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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161화 (158/229)

161화.

* * *

이른 아침.

온몸이 까맣고 앙증맞은 생물체 하나가 타박타박 저택의 수풀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아침부터 배를 잔뜩 채운 오닉스는 기분이 퍽 좋았다.

이슬 맺힌 수풀을 사박사박 걷는 것도, 먹을 게 잔뜩 널려 있는 공작저도 마음에 들었다.

모나드 백작저에 비하면 공작가의 수도 저택은 광활했다.

아기 용은 입에는 분홍색 커다란 꽃 한 송이를 물고 있었다.

줄리엣에게 주려고 특별히 찾아낸 싱싱한 작약이었다.

오닉스는 주인이 이걸 받고 어제 저지른 사고를 용서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제 오닉스는 선반 위에 올라 갔다가 선반을 망가뜨렸고, 하마터면 줄리엣의 의심을 살 뻔했다.

새끼 용은 줄리엣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오닉스는 아직 인간의 말을 전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비상한 눈치와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날개가 다 자랄 때까지 만이야.”

특히나 오닉스는 줄리엣이 그렇게 말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오닉스는 '날개'가 뭔지도 알 만큼 영리해졌다.

파닥파닥.

무심코 등 근육을 움직인 오닉스는 흠칫했다.

자신의 등에 돋아난 이것이 날개였다. 그리고 줄리엣은 아무래도 '날개'를 싫어하는 것 같다.

'날개가 다 자랄 때까지'라고 했으니까.

주인의 눈에는 오닉스의 날개가 흉해 보이는 걸까?

“삐약…….”

오닉스의 고개가 축 처졌다.

사실 물에 비춰 보았을 때 오닉스는 제 날개가 꽤 근사하게 생겼다고 느꼈다. 하지만 줄리엣이 싫어한다면 자신도 싫다고 생각했다.

지금이야 줄리엣이 꼭 끌어안고

'예쁘다, 예쁘다. 토닥토닥해 주지만 날개가 자란 걸 알면 더는 예쁘지 않다고 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오닉스는 주인에게 제 날개가 자란 것을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었다.

큼직한 꽃줄기를 입에 문 오닉스는 금방 희망에 부풀었다.

줄리엣은 꽃을 좋아하니까, 어쩌면 이걸 보면 기분이 좋아져서 날개가 자란 것을 눈치채도 넘어가 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꽃은 일종의 뇌물인 셈이었다.

“컹!”

오닉스는 순간 그 자리에 멈춰섰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 곳은 수풀 건너편이었다. 무언가 낯선생물이 오닉스를 향해 크게 한번 짖었던 것이다.

"....…뺨?”

새끼 용은 호기심으로 눈을 빛냈다.

멀지 않은 곳에 처음 보는 네 발 짐승이 서 있었다.

저택에서 기르는 사냥개였다.

사냥을 즐기는 저택의 주인 덕분에 공작저에서는 사냥개도 몇 마리 기르고 있었다.

일반적인 사냥보다는 마수 사냥에 최적화된 사냥개들은 몸집도 컸다.

혈통 좋은 사냥개들 앞에서 태어난 지 겨우 몇 개월 된 오닉스는 앙증맞은 토끼로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덩치 큰 사냥개를 난생처음 보는 오닉스는 호기심을 느끼고 겁 없이 가까이 다가갔다.

"크르릉.”

오닉스가 가까이 다가오자 사냥개들이 묶인 쇠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사냥개들의 눈에는 까맣고 작은 아기 용이 한입에 물어 죽일 수 있는 사냥감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컹! 컹컹!”

사냥개들의 목에 묶인 쇠사슬이 끊어질 듯 팽팽해졌다.

개들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사납게 짖으며 날뛰었지만 오닉스는 놀라지 않았다. 대신 사냥개들이 날뛰는 걸 좀 구경하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른 시간이라 보는 눈이 없는 것을 확인한 새끼 용은 입에 물고 있던 분홍 꽃을 바닥에 툭 내려놓았다.

그리고 잠시 후.

“끼잉. 낑….”

조금 전까지 사납게 날뛰던 것이 거짓말처럼, 사냥개들은 최대한 철조망에서 멀어지려고 안달을 했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애처롭게 끙끙거렸다.

“어허, 이놈들이……. 갑자기 왜 이래?”

시끄러운 소리에 한 박자 늦게 개들을 살펴보러 나왔던 하인이 당황하며 달려왔다.

사냥개에 정신이 팔린 그는 철장 너머 수풀에 숨어 있던 아기 용을 미처 보지 못했다.

그걸로 만족한 오닉스는 다시 커다란 꽃송이를 입에 물었다.

그리곤 더는 한눈팔지 않고 줄리엣이 기다리고 있을 별채 쪽으로 경쾌하게 종종걸음 쳤다.

그러나 비범한 새끼 용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저택의 주인이 집무실의 창을 통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전하.”

턱을 괸 채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창밖을 응시하던 레녹스는 힐끗 고개를 돌렸다.

기사단의 부단장인 밀란이 가져온 것을 집무실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레녹스는 제 앞에 놓인 물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게 그건가?”

“예, 그렇습니다."

데굴.

금속성의 동그란 구체가 얼마쯤 구르다가 멈췄다. 최근 마수들에게 광증을 불러일으킨다는 정체 불명의 연막탄이었다.

2황자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 대륙 전역에 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다.

연막탄을 손에 넣는 것은 그리

“어떤 성분이 마수들을 미치게 하는 것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밀란 경이 조심스레 덧붙였다.

“아직 쓰인 적 없는 환각 성분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아직 쓰인 적 없는 성분이라.

2황자는 희귀한 환각제의 제조법을 손에 넣을 능력이 없다. 그 배후에 누가 있을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 뱀의 소행이겠지."

