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 * *
우지끈.
뭔가 부러지는 소리에 응접실 의자에 앉아 깜빡 졸던 줄리엣은 잠에서 깼다.
눈을 뜨니 벽난로에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창 밖은 어두웠다. 그리고 어쩐지 무릎이 허전했다.
“...… 닉스?”
분명 조금 전까지 묵직하고 따끈따끈한 새끼 용이 그녀의 무릎위에서 고롱거리고 있었는데 말이다.
줄리엣은 작게 하품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캉!
데구르르,
줄리엣은 발치에 떨어진 물체를 잠시 쳐다보았다.
그것은 사과 모양 장식품이었다. 벽난로 위, 높은 선반에 놓여 있던.…. 잠깐, 선반?
“...... ?"
“....… 삐약.”
천천히 고개를 든 줄리엣은 호박처럼 노란 한 쌍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왠지 당황한 것처럼 보이는 새끼 용이 반쯤 부서진, 높은 선반가장자리에 두 앞발을 얹은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닉스!”
놀란 줄리엣이 재빨리 오닉스를 내려주었다.
선반은 꽤 높아서 줄리엣이 발받침대 위에 올라가 까치발을 하고서야 새끼 용을 내려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새끼 용은 선반 위에 놓여있던 빨간 사과모양 장식품을 탐낸 것 같았다.
“거길 대체 어떻게 올라갔어?"
“…….”
줄리엣이 황당하다는 듯 캐물었지만 아기 용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처럼 눈을 데루룩 굴리며 시선을 회피했다.
선반을 망가트렸다고 혼이 날까봐서? 하지만 그녀가 알기로 오닉스는 그런 양심 있는 용은 아니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오닉스를 이리저리 뒤집어보던 줄리엣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다친 곳은 없어 보였지만 새삼 오닉스가 부쩍 자랐다는 게 실감났던 것이다.
손바닥만큼 앙증맞던 어린 용은 이제 더 이상 아기용이라고 부르기엔 무리였다.
이제는 커다란 고양이 정도 크기는 됐다. 마냥 장식인가 싶던 등의 날개도 이제 제법….….
“전하!”
갑자기 바깥이 시끄러워져서 줄리엣은 오닉스를 수상해 하던 것도 잊고 창가로 다가갔다.
날이 저문 듯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고, 낯익은 말이 보였다. 저택의 주인인 칼라일 공작이 돌아온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줄리엣은 재빨리 본채로 향했다.
"아, 아가씨.”
주인이 귀환한 덕분인지 분주히 움직이던 사용인들 가운데, 공작의 비서인 엘리엇이 줄리엣을 보고 아는 척 했다.
“방금 전하께서 귀택 하셨습니다.”
“네, 봤어요.”
줄리엣은 엘리엇이 들고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웬 수건이에요?"
“아니, 흠뻑 젖어서 돌아오셨다는 거 아닙니까! 이 날씨에 제정신입니까?”
엘리엇은 기가 막히다는 듯 열변을 토했다.
“이 계절에, 어딜 가서 뭘 하다.
이제 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헤매다 오셨는지…….”
엘리엇이 투덜거렸다.
그러고 보니 지금 몇 시쯤 됐나 싶어 줄리엣이 벽시계를 힐끔거리는데, 엘리엇이 슬쩍 그녀의 눈치를 봤다.
“아가씨가 잔소리를 좀 해 주시면…….”
“제가 어떻게 전하께 잔소리를 하나요.”
줄리엣은 난처한 듯 웃었지만 엘리엇은 포기를 모르고 질척거렸다.
“전하께서 아가씨 말씀은 유일하게 들으시잖습니까.”
“듣는 척 하시는 거겠죠."
“그래도 듣는 시늉이라도 하시지요.”
엘리엇은 칭얼거리더니 들고있던 수건을 다짜고짜 떠넘기고는 줄리엣의 등을 떠밀었다.
“어차피 나눌 말씀이 있어서 오신 거 아닙니까?”
하지만 왠지 분위기를 보아하니 한가하게 얘기나 나눌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잘 좀 부탁드립니다!"
줄리엣은 날이 밝은 다음 올걸, 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재빠른 공작의 비서는 줄리엣을 침실에 밀어 넣은 다음 그녀의 등 뒤에서 문을 냉큼 닫았다.
