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이건 라트렐 후작가의 문장이 아닌가?”
“예?”
황제의 바로 옆에 서 있던 라트렐 후작은 순간 눈이 튀어나올듯 놀랐다.
물고기 세 마리와 붓꽃.
틀림없는 라트렐 후작가의 문장이었다.
“그, 그런……!”
후작은 사색이 되었다.
왜? 어째서 우리 가문의 문장이 저기에 있지? 이 자리는 칼라일공작을 범인으로 몰기 위한 자리가 아니었던가?
그 순간 번개같이 후작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저 자식이!’
번쩍 고개를 쳐든 후작은 클로 프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2황자 클로프는 아직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멍청히 눈을 끔뻑였지만 라트렐 후작의 눈에는 가증스러울 뿐이었다.
라트렐 후작은 상황을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공포와 분노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은 후작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우리 가문도 함께 묻어 버릴 생각이었나!'
조작된 증거를 들이밀면서 칼라일 공작을 음해하는 데 협조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한 순간부터 클로프는 이미 신용을 잃은 상태였다.
그러나 졸지에 후작의 분노에 찬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클로 프는 억울했다.
'젠장,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갑자기 라트렐 후작이라니?
심지어 라트렐 후작은 그를 의심하는 눈치가 아닌가!
그러는 사이 다른 귀족들이 혼란스러운 듯 술렁이기 시작했다.
“방금 마수 사건은 공작가의 소행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라트렐 후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저 연막탄은 뭔데?”
“그럼 후작도 칼라일가와 손을 잡고 일을 꾸민 건가?"
“이게 대체 뭔가, 후작!”
믿을 수 없다는 듯 황제가 라트렐 후작을 다그쳤다.
“대답을 해 보게! 설마 자네도 공작의 공범…….”
"아닙니다, 폐하! 제가 어떻게 된 일인지 말씀을.…!"
쿠당탕탕.
라트렐 후작이 황제의 발치에 납죽 엎드리는 순간, 어쩐지 경쾌한 소음이 또 들려왔다.
이제는 낯이 익은 금속 구체들이 데굴데굴 굴러 왔던 것이다.
그것도 이번에는 무더기로.
“이건 대체....….”
홀 안의 사람들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그랬던 것처럼 금속구체에는 하나같이 어느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홀린 듯 금속 구체를 집어든 귀족들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벨린저 백작가의 문장 아닌가요?”
“그리고 저것은 폰드 자작가의 문장이고요.”
그들은 하나같이 2황자에게 우호적인 세력이거나 협박당해 그에게 동조하기로 한 가문들이었다.
이름이 불린 귀족들은 재빨리 상황을 파악했다. 조금 전 라트렐 후작이 했던 것과 정확히 같은 사고 흐름이었다.
'당했구나!'
클로프 황자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귀족들은 앞다투어 외쳤다.
“저희 가문은 범인이 아닙니다!”
“이, 이건 모함입니다!"
"억울합니다. 폐하!"
순식간에 홀 안은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호명된 귀족들이 앞다투어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이,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심드렁하게 팔짱을 끼고 있는 칼라일 공작하나뿐인 것 같았다.
“이건 무슨…….”
기막힌 표정으로 귀족들을 둘러보던 황제는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칼라일 공작을 발견했다.
악을 쓰는 귀족들과 넋이 나간 2황자, 태연한 칼라일 공작.
그들 중 누굴 믿어야 할 것인가는 자명했다.
“클로프!”
황제는 둘째 아들을 향해 돌아 섰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네가 설명을 해 보아라!”
"아, 아버지…….”
그러나 지금 상황이 누구보다 당혹스러운 것은 클로프였다.
분명 계획은 완벽했다.
칼라일 공작을 궁지로 몰아넣 넣고, 라트렐 후작이 거들고, 황제가 그에게 반역죄의 낙인을 찍기만 하면 끝나는 상황이었다.
갑자기 다른 가문들의 문장이 새겨진 연막탄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클로프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데, 대체 누구 짓인지 알 수 없었다.
황제가 클로프를 추궁했다.
“처음에 네가 들고 온 이 연막탄은 어디서 난 것이냐?”
연막탄이 어디서 난 것이냐고?
그렇다. 클로프는 퍼뜩 자신감을 되찾았다.
“.……북부를 조사하던 중에 발견한 것입니다!”
