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159화 (156/229)

159화.

“어떻게…… 로이가 왜 여기 있어요?”

묻는 것과 동시에 등 뒤에서 다시 인기척이 들려왔다.

“황자비 전하의 하녀를 봤다고?”

"예, 분명 이쪽에서 …"

어쩌지.

줄리엣의 난처한 표정을 본 로이는 힐끔 그녀의 등 뒤를 곁눈질했다.

“바빠 보이는군요."

차분한 표정의 로이는 줄리엣에게 뭘 하고 있느냐 묻지도 않았다.

“이쪽으로.”

눈치 빠른 로이는 재빨리 줄리 엣을 이끌고 몸을 피했다.

"!”

그 몸을 피한 방향이란 것이 막 다른 복도 끝이고, 눈앞에 나타난 게 커다란 창이란 것이 문제였지만.

“잠깐 실례할게요."

로이는 줄리엣이 비명을 지르거나 거절하기 전에 그녀를 어깨에 둘러메고 가볍게 뛰어내렸다.

"여긴 2층이야!’ 줄리엣은 차마 소리치지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풀썩.

그러나 줄리엣의 염려와는 달리, 질끈 감았던 눈을 떴을 때 그들은 앰버 궁의 뒤뜰에 착지해 있었다.

부드럽고 안정적인 착지였다.

“.....… 고마워요."

덕분에 위기를 넘긴 건 사실이니까.

줄리엣은 얼떨떨하면서도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이제 됐어요. 내려 줘요."

그러나 로이는 줄리엣을 땅에 내려 준 다음에도 허리를 감은 손을 풀지 않았다. 저절로 줄리 엣의 미간이 좁아졌다.

“로이?”

“줄리엣.”

로이는 어쩐지 표정이 어두워 보였다.

“.....…나한테 화난 거죠. 그렇죠?”

로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로이에게 화가 났던가?

곰곰이 생각하던 줄리엣은 그제야 그들이 언제 마지막으로 만났었는지 기억해 냈다.

2황자 부부의 결혼식 연회에서였다.

그날 로이는 함께 카티아의 숲으로 갈 것을 제안하면서 그녀에게 칼라일 공작가의 비밀을 폭로했다.

“화 안 났어요.”

“… 정말요?"

“네.”

사실 로이에게 화가 나기는 했다. 그 비밀을 말한다고 줄리엣을 멋대로 휘두를 수 있는 것처럼 굴었으니까.

하지만 줄리엣은 그토록 주요한 사실을 숨겼던 레녹스에게 더 화가 났다.

“지금은 괜찮아요. 그런데 로이는 왜 여기 있어요?"

조금 민망해져서 줄리엣은 화제를 전환했다.

"황제가 숲으로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어요.”

“무슨 일로요?”

“예언서를 해석하는 일을 도와 달라더군요.”

“아, 예언서.”

누가 말해 줬는지는 잊어버렸지만, 최근에 그녀도 들은 적 있었다. 신전에서 예언서를 발굴해냈다던가.

그리고 라이칸슬로프 일족은 고대 문자를 해석할 수 있는 일족이었다.

'너무 노골적이네.'

줄리엣은 속으로 혀를 찼다.

어쩐지 단순히 사순절 행사라기에는 추기경도 오고 법황도 행차하고…….

규모를 크게 벌렸다 싶었는데 황제는 예언서에 눈독을 들이는 모양이었다.

“데려다줄게요.”

조금 풀죽은 것 같은 로이는 말없이 줄리엣의 손목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줄리엣이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음에도 로이는 다른 사람들 눈에 띄면 안 된다는 걸 아는 듯 행동했다.

그는 능숙하게 앰버 궁의 외진 길 쪽으로 안내했다.

뒷문으로 들어가면 들키지 않고 파티마가 기다리고 있는 1층 응접실에 도착할 것이다.

“……호수에는 일부러 빠진 건가요?"

한참 묵묵히 앞서 걷던 로이가 불쑥 물었다.

“네?”

“황궁 전체에 소문이 퍼졌어요.

줄리엣이 소중한 목걸이를 잃어버렸고, 황자비와 다투다가 호수에 빠졌다고요.”

생각보다 사고의 규모가 커진 것 같아서 줄리엣은 좀 민망했다.

'그러고 보니 레녹스도 궁에 와 있을 텐데.’

물론 레녹스는 황제를 알현하고 있을 테니, 같은 황궁 내에 있더라도 한참 떨어진 곳에 있을 것이다. 줄리엣은 그의 귀에도 그녀가 소동을 피운 일이 들어갔을까 궁금했다.

“그런데 줄리엣, 그 목걸이 말이에요.”