줄리엣은 머뭇거렸지만 부탁받은 수건을 전해주기 위해 욕실 문을 노크했다.
한참 기다렸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달칵.
수증기가 자욱한 욕실 문을 열자마자 줄리엣은 후회했다.
"내가 분명 꺼지라고……!”
험악하게 날선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대신 가져다 달라고 부탁받아서요.”
“……놓고 나가.”
이제 와서 내외하기는.
줄리엣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지만 시키는 대로 얼른 돌아 나왔다.
그러나 어쩐지 오기가 생겨서 나가지 않고 그를 기다렸다. 괜한 짓을 했나 후회할 무렵 욕실 문이 열리고 레녹스가 뒤따라 나왔다.
그는 줄리엣이 아직 돌아가지 않고 기다리는 것을 보고 뭐라하진 않았지만 그의 심기가 불편한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왜.”
"드릴 말이 있어서요.”
레녹스는 방 안을 가로질러 카우치에 걸터 앉았다.
“해.”
레녹스는 단순히 피로해 보이는 게 아니라 표정이 좋지 않았다.
황제를 알현하러 갔다가 이렇게 늦게 귀택 하다니. 뭔가 일이 있었던 걸까?
어쨌든 엘리엇에게 부탁받은 것처럼 괜한 짓 하지 말라고 잔소리를 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줄리엣은 잠시 망설이다가 시간을 뺏고 싶지 않아서 낮에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요약해서 들려 주었다.
“...… 그래서,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러나 레녹스는 그녀의 이야기를 전부 듣고도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반기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뭔가 반응을 보일 줄 알았는데.
"그래서 호수에 뛰어들었나?"
레녹스의 첫 질문은 어쩐지 줄리엣이 생각한 것과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고작 그따위를 알아내려고?"
“얕은 물이었어요. 사람도 많았고…….”
줄리엣은 어쩐지 변명하듯 대꾸했다.
별로 위험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것 참 기특하네.”
치하를 바랐다거나 공작가의 가신들과 그랬던 것처럼 적극적인 반응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레녹스는 어쩐지 비아냥거리는 투였다.
줄리엣은 조금 기분이 상했지만 그와 다투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그러나 줄리엣이 나가기 전에 그가 불쑥 물었다.
“그 늑대 새끼가 뭐라고 했지?"
“네?”
로이를 만난 건 어떻게 알아?
“모를 수가 있어야지.”
마치 줄리엣의 그런 생각을 들여다보기라도 했다는 듯, 일어나서 성큼 다가온 레녹스가 싱긋 웃으며 줄리엣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낮에 로이가 길게 입 맞췄던 왼손이었다.
“이렇게 대놓고 흔적을 잔뜩 남겨놨는데.”
“......."
“맞춰볼까? 제 체취를 묻혀두면 마수들이 얼씬도 못할 거라는 둥, 비슷한 헛소리를 했겠지.”
로이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줄리엣은 로이가 당분간은 괜찮을 거라고 한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라이칸슬로프의 가호라고 하던가.
줄리엣도 들은 적 있었다.
숲의 일족은 확실히 마수들보다는 상위 포식자였으므로, 그들의 가호가 있으면 웬만한 마수들의 습격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줄리엣은 로이가 베푼선행에 고마운 마음보다는 눈앞의 남자가 화를 내는 게 더 신경쓰였다.
줄리엣은 조용히 그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뭐야.”
“레녹스.”
"왜.”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
"로이는 제 친구고, 저를 생각해서 도와준 거예요.”
“하, 그 늑대 새끼가 친구라고?”
잠시 누그러졌던 레녹스의 눈매가 다시 사나워졌다.
“그래서 감싸기라도 하는 건가?”
줄리엣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전하와 다투고 싶지 않아요. 이런 일로 더는 속상하기도 싫어요.”
레녹스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조곤조곤 타일렀다.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잖아요.”
줄리엣은 솔직히 털어놓았다.
"말다툼으로 시간을 낭비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테니까요.”
“그리고 나면?"
“네?”
“내 말은.”
레녹스는 그 답지 않게 단어를 고민하듯 신중하게 물었다.
“그 다음엔……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본 적 있나?”