그는 돌발 상황에 대비해서 함께 일을 꾸민 측근들과 입을 맞춰 놓았다.
어차피 조작된 증거로 시작한 여론전이 아니었던가.
이 상황을 모면하고 다시 여론을 장악하기만 하면 아직 승산이 있었다.
“예, 그렇습니다. 저와 함께 증거를 발견한 믿을 만한 증인도 있습니다! 벨린저 백작과 폰드자작이 증언을 ……."
거짓 증언을 해 줄 동료들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클로프의 얼굴은 단 몇 초 만에 다시 새하얘졌다.
그의 주장을 뒷받침해 줘야 할 측근들은 이미 바닥에 납죽 엎어져서 결백하다며 외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들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연막탄들이 황제의 발치에서 굴러다녔다.
"벨린저 백작이 될 어쨌다는 거냐?”
“그, 그게….”
“제가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폐하!”
갑자기 잠자코 있던 라트렐 후작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실은 클로프 황자가 한 시간 전에 저를 찾아왔었습니다. 아무 래도 제가 뜻대로 움직일 것 같지 않으니 협박을..….”
“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외숙부님!”
클로프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저것은 제가 꾸민 짓이 아닙니다! 제가 숙부님을 모함할 이유가 없잖습니까!”
“저것은 아니다?”
나직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줄곧 태연자약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칼라일 공작이었다.
“그럼 '이것'은 황자가 꾸민 짓이라는 뜻으로 들리는데. 그렇습니까?”
공작은 어느새 칼라일 공가의 문장이 새겨진 금속 구체를 들고 있었다.
그의 음성은 느긋했지만 속에 칼을 품은 듯 섬짓했다.
“아, 아니, 공작, 그렇게 말을 곡해하면 곤란합니다!”
클로프는 필사적으로 부인했지만 구경하던 사람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하긴, 황자 전하는 칼라일 공과 사이가 나빴지요.”
“그리고 증거라곤 2황자가 가져온 구체가 전부잖습니까.”
“게다가 이렇게 된 이상 저것을 과연 증거라고 볼 수 있을지 '망했다.'
클로프는 완전히 절망했다. 상 상황은 그가 가장 바라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계획이 들통난 거야!'
느긋한 태도의 칼라일 공작은 이 함정에 대해 미리 알고있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떻게? 철저하게 준비했는데, 대체 누가 그를 방해할 수 있었단 말인가?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던 클로프는 어떤 여자를 발견했다.
줄리엣 모나드였다.
벽 쪽의 좌석에 기대앉아 있던 은사와 함께 반쯤 땋은 머리를 한쪽으로 가지런히 늘어뜨리고 하늘하늘한 재질의 은회색 드레스를 입은 줄리엣은 몽환적으로 아름다웠다.
발목을 까딱거리던 줄리엣은 의미심장하게 생긋 웃더니 손에 들고 있던 붉고 동그란 사과를 베어 무는 시늉을 했다.
'사과?'
극한에 몰려있던 클로프는 그를 도발하는 듯한 동작에 벼락같이 직감했다.
저 여자가 꾸민 짓이다!
줄리엣 모나드가 사악한 사술을 쓴다는 것은 알음알음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칼라일 공의 연인이었다.
“저, 저 간악한 것……!"
순간 욕설과 함께 2황자 클로프가 곁에 서 있던 호위병의 허리 춤에서 검을 빼 들었다.
칼을 든 황자가 막무가내로 줄리엣이 앉아 있는 방향으로 달려 들자 군중 틈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악!”
“폐하! 다 저 여자의 계책입니다!”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클로프의 앞을 경비병들이 가로막았다.
"황자님, 검을 놓으십시오!”
"비켜라! 저 여자는 반역 죄인이야! 나는 폐하의 아들, 황자란 말이다!”
경비병들은 클로프가 휘두르는 형편없는 검을 피하며 황자인 그를 제압하기 전에 허락을 구하듯 황제를 돌아보았다.
캉!
“아악!”
그러나 황제가 명을 내리기도 전에 어디선가 날아온 잔이 정확히 클로프의 손을 가격했고, 검을 떨어뜨린 클로프는 비틀거리다 누군가에게 걷어차여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황자를 쓰러뜨린 누군가는 감히 황족의 머리를 짓밟았다.
“이익! 놔, 놔라! 이 건방진......!"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군.”
