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줄리엣은 그제야 자신의 연인 못지않게 그녀 역시 감정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어색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까 네 말은 네가 그 여자들 때문에 화내지 않았으니, 네가 그 늑대랑 놀아나도 화내지 말라는 얘기잖아?"
“..…놀아난 적 없어요.”
어쩐지 말려든 것 같지만 줄리 엣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네?”
줄리엣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레녹스가 재차 말했다.
“놀아난 적도 없는데 그렇게 말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지.”
심지어 그는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왜 기분이 좋아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면 네 약속은 아직 유효한 거지?”
마치 구슬리듯 다정한 목소리였다.
“무슨 약속이요?”
“옆에 있겠다고 약속했잖아."
레녹스가 답지 않게 집요하게 굴었다.
“...…맞아요. 저는 전하 옆에 있을 거예요.”
줄리엣은 그의 유려한 눈매가 가늘어지는 것을 보며 덧붙였다.
“전하가 지금처럼 유치하게 굴지만 않으시면요."
왠지 처음 의도와는 달리 말려든 것 같았지만, 어쨌든 줄리엣은 역지사지의 의도가 조금 전달됐을 거라고 믿기로 했다.
줄리엣이 몸을 일으키려던 그때였다.
부스럭.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두 사람은 일부러 활짝 열어 두었던 창밖에서 들려오는 기척을 놓치지 않았다.
줄리엣은 자연스럽게 창가로 향했다.
"삐약!”
어디선가 가냘픈 새 울음소리 비슷한 것과 함께, 익숙한 뭔가가 수풀에서 쏙 고개를 내밀었다.
* * *
수도는 점차 안정을 되찾아 갔다. 미친 듯 날뛰던 마수들이 말끔하게 자취를 감춘 것이다!
더 이상의 마수 소동은 없었다.
귀족들은 안도했고 황제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서 미뤄 두었던 사순절 제례를 치르기로 했다.
성대한 규모는 아니지만 대신전에는 법황의 축원을 받기 위해 초대된 귀족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대신전 입구가 마차들로 붐비는 와중, 신전의 한쪽에서는 밀회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외숙부님.”
"아, 황자 전하."
나타난 것은 2황자 클로프였다.
초조한 기색으로 2황자를 기다리던 초로의 사내의 이름은 라트렐 후작이었다.
라트렐 후작은 황후의 남동생이었으므로, 2황자 클로프에게는 외삼촌이 되었다.
그는 황제의 처남이자 신임받는 친구이기도 했다.
"어쩐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후작은 조심스레 물었다.
외숙부와 조카 간이지만 라트렐후작은 욕심이 많은 조카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미리 상의드릴 게 있어서 불렀습니다.”
클로프는 어쩐지 거들먹거리는 표정으로 답했다.
“제가 황제 폐하의 명으로 지난 번 마수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것은 알고 계시지요?"
"예, 물론입니다.”
2황자는 의미심장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제 수하들이 얼마 전 사건을 일으킨 범인을 알아냈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예, 결정적인 증거도 있습니다.”
클로프는 보란 듯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아니, 이건…….”
라트렐 후작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2황자가 내민 것은 연막탄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새겨진 것은 아주 유명한 가문의 문장이었다.
‘그럼 칼라일 공작이 범인이라고?’
잠시 멍해 있었던 라트렐 후작은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금방 눈치챘다.
“...… 실례지만, 이걸 어디서 입수하셨는지요?”
그러자 불쾌하다는 듯 클로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외숙부님?”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황자 전하를 의심하겠습니까?”
라트렐 후작은 재빨리 부정했다.
‘하지만 믿을 수가 있어야지..'
2황자의 외삼촌인 라트렐 후작은 황실 사정에 능통했다.
그는 둘째 외조카인 클로프 황자가 얼마나 야심만만한지 그리고 또 얼마나 칼라일 공작을 미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클로프 황자가 어쩐지 마수 사건의 조사를 맡겠다고 자처하더라니. 이런 속셈이었던 것이다.
중앙 정치에 익숙한 라트렐 후작은 처음부터 클로프가 꾸민 일임을 직감했다.
