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162화 (159/229)

162화.

“무슨 소리죠?”

“.....… 글쎄요?"

밀란 경과 함께 밖으로 나온 줄리엣은 온실 쪽에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이쿠, 요 녀석아!”

“삐약!”

엘리엇이 까만 새끼 용의 목덜미를 붙잡은 채 서 있었다.

높이 쌓아 둔 과일 바구니가 엎어져 있었고 하인들이 텅 빈 바구니와 잔해들을 치우고 있었다.

“누가 보면 널 굶기는 줄 알겠다!”

엘리엇이 투덜거렸다.

아기 용은 귀한 열대과일을 잔뜩 먹어치운 듯 배가 볼록해져서는 분홍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수석 비서님.”

“부, 분명 지시하신 대로 문을 제대로 잠가 두었는데…….”

하인들 역시 기막히다는 표정이었다.

먹성 좋은 새끼 용은 뭐든 잘먹었지만 달콤한 과일에는 특히 사족을 못 썼다.

공작의 비서인 엘리엇이 꾸짖는데도 한바탕 사고를 친 오닉스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삐약.”

엘리엇이 안아 들자 오닉스는 그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는지 힘을 빼고 몸을 축 늘어뜨렸다.

앞뒤 상황을 파악한 줄리엣은 한숨을 내쉰 다음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 줄리엣 양.

엘리엇이 그녀에게 막 검거한 새끼 용을 넘겨주었다.

“빡?”

오닉스는 좋다고 꼬리를 살랑거리면서도 슬쩍 줄리엣의 눈치를 살폈다.

“미안해요, 엘리엇. 피해 금액은 제가 보상할게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입맛이 고급인 녀석이군요.

한두 번 있던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하인들은 능숙하게 사고 현장을 수습했다.

“하지만 이상하군요.”

엘리엇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번엔 틀림없이 문단속을 했는데 말입니다.”

줄리엣의 옆에 서 있던 밀란 경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문 위쪽을 가리켰다.

“아마 저 위로 들어온 게 아닐까요?”

그가 가리킨 것은 문과 천장 사이의 좁은 틈이었다.

“천장이요?”

줄리엣이 미심쩍다는 듯 되묻자 다른 사람들도 의아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발에 빨판 있는 거 아닙니까?”

수상하다는 듯 오닉스의 앞발을 뒤집어 보았지만 아기 용의 발바닥은 말랑말랑하기만 했다.

줄리엣은 오닉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평소에도 새끼 용이 요란하게 말썽을 부리긴 했지만 최근에는 부쩍 빈도가 높아졌다.

단순히 몸집이 자라서는 아닌 것 같고 뭔가 달라진 게 있는 것 같은데.

“?”

그리고 괜히 딴청을 부리는 새끼 용의 표정도 어딘가 수상했다.

"삑.”

침묵이 길어지자 닉스는 줄리엣에게 혼이 날 거라고 생각했는지 눈치를 보다가 애교스럽게 몸을 치댔다.

잠시 생각하던 줄리엣은 오닉스를 조심스레 고쳐 안았다.

“밀란 경.”

"예, 아가씨.”

줄리엣은 의미심장하게 그러나 진지하게 눈을 반짝였다.

“아까 그 계획이요, 다시 들어 볼 수 있을까요?"

* * *

며칠 뒤, 황궁.

2황자 클로프의 집무실에서는 은밀한 모의가 진행 중이었다.

"준비는 다 마쳤습니다.”

황제가 그 범인을 잡아들이라고 성화인 탓에, 클로프는 슬슬 마무리 단계를 준비 중이었다.

마수들을 날뛰게 하는 연막탄을 뿌리는 횟수를 줄이고, 황제에게는 결정적인 증거를 잡았노라고 은밀히 말을 흘려놓은 상태였다.

“이제 준비한 증거물을 언제 공개할 것인지만 결정하면 됩니다.”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연막탄이 공개되면 북부는 온 제국을적으로 돌리게 되겠지요.”

“며칠 뒤 있을 어전 회의가 어떻겠습니까?”

“그보다는 법황도 참석하는 공식 석상이 어떨까요?"

황자의 참모진들은 신이 나서 의견을 내놓았다.

"저…… 황자님, 그 치료사를 너무 믿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물론 황자의 측근 중에는 엘리자베스 틸먼을 수상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마수 사건을 일으키도록 도움을 주었으면서, 한편으로는 마수 때문에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며 명성을 얻고 있으니 이용당하는 것은 아닐지 의심할 만했다.

“시끄럽다!”