“네.”

“..…그 인간 남자가 준 건가요?”

“네?”

어느새 앞서 걷던 로이가 걸음을 멈추고 줄리엣을 보고 있었다.

줄리엣은 의아해졌다.

호수에 빠뜨린 목걸이가 칼라일공작의 선물인 건 맞지만, 그건 왜 궁금해할까?

그런데 이어지는 로이의 말은 더욱 의아했다.

“그 목걸이, 내가 다시 사 줄까요?”

그렇게 묻는 로이의 시선은 어쩐지 줄리엣을 향해 있지 않았다. 그는 줄리엣의 어깨 너머, 뒤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뭐가 있길래?

줄리엣도 그를 따라 뒤를 돌아봤지만 보이는 거라곤 호숫가 풍경뿐이었다. 고도로 발달한 이종족의 시야에는 다른 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사실 줄리엣은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건 세상에 하나뿐인 거예요.”

호수에 던진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좀 아깝긴 했지만 얻어낸 정보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거였다.

그리고 칼라일 공작은 연인에게 선물한 목걸이를 일일이 기억할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아마 레녹스는 잃어버린 목걸이가 제가 준 선물인지도 모를 터였다. 설령 안다 하더라도 신경쓰지 않을 테고, 줄리엣은 어깨를 으쓱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로이가 도와준 덕분에 들키지 않고 쪽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조심해요, 줄리엣."

로이는 평소보다 오랫동안, 신중하게 줄리엣의 손등에 입 맞춘 뒤 역시 이번에도 줄리엣의 어깨너머를 노려보며 싱긋 웃었다.

“당분간은 이걸로 충분할 겁니다.”

줄리엣은 의미심장하게 웃는 로이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로이의 말과 행동이 멀찍이 호숫가에 서 있던 누군가를 겨냥한 것인지도 알지 못했다.

줄리엣은 무사히 파티마가 기다.

리고 있던 응접실로 돌아왔고, 궁정의가 달려올 때까지 다시 의식을 잃은 환자 흉내를 냈다.

“송구합니다, 모나드 백작. 목걸이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어쩔 수 없죠. 호수에 빠뜨린 모양이네요.”

줄리엣은 언제 파티마와 다퉜냐는 듯 다소 침울하게 대꾸했다.

“사람을 동원해서 찾고 있으니 금방…….”

"아뇨, 괜찮아요. 목걸이일 뿐인 걸요.”

뜻밖에도 황궁의 시종장은 쩔쩔매면서 호수를 어떻게든 뒤져서 목걸이를 찾아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줄리엣의 관심사는 더 이상 목걸이 따위가 아니었다.

무사히 황궁을 빠져나와 공작가로 돌아온 줄리엣은 돌아오자마자 레녹스를 찾았으나 그는 아직 귀가 전이었다.

“전하는요?”

“귀가가 늦으실 것 같답니다.”

“아가씨, 대체 황궁에서 무슨일 있으셨던 겁니까?"

그새 줄리엣이 벌인 사고가 공작가에도 알려진 모양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줄리엣은 공작가의 가신들을 쳐다보았다.

“그보다 밀란 경, 엘리엇. 잠시 할 이야기가 있어요."

줄리엣은 가장 믿을 만한 공작의 두 측근에게 대화를 요청했다.

두 사람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그녀의 부름에 응했다. 줄리엣은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다음, 황궁에서 보고 들은 것을 고스란히 들려주었다.

“………2황자가 공작가를 노리고 음모를 꾸미고 있어요.”

"허.”

비밀스러운 회의, 공작가의 문장을 새겨넣은 연막탄까지.

잠자코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한 밀란 경과 엘리엇의 얼굴은 심각해졌다.

“쥐새끼 같은 2황자답군요.”

“하지만 납득은 갑니다.”

2황자 클로프가 나이가 같은 칼라일 공작에게 얼마나 오랫동안 열등감을 품어 왔는지는 공작의 가신들도 잘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2황자가 황태자 책봉을 욕심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마수들을 자극하는 물질을 만들어 낼줄은 몰랐는데요.”

“본래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죠.”

끙 하고 엘리엇이 앓는 소리를 냈다.

조잡한 술수였지만 두 사람 역시 공작가에 타격이 되리란 걸 직감한 눈치였다.

“그런 치졸한 술수를……."

“이 상황에서 2황자가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연막탄을 증거로 들고 나오면 시끄러워질 겁니다.”

2황자의 꿍꿍이는 뻔했다.

“필시 공개적인 무대에서 공작가에 죄를 뒤집어 씌우겠지요.”