“출처에 대해서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클로프가 자신하자 라트렐 후작은 눈치챘다.
아무리 황자가 칼라일 공작을 미워한다 한들, 제대로 된 준비없이 덤볐을 리 없다.
“그러니 제가 이야기를 꺼내면 외숙께서 지지해 주십시오. 아시겠습니까?”
이미 촘촘히 거미줄을 쳐 놓았으니 자신을 거들라는 협박이었다.
황제의 친구인 라트웰 후작이 클로프와 입을 맞춰 둔다면 칼라일 공작은 위험해질 터였다.
“...…예, 알겠습니다."
라트렐 후작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칼라일 공작에게 유감은 없지만 여기서 황자의 협박을 무시하면 공격당하는 것은 후작 자신이 될 수도 있었다.
“좋습니다, 외숙. 그럼 가실까요?”
그 대답에 만족했다는 듯 2황자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2황자를 따라서 홀 입구에 도착했을 때, 라트렐 후작은 막 마차에서 내리는 한 쌍의 연인과 맞닥뜨렸다.
“칼라일 공작 드십니다!”
칼라일 공작은 후작을 보고 눈인사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의 동행인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후작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녀는 은회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줄리엣 모나드였다.
줄리엣의 색소 옅은 연갈색 머리칼은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은빛으로 반짝였다.
쳐다보던 줄리엣은 간발의 차로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후작을 먼저 홀 안으로 들어가 버린 2황자 클로프의 뒷모습을 힐끔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알겠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좋은 저녁이네요, 후작님."
“그, 그렇군요, 모나드 백작.”
평소 친분이 없는 사이임에도 모나드 백작이 서글서글하게 말을 걸자 후작은 조금 당황했다.
“그럼.”
나비 같은 걸음걸이로 사뿐사뿐 걸어가는 그녀를 바라보던 후작은 조금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줄리엣 모나드는 장갑도 끼지 않은 오른손에 얼핏 작은 공처럼 보이는 빨간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사과?’
그러나 라트렐 후작이 좀 더 자세히 보기 전에 줄리엣은 공작의 손에 이끌려 홀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런…….”
라트렐 후작은 솔직히 칼라일공작가를 적으로 돌리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후작가는 오랜 세월 어느 사안 이는 적당히 중립을 지키면서 지금껏 살아남은 가문이었다.
하지만 도리가 없었다.
“어흠!”
주변의 몇몇 나이 지긋한 대귀족들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보고 라트렐 후작은 직감했다.
2황자로부터 같은 내용의 협박을 받은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칼라일 공작가를 무너뜨리려고 2황자가 이런 짓까지 하는데, 가담하지 않으면 다음은 우리 가문일 수도 있지 않은가?'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일단은 2황자가 준비한 연극에 호응하는 수밖에.
후작이 황자와 가까운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와 법황이 차례로 입장했다.
의례적인 인사말 다음에는 연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처럼 화려한 자리가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요."
“저는 오늘 꼭 법황 성하의 축성을 받을 거랍니다.”
오랜만의 행사에 들뜬 대부분의 귀족들은 곧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럼 연회를 개회…….’
"황제 폐하!”
그러나 연설을 마친 황제가 연회의 시작을 알리려던 찰나, 갑자기 2황자 클로프가 끼어들었다.
“……무슨 일이냐, 클로프?”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방해받은 황제는 언짢은 기색이었지만 2황자가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자리를 박차고 중앙으로 걸어 나오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흠, 해 보아라.”
“지고하고 지엄하신 폐하의 명을 받들어 소자는 범인을 밝히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을…….”
황제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어 클로프의 말을 끊었다.
“그래, 네 노고는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덕분에 저와 제 수하들이 드디어 사건을 주모한 범인을 밝혀냈습니다.”
범인이라고?
어리둥절해하던 귀족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자리에서 그 간악한 배후를 고발하고자 합니다.”
“아니, 그럼 이 자리에 범인이 있단 말이오?”
귀족들은 물론이고 조용히 앉아 있던 법황과 사제들의 얼굴에도 흥미로운 기색이 떠올랐다.