하지만 이미 엘리자베스의 계획을 따라 칼라일 공작을 무너뜨릴 기회를 잡은 클로프에게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 치료사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공작을 무너뜨린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

클로프는 칼라일 공작만 제거하고 나면 황위는 물론이고 위태로운 황실의 권위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황자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이제 며칠 뒤면 공작가도 좋은 시절은 끝이지요."

"드디어 북부를 손에 넣으시겠군요!”

2황자의 측근들은 재빨리 그의 비위를 맞췄다.

클로프는 배후로 지목되었을 때에 칼라일 공작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돼서 잠이 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필시 볼 만하겠지!"

2황자 클로프가 히죽거리는데 보좌관이 다시 소식을 전했다.

“마침 칼라일 공이 입국해 있으니, 가서 한번 만나 보시는 게 어떨까요?”

“뭐?”

“칼라일 공작도 오늘 저녁 만찬에 참석합니다. 기억하고 계시지요?”

순간 공작의 이름에 움찔했던 2황자는 이내 혀를 찼다.

"아…… 그 모나드 계집의 일때문이군.”

며칠 전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고 때문에 모나드 백작의 안부를 걱정한 황제가 저녁 만찬을 열었다고 들었다.

‘공작의 정부 따위가 다칠 뻔한 일이 뭐가 대수라고.'

내키지는 않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칼라일 공작의 낯짝을 봐두는 것은 나쁘지 않을 듯했다.

클로프는 외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2황자 전하 드십니다!”

오늘 저녁 만찬에 초대된 귀족들은 모두 외궁의 살롱에 모여있었다.

칼라일 공작 외에도 몇몇 궁정귀족들이 만찬에 초대되었고, 그들은 기둥들로 공간이 구분된 넓은 살롱에 저마다 자리를 잡고 앉아 만찬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하, 강녕하셨는지요.”

클로프를 알아본 귀족들이 앞다 투어 인사를 건넸다. 그 틈에는 우아하게 머리를 틀어 올리고 진녹색 드레스를 입은 모나드 백작도 있었다.

“클로프 전하.”

클로프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고작 몰락 귀족 주제에.'

줄리엣 모나드 역시 건방지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양녀로 삼아 주겠다는 황제의 제안을 감히 거절하지 않았던가.

그것도 죽은 모나드 백작 부부 외의 부모는 필요 없다는 핑계로.

클로프는 빠득 이를 갈았다.

건방진 줄리엣 모나드의 옆에서 있는 레녹스 칼라일도 여느때와 같이 재수 없이 반반한 낯짝이었다. 평소보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긴 했지만.

'흥.’

클로프는 속으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과연 모든 것이 끝난 후에도 저들이 저런 태도를 유지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한편 줄리엣은 자신을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을 마주하고 있는 상태였다.

"호수에 뛰어들었다죠?”

“이번에도 시선을 끌려는 수작일 게 뻔한데.”

“파티마 황자비 전하만 가엾지요.”

평소에도 그들에게 호의적인 귀족은 드물었지만, 클로프에게 포섭된 귀족들도 다수 눈에 띄었다.

금세 레녹스의 눈매가 사나워졌지만 줄리엣은 일부러 사람들이 떠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전하.”

줄리엣은 보란 듯이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내키지 않으셔도 잠시만 참아 주세요.”

레녹스의 타이를 고쳐 매 주는 척하며 줄리엣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미끼는 화려해야 하니까요.”

연회 때문에 외궁을 드나드는 손님이 많아 내궁은 상대적으로 경비가 허술한 상태였다.

밀란 경은 그 점을 이용하자고 했다. 따라서 줄리엣과 레녹스는 최대한 귀족들의 시선을 붙잡고 시간을 벌어 주어야 했다.

줄리엣은 미리 파티마에게도 만찬장에 입장하기 전에 최대한 시간을 끌어 달라고 부탁해 둔 상태였다.

그들이 시간을 꼬는 사이 호위명목으로 함께 황궁에 들어온 공작가의 수하들은 맡은 바 일을 수행할 터였다.

마지못해 그 계획에 협조하던 레녹스가 줄리엣의 어깨 너머를 힐끔거리고는 중얼거렸다.

“.....… 내키지 않을 리가.”

"......?"

무슨 소린가 싶어서 뒤돌아선 줄리엣은 먼발치에서 낯익은 남자를 발견했다.

로이 역시 저녁 만찬에 초대된 귀빈 중 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줄곧 무표정이던 로이는 줄리엣과 눈이 마주치자 온화하게 웃어주었다. 그러나 이내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자리를 떴다.

