2황자 전하를 살펴보고 오겠습니 다”
엘리자베스는 짐짓 다정한 표정으로 황후를 안심시켰다.
“그래, 너라면 구금실에도 드나들 수 있겠구나.”
그러나 잠시 후, 구금실에 도착한 엘리자베스는 아무 표정 없이 열쇠를 돌려 문을 열었다.
철컥.
“누, 누구냐!”
안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클로프는 흠칫했다가 엘리자베스를 알아보고는 다시 화색이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황후의 치료사이기 이전에 황자의 공모자였다.
마수들을 날뛰게 하는 연막탄 역시 따지고 보면 그녀가 사주한 것이 아니었던가?
“안녕하세요, 황자 전하. 황후 폐하의 명으로 왔어요.”
“그, 그래. 마침 잘 왔다. 이 모든 게 네가 꾸민 게 아니더냐.
내가 황제 폐하께는 잘 말씀드릴테니, 네가 꾸민 일이라 말씀드리고 나를 좀 풀어다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그를 풀어주는 대신 그 자리에 서서 2황자를 내려다보았다.
“뭐하는가? 어서 풀지 않고!"
“하나같이 멍청한 인간 놈들 같으니. 제대로 하는 게 없군.”
"뭐?"
클로프에게 이런 폭언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그러나 클로프가 뭐라고 따지기도 전에 그는 기절할 뻔했다. 그를 노려보는 엘리자베스가 뭔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의 용모가 서서히 변했다. 흰자위가 검게 물들었으며 그녀의 목소리는 철판을 긁는 듯 변했다.
“풀어 달라니. 분명 거래는 줄리엣 모나드를 유인하겠다는 조건이었을 텐데, 황자?"
“주, 준비는 제대로는 제대로 해 두었…….”
다급히 대답하던 클로프의 흐리 멍덩한 눈이 크게 뜨였다. 조금 전까지 보이던 금발의 여자와 평범한 구금실 배경은 온데간데없었고, 눈앞에 펼쳐진 것은 지옥의 광경이었다.
“대체, 그 인간 계집이 대체 무슨 수로 번번이 편히 죽을 기회에서 도망쳤을까? 더는 이것들의 힘을 빌리지도 못할 텐데."
중얼거리는 그녀는 더 이상 금발의 아름다운 시녀가 아니었다.
클로프는 그녀의 뒤로 노란 뱀머리를 한 남자의 형상을 발견했다.
"괴, 괴물…!”
클로프는 눈을 감지도 못하고목이 졸리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들리지 않을 만큼 가느다란 신음을 토하는 존재는 황외에 또 있었다.
(계약. 자. 위험…….)
엘리자베스의 발 아래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나비들이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고, 날개를 다친 것인지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뭐, 상관없어.”
다시 인간 여자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것은 히죽 웃는 시늉을 했다.
“나약한 것들은 넘쳐나니까.”
이제 그것의 목소리는 쉿쉿거리는, 뱀이 위협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리고 욕망에 눈이 먼 불완전한 것만큼 이용하기 쉬운 것도 없지.”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