머리를 바닥에 댄 채 버둥거리던 클로프는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싸늘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굳이 고개를 들지 않아도 나직한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뭘 하자는 거지?"
“여, 여보게 칼라일! 일단 진정하고 검을…….”
황제가 달려와 칼라일 공작을 아들에게서 떨어뜨려 놓았다.
그 틈을 타서 경비원들이 클로 프를 포박했고, 황자는 횡설수설변명을 주워섬겼다.
“하지만 아버지, 저 계집이 사과를 들고 있답니다! 사과가......!"
철썩!
황제가 참다못해 분통을 터뜨리더니 아들의 뺨을 내리쳤다.
“이 못난 놈아! 사과가 대체 뭐가 어쨌단 게냐!”
그 광경을 흡족하게 지켜보던 줄리엣은 어깨를 으쓱했다.
중앙에 서 있던 레녹스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그녀를 향해 눈짓했던 것이다.
괜히 휘말리지 말고 마차로 돌아가라는 거겠지.
줄리엣은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다음 슬쩍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용건은 잘 끝나셨습니까?"
“무척 시끄럽던데요."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공작가 기사들이 그녀를 맞아 주었다.
“그럭저럭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줄리엣이 태연히 대답하자 기사 한 명이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런데 안 알려 주실 겁니까?"
"무엇을요?”
"어떻게 하신 겁니까?"
기사단 막내인 주드가 따라 들어오면서 물었다.
줄리엣이 빙그레 웃었다.
“주드 경도 알잖아요? 황자의 처소에서 조작된 증거를 빼내서 똑같이 복제했어요."
황자가 꾸민 계략은 조작된 증거로 공작가을 특정해 범인으로 몰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특정성을 망가뜨리면 되는 일이었다.
“무척 범인을 잡고 싶은 것 같길래 범인 후보를 많이 만들어드렸답니다.”
줄리엣은 황자가 준비한 증거와 똑같이, 2황자 편에 붙은 모든 가문의 문장을 연막탄에새겨 넣었다.
황자가 흔한 모양의 연막탄을 골랐기에 일은 더욱 쉬웠다.
그렇게 범인을 지목하고 싶다면 다들 범인이 되어 보라지.
게다가 저희들끼리 의심하고 2황자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해 서로 싸우는 것은 덤이었다.
하지만 주드는 여전히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블루엣 궁에는 어떻게 들어가 신 겁니까?”
공작가의 기사들은 계획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고 있었지만, 누가 황자의 처소에 몰래 숨어드는지는 알지 못했다.
게다가 고도가 높고 경비가 삼엄하다고 소문난 2황자의 처소가 아닌가.
“혹시 하딘 경에게 시키셨습니까?”
아무래도 주드는 누군지 모를 기사단의 실력자에게 경쟁심을 불태우는 모양이었다.
"아니에요.”
“그럼 누군데요?"
"글쎄요.”
생글거리던 줄리엣은 옆자리에서 수상하게 들썩거리던 담요를 걷었다. 담요 아래 얌전히 숨어 있던 닉스가 좋다고 고개를 쳐들었다.
“삐약!”
“착하지, 닉스.”
줄리엣이 가져온 사과를 내밀자 새끼 용은 행복하게 아삭거렸다.
아기 용이 사과에 열중하는 사이, 줄리엣은 자동으로 파닥거리는 한 쌍의 날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덕분에 수월했지.'
새끼 용은 정확하게 뭘 하는지 이해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닉스가 없었더라면 계획을 실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공작가 기사들이 아무리 뛰어나도 날아다니진 못하니까.
줄리엣은 반쯤 접힌 작은 날개를 살살 쓰다듬었다.
매끈한 유선형의 몸체. 오닉스의 작은 몸집은 경비가 삼엄한 황자궁에 숨어들어 증거물을 빼돌리는 데 제격이었다.
오닉스는 처음 몇 번은 헤맸지만 연막탄과 같은 크기의 사과로 훈련시키자 금방 알아듣고 줄리 엣의 의도대로 따라 주었다.
조금 전 홀에서 미리 복제해 둔 연막탄들을 제때에 데굴데굴 등장시킨 것 역시 폭이 좁은 연회장 창문을 통해 몰래 숨어든 오닉스가 한 일이었다.
“똑똑하네, 닉스.”
“!”
줄리엣이 안아 들자 오닉스가 기분 좋게 갸르릉거렸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