아마 만찬장에서도 얘기를 나눌기회는 없겠지.

'그러고 보니 로이는 예언서 때문에 초청되었다고 했는데.'

그 예언서란 거 내용이…….

“줄리엣.”

“네?”

잠시 정신이 팔려 있던 줄리엣은 부지불식간에 균형을 잃고 카우치에 앉아 있던 레녹스의 무릎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어머나…….”

노골적으로 그들을 염탐하던 주변의 황궁 시녀들이 무심코 얼굴을 붉히고 재빨리 자리를 비켜 줄 만큼 친밀한 자세였다.

“시, 실례했습니다!”

그러나 친밀한 자세와는 달리 그들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그의 무릎 위에 아무렇게나 걸 터앉은 줄리엣은 이렇게 근접한 거리에서 그를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또 저런 표정.'

기웃거리는 사람들을 쫓아버리기 위해 줄리엣을 끌어당긴 것은 그였으면서, 레녹스는 정작 줄리 엣이 조금 움직이자 눈에 띄게 움찔했다.

최근의 레녹스는 부쩍 이상했다.

그는 줄리엣과 손이 닿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했다.

이따금씩 시선이 느껴져서 돌아보면 레녹스는 그녀에게 뭔가 할말이 있는 것처럼 애틋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눈이 마주쳐도 줄리엣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간혹 가다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드러낼 때뿐이었다. 조금 전 로이와 마주쳤을 때처럼.

줄리엣은 차라리 전처럼 레녹스가 제멋대로 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윽박지르는 것도 아니고, 심통 난 어린애처럼.

줄리엣이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자 그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전하."

"왜.”

줄리엣은 싱긋 웃더니 그의 옷깃을 확 끌어당겼다.

충분히 뿌리칠 수 있었겠지만 레녹스는 어이 없단 표정으로 순순히 그녀에게 멱살을 잡혀 주었다.

“지금 뭐하자는…….”

“어리광 부리지 마세요.”

"......,"

순간 칼라일 공작의 단정한 얼굴에 아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어리광?”

“저는 전하가 마음대로 놀아나셔도 한 번도 화내거나 따진 적없어요.”

“…누가 놀아났다는 거야?"

그가 기막히다는 듯 항의했다.

줄리엣은 어깨를 으쓱했다.

"다들 보고 들은 게 있잖아요.”

“젠장. 그게 전부 오해라고 몇 번을-”

“하루가 멀다고 들어오던 청혼서는요?"

“그걸 보기 좋게 정리해서 건네준 게 누군데?”

울컥한 듯 레녹스가 따져 묻자 줄리엣의 눈이 동그래졌다.

확실히 몇 년 전 줄리엣은 그의 앞으로 들어온 청혼서를 찬찬히 뜯어본 적 있었다. 하지만 레녹스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과거의 일을 잠시 곱씹었을 뿐인데 줄리엣의 표정을 뭐라고 해석했는지 그가 다급히 덧붙였다.

“제대로 거절했어, 전부.”

“그럼 프리실라 공녀는요?”

줄리엣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말로는 거절했다지만 영 신용이 가질 않았다. 황제의 조카딸로 유명한 프리실라의 경우 다른 상대와 약혼하기 직전까지 줄기차게 혼담을 넣지 않았던가?

그러나 레녹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게 누군데?”

“마락스 공가의 딸이요. 황제의 조카인…….”

“아.”

레녹스는 그제야 누군지 알겠다.

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자기한테 몇 번이고 청혼한 여자의 이름을 몰랐던 건 아니겠지.

줄리엣은 미심쩍은 시선으로 그를 보았지만 레녹스는 왠지 묘한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놀아났다는 게 청혼서니 소문이니 그딴 걸 말하는 건가?”

줄리엣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그딴 거는 아니죠.”

그런데 레녹스는 더 이상한 질문을 했다.

“그 청혼서가 너한테는 그 늑대 새끼랑 같은 건가?"

“네?”

“내 말은, 그게 널 화나게 했느냐고 묻는 거야.”

칼라일 공작 특유의 거친 화법에 익숙한 줄리엣은 그제야 어렴풋이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들었다.

“너도 그러니까…… 그딴 하찮은 것들 때문에 화가 났냐고."

"당연히 화가 나죠.”

누구든 그렇지 않을까?

그러나 무심코 대답했던 줄리엣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조금 놀랐다.

“그렇군.”

레녹스가 본 적 없는 표정으로 진지하게 눈을 빛내고 있었던 것이다.

생전 처음 서툴게 감정을 배우는 어린애처럼.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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