"그게 정말이냐?”
“이걸 보십시오, 폐하!"
2황자 클로프가 다분히 연극적인 투로 손짓하자 시종들이 뒤에서 뭔가를 가져왔다.
화려한 상자 안에서 그가 끄집어낸 것은 반짝반짝한 금속 구체였다.
“이것이 바로 제가 어렵게 손에 넣은 증거물입니다!”
클로프는 완전히 도취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게 뭔지를 를파악하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저게 뭡니까?”
“연막탄 같은데……. 가만, 뭔가 문장 같은 게 그려져 있군요?"
“저 문장은 칼라일 공작가의 것이 아닙니까?”
“그..."
“그, 그렇다면…..”
웅성거림은 점차 커졌다.
"그렇습니다, 폐하! 이것은 공작가의 문장! 북부가 마수들을 미치게 하는 사악한 무기를 개발했다는 증거입니다!"
완전히 자신감을 얻은 클로프가 공작 쪽을 마구 삿대질했다.
“이보다 분명한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칼라일 공작이 제국을 도탄에 빠뜨린 사건의 배후입니다!”
맙소사.
홀 내부의 사람들은 경악과 공포에 사로잡혔다.
“저 말이 사실인가, 공작?”
그러나 정작 지목된 칼라일 공작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대신전의 홀을 가득 메운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는 상황인데도.
그는 심지어 조금 권태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글쎄요. 처음 듣는 이야깁니다.”
적극적으로 해명하려 들지 않는 공작의 미지근한 태도가 사람들의 의심을 부추겼다.
귀족들은 본격적으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공작가의 피해가 현저히 적다고 들었는데…….”
“정말 북부의 소행이 아닐는지 의심스럽군요.”
“게다가 저 증거를 보세요! 틀림없는 공작의 문장이잖습니까!"
황제는 굳은 얼굴로 단상 아래로 내려와서는 직접 증거물을 받아 들고 면밀히 살폈다.
흰 까마귀와 검은 표범이 이를 드러내고 있는 문장. 틀림없는 공작가의 문장이었다.
“칼라일 공!”
황제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공작을 잠시 노려보던 황제는 바로 옆에 있던 라트렐 후작에게 금속 구체를 넘겼다.
“라트렐 후작, 자네 생각도 그러한가?”
“어떻습니까, 후작께서 보시기 에는요?"
“저는……."
기다렸다는 듯 2황자까지 물어 오자 라트렐 후작은 침음을 삼켰다.
라트렐 후작을 포섭하려 했던 2황자의 판단은 옳았다.
황제는 처남이자 친구인 후작을 신임했다.
지금 여기서 후작이 고개를 끄덕인다면 칼라일 공작은 지난 몇 주간 제국을 위험에 빠뜨린 죄를 고스란히 뒤집어쓰게 될 터였다.
그러나 칼라일 공작은 이런 절 체절명의 순간에도 평소 같은 무표정이었다.
선득한 그의 붉은 눈을 보고 라트렐 후작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칼라일공작이 이 상황을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정말로 칼라일 공작이 이 사건의 배후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은 것이다.
결국 라트렐 후작은 눈을 질끈 감고 미리 입을 맞춰 둔 대로 2황자에게 힘을 실어 주기로 했다.
“예, 제가 보기에도 틀림없이 칼라일 공작가의 물건으로 보입…."
그때였다.
탕!
금속성의 물체가 바닥을 경쾌하게 때리는 소리가 홀 안에 울려 퍼졌다.
숨죽이고 라트렐 후작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지?”
데구루루.
붉은 주단 위를 굴러 온 물체는 공교롭게도 홀 중앙에 선 황제의 발치에 툭 멈춰 섰다.
“음?”
황제는 무심코 금속 구체를 주워 들었다.
조금 전 증거물로 2황자 클로프가 내밀었던 것과 정확히 같은 모양의 구체였다. 심지어 어떤 문장이 새겨져 있는 것까지 똑같았다.
또 다른 증거물인가?
그런데 그 문장을 확인한 황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건……!”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