“예?”

줄리엣은 2황자 클로프가 공작가를 노리고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말해 주었다.

그러나 레녹스는 사실 2황자가 무슨 짓을 꾸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노리는 것은 그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뱀의 머리였으므로, 2황자가 뭘 준비했든 시비를 걸어오면 짓밟아 주면 된다. 간단한 이치였다.

하지만 줄리엣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줄리엣 양은 전하의 안전을 걱정하시는 겁니다."

밀란이 조심스레 말했다.

“대비책도 직접 세워 두셨고요.”

줄리엣은 황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그의 패를 쓸모없게 만들면 된다고 말했다. 2황자가 자만해 있는 틈에 그에게 접근해서, 황자가 그를 낚으려 준비한 그물을 망가뜨리자는 말이었다.

그녀의 해결책은 단순하고 직관적이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줄리엣의 계획이 성공하려면 누군가 2황자의 처소에 숨어들어야 했다.

2황자가 어리석긴 해도 완전히 멍청이는 아니었다. 지금쯤이면 잔뜩 경계하고 있을 것이다.

칼라일 공 휘하에는 충성스럽고 유능한 수하들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전투의 귀재지 몰래 숨어드는 일은 전공이 아니었다.

누군가 들키지 않고 줄리엣의 명을 수행할 만한 인물이 필요했다.

레녹스가 불쑥 물었다.

“부기사단장의 판단은?"

"해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갑작스러운 질문을 받은 밀란 경은 잠시 당황했지만 제대로 대답했다.

“좀 무모하지만 위험을 무릅쓸가치가 있습니다. 성공만 한다면 다시는 2황자가 공작가를 건드리지 못할 테고요.”

레녹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줄리엣이 그를 아는 것 못지않게 그 역시 줄리엣을 잘 알고 있었다.

줄리엣 모나드는 평소에는 세상 얌전하고 고분고분하게 굴다가도 뭔가 한번 마음을 먹으면 결코 뒤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앞뒤 안 가리고 호수에 뛰어들지.”

못마땅하다는 듯 레녹스가 내뱉자 맞은편에 서 있던 밀란 경이 쓴웃음을 지었다.

"좋아. 원하는 대로 들어 줘."

그는 결국 가벼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차라리 줄리엣이 뭔가에 열중하는 게 다행이었다. 그러면 최소한 제 곁에 붙어 있기라도 할 테니까.

* * *

“어머나.”

"아가씨, 이것 좀 보세요.”

한편 머리빗을 들고 화장대 주변에 모여든 별채의 하녀들이 수선을 떨었다. 보기 드물게 커다란 꽃송이가 달랑 놓여 있었던 것이다.

“작약이네.”

줄리엣은 연분홍 꽃송이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삐약!"

발치에서 의기양양하게 오닉스가 고개를 들었다.

저택 안을 제 둥지처럼 사방팔방 돌아다니는 오닉스는 종종 줄리엣에게 꽃이나 커다란 나뭇잎, 혹은 바닥에 떨어진 나무 열매를 물어다 주곤 했다.

“어쩜, 기특하네요.”

머리를 빗어 주던 하녀들이 귀엽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새끼 용은 저택 하녀들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다들 위대한 마수보다는 조금 신기하게 생긴 고양이 취급을 하고 있었지만,

“그러게. 사람보다 낫네.”

줄리엣은 중얼거리며 오닉스를 안아 주었다.

새끼 용은 골골거리며 잔뜩 어린양을 부렸다.

똑똑.

“네.”

“줄리엣 양.”

문을 두드린 것은 밀란 경이었다.

“잠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들어오세요.”

줄리엣은 흔쾌히 그를 방 안으로 들였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리를 비켜 주었다.

오닉스 역시 잠시 밖으로 쫓겨났다.

“전하를 뵙고 오는 길입니다.”

밀란 경은 그 말과 함께 조금 전 칼라일 공작에게 보여 주었던 것과 같은 구체를 줄리엣에게 내밀었다.

“보시다시피 어디서나 흔히 제작할 수 있는 연막탄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금속구처럼 보였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다른 연막탄들과 똑같은 모양으로 평범하게 만들었겠지만…….

“그래서 다행이죠.”

줄리엣이 의미심장하게 싱긋 웃었다.

“같은 모양의 연막탄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얼마든지요.”

머지않아 2황자는 사방팔방 이 흔한 연막탄을 뿌리고 다닌 것을 후회하게 될 터였다.

“그리고 2황자가 어디에 그 증거물을 보관해 두는지를 알아내야 하는데…….

밀란 경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기 위해서는 황궁에 한 번은 들어가야 합니다.”

“구실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 죠?”

“예, 특히 2황자에게 접근할 구실이면 좋고요.”

“그건 어렵지 않을 거예요."

안 그래도 파티마의 이름으로 몸은 괜찮으냐는 안부 서한이 도착했다.

파티마의 이름을 빌렸지만 황제의 지시가 분명했다.

안부 인사로 시작한 그 서한은 몸이 괜찮아지는 대로 궁을 다시 방문해 달라는 구구절절한 초대로 끝맺고 있었다.

줄리엣보다는 칼라일 공작에게 빚을 졌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것일 터였다. 그렇다면 그걸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그리고 아가씨의 명을 수행할만한 인원은 몇몇 쓸 만한 자들을 추려보았습니다.”

과연 공작가 기사단의 부단장.

줄리엣은 밀란 경의 실행력에 감탄했다.

“모두 하나같이 뛰어난 자들이니 누굴 뽑아도…….”

우당탕!

그때 순간 바깥에서 들려온 요란스러운 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했다. 뭔가 무너지는 것 같은 소리였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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