레녹스는 일부러 계약이란 단어를 피했지만 줄리엣은 제대로 알아들었다.
지금의 계약이 끝난 다음에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본 적 있냐고?
줄리엣은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어딘지 초조해보이는 남자는 뭔가 바라는 답이 있는 것 같았다.
사실은 한번도 없다.
어린 시절부터 줄리엣은 이상한 감이 잘 맞는 편이었다.
문득 법황이 경고했던 것이 떠올랐다. 제바스티안이 장례식 준비를 해야한다고 말했다던가.
사실 그 이야기를 듣기 전부터, 줄리엣은 스스로가 이번 생에도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는 직감을 가지고 있었다.
"네, 있어요.”
그러므로 이 계약이 끝난 다음 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될 거라고 한 번도 그려보지 못했다.
“저는 행복해질 거예요.”
하지만 줄리엣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왠지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답을 주고 싶었다.
“그리고 전하께서도, 괜찮아지 실 거라고 믿어요."
"......."
줄리엣은 자신이 내놓은 답이 과연 레녹스에게 만족스러웠는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레녹스는 미간을 슬며시 찌푸리고는 한동안 줄리엣의 손을 깍지껴 단단히 잡고 있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줄리엣은 저명한 공작가 기사들의 방문을 받았다.
“이런 시각에 어쩐 일이에요?"
혹시 2황자와 관련 있는 일인가 싶어 줄리엣이 고개를 갸웃하는 데, 주드가 이상한 표정으로 뭔가를 내밀었다.
“전해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 내 목걸이?"
그녀가 전날 호수에 빠뜨린 다이아몬드 목걸이였다.
“이걸 어떻게……?"
줄리엣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쪽에 새겨진 그녀의 머릿글자까지 그대로였다.
목걸이 자체에 걸려있는 보존마법 덕분인지 흠집 하나 나지 않은 상태였다.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의외로 역사가 긴 물건이었는데, 줄리엣이 열아홉 번째 생일에 선물 받은 것이었다.
"뭐든 갖고 싶은 걸 말해."
귀찮다는 듯 거만하게 구는 남자가 얄밉고 그의 태도가 속상해서 줄리엣은 일부러 까탈스러운 요구를 했다.
"아라벨라 여왕의 목걸이요. 그걸 주세요.”
아라벨라 여왕의 목걸이는 이전 생에서부터 호사가들이 열을 올리던 물건이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믿거나 말거나, 과거 소유주였던 여왕이 죽자 그녀의 연인이었던 재상이 뒤따라 목숨을 끊었다는 비극적인 일화로 더욱 유명했다.
제국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 이야기를 듣고 자랐을 만큼 유명한 이야기 였다.
잠시 과거 일을 떠올리던 줄리 엣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어디서, 누가 찾은 거예요?"
"아, 그게 말입…… 악!”
주드가 입을 열려고 하자 밀란이 그의 정강이를 퍽 걷어찼다.
“황궁에서 어제 밤에……. 아니, 오늘 아침에 사람이 왔습니다.
궁의 하인 하나가 잃어버린 목걸이를 찾았다고요.”
그녀는 두 기사가 어쩐지 수상한 눈짓을 주고받는 것을 보았다.
"그래요?”
줄리엣은 더 캐묻지 않고 다시 목걸이를 착용했다.
“조만간 감사 인사를 하러 가야겠네요.”
“구, 굳이 그러실 필요는…..….”
“하하, 그러시죠! 필시 황궁에서.
도 반길 겁니다.”
“네.”
줄리엣은 거짓말에는 영 소질이 없는 두 기사를 배웅한 다음 창가에 주저앉았다.
유리창에 비치는 자신의 옆얼굴을 보면서, 멍하니 목에 건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에게 이 목걸이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은 먼 과거의, 이전 삶에서의 일이다.
그때의 줄리엣은 그가 옆에 있는 걸로도 기뻐서, 아무거나 알고 있는 이야기를 지껄이는 순진한 어린애였다. 심지어 레녹스는 그녀가 해준 이야기를 노골적으로 싫어했는데도.
"한심한 얘기잖아."
하물며 칼라일 공작은 그런 시시한 일을 기억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줄리엣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렇게 오래 전 일을 기억할 리 없었다.
'그런데 왜 이제와서. 답지 않은 짓을 해.’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