아마 적당한 때를 봐서 황제와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작가를 이번 사건의 배후로 지목할 것이다.

"다른 귀족들도 얼씨구나 장단을 맞출 테고요.”

“하지만 주군께선 그런 일에 신경 쓰실 분이 아니시니…….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밀란 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아는 칼라일 공작은 이런 함정을 알게 되어도 눈 하나 깜짝 않을 인물이었다.

칼라일 공작은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게 아닌가 의심스러운 전설적인 공적을 자랑하는 인물이었고, 결코 군사적 마찰을 피하지 않을 것이다.

확실히 레녹스의 방식은 직관적이긴 하다.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겠지만.

‘하지만 굳이 일을 어렵게 만들 필요도 없잖아?’

줄리엣이 고개를 갸웃하는데 엘리엇이 의견을 내놓았다.

“최대한 마찰을 피하는 수도 있습니다.”

“마찰을 피한다니요?"

“2황자가 꾸미는 무대에 서지 않는 겁니다. 예컨대, 지금 당장 북부로 돌아가서 후일을 도모하는 거죠.”

“그건 도망가는 거잖습니까?”

“하지만 증거가 조작됐다는 해명을 준비할 시간을 벌 수 있을 겁니다.”

엘리엇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2황자가 진짜 범인이라는 증거를 모아서 결백을 주장하면…….”

“예, 물론 주군께서 절대 허락하지 않으시겠죠.”

밀란 경이 냉정히 반박했다.

조용히 듣던 줄리엣은 쿡쿡 웃었다.

“저도 도망가는 건 싫어요.”

줄리엣이 입을 열자 두 사람의 시선이 쏠렸다.

“뭔가 생각해두신 게 있으십니까?"

"음, 조금이요.”

줄리엣은 잠시 말을 골랐다.

“우선 여기까지 온 이상 진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2황자가 꾸민 짓이라는 걸 증명하기도 어려울테고요.”

중앙의 혈투는 창칼로 이루어지지 않지만 그 못지않게 치열했다.

여론전에서는 선공이 가장 중요한데, 현재 칼자루를 쥐고 있는 쪽은 2황자였다.

2황자 측에서는 언제 조작된 증거를 내밀지 시기를 고르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면 역시 주군의 방식대로…….”

밀란 경이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북부의 병력은 확실히 명성이자자하긴 하지만 그러면 출혈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기사단의 부단장인 밀란 경은 책임이 막중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줄리엣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면전은 최대한 피하기로 해요.”

“허면요?”

줄리엣은 싱긋 웃었다.

“2황자의 자만심을 이용하는 거 죠.”

“자만심이요?”

"황자는 아직 자기 패가 들통났다는 걸 모를 테니까요."

2황자는 자신이 칼라일 공작가를 언제든 무너뜨릴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패를 줄리엣에게 들킨 이상 그녀는 그걸 역으로 이용할 만한 계략을 준비해 둘 수 있었다.

“별로 대단한 얘기는 아니에요.

방법이 간단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금 멋쩍게 웃은 줄리엣은 두 사람에게 황자의 허를 찌를 계책을 들려주었다.

사실 그녀의 계책은 계책이랄것도 없었다.

“누구든 생각해 낼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니까요.”

다소 당황한 것 같았지만 줄리 엣의 이야기를 듣고 난 공작가의 가신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군요. 확실히 말은 됩니다.”

“그렇게 하면 2황자를 무력화시킬 수 있겠군요.”

“무력화뿐입니까? 잘만 하면 2황자에게 붙은 세력들을 끝장낼 수 있을 겁니다!"

공작의 비서인 엘리엇이 눈을 빛냈다.

“다만 문제는 실행인데…….”

남은 문제는 언제, 어떻게 황자에게 접근할 수 있는가였다.

“가장 중요한 건 2황자의 처소에 숨어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건 줄리엣 역시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떠올린 바 없었다.

오늘처럼 앰버 궁에 온갖 핑계를 대고 몰래 숨어드는 것도 불가능했다. 엿들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2황자가 준비한 증거에 접근해야 했다.

북부 공작가에는 맹목적으로 공작에게 충성하는, 은밀히 움직이는 검은 기사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들은 줄리엣의 명에는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그들이라 할지라도 몰래 2황자가 연막탄을 숨겨 둔 장소에 숨어들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고도로 훈련된 살수들도 차라리 2황자를 암살하는 게 더 쉽다고 말할 것이다.

“걱정 마십쇼. 제가 어떻게든 방도를 찾아내겠습니다."

밀란 경이 비장한 표정으로 장담했다.

“적어도 전쟁보다는 쉬울테니까요.”

“네, 믿을게요.”

줄리엣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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