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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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2황자 일행은 바깥의 이런 사정을 알지 못했다.
줄리엣과 파티마가 한바탕 연극을 벌인 것은 그들이 앰버 궁의회의실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직후였기 때문이다.
“조사는 어디까지 진행되었소?”
“중부 지역까지 탐문이 끝났습니다.”
회의장 안의 인원은 모두 황제의 허가를 받아 2황자 클로프가 끌어 모은 귀족들이었다.
그들이 모인 목적은 최근 대륙전역에서 마수들이 폭주하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모든 지역의 보고 내용이 일치 합니다.”
심각한 얼굴로 어느 귀족 하나가 테이블 위에 동그란 구체를 올려놓았다.
귀족들에게는 익숙한 모양의 연막탄이었다.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이 연막탄을 던지고 사라졌다고 합니다.”
회색 연기를 마신 마수들이 날뛰고, 사람들이 많이 다쳤다.
대륙 곳곳에서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상한 연기가 마수들을 난폭하게 만든다는 것만은 분명했지만 문제는 연막탄을 퍼뜨리는 괴한들의 정체였다.
“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런 짓을 하는 걸까요?"
회의장 안의 귀족들은 모두 마수들이 날뛰는 바람에 영지에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이었다.
클로프가 일부러 그런 귀족들만 골라 모았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전부 2황자의 세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에게 호의적이거나 중립이라고 할 수 있는 귀족들이 절반쯤 되었다.
“혹시 야만족의 짓이 아닐까요?"
“그 야만족들에게 이럴 만한 기술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맞습니다. 게다가 그들의 소행이라면 정체를 굳이 숨길 필요도 없겠지요.”
“그렇다면 혹시 국경 밖으로 쫓겨난 흑마법사들이 ……."
이런저런 의견이 오갔지만 누구도 명확한 추측을 내놓지 못했다.
연막탄을 던져 놓고 도망치는 괴한들을 잡는다면 해결될 문제였지만, 그들은 마치 제국군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 손쉽게 도망쳤다.
“아무래도 배후는 제국군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회의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무렵, 누군가 의문을 제기했다.
“헌데,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2황자가 미리 심어 놓은 자였다.
“뭐가 이상하단 겁니까?"
“생각해 보십쇼. 온 대륙에서 마수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는데 북부만 피해가 없다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가 척 하고 테이블 중앙의 지도를 가리켰다.
커다란 지도에는 각지의 피해 상황이 붉은 표시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의 지적대로, 북부는 광활한 땅에 비해 기록된 피해 규모가 턱없이 적었다.
“듣고 보니 그렇군요."
“일리가 있습니다. 저도 북부에만 사상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게 이상하던 참이었습니다.”
“와 북부에서만
피해가 없지요?”
“북부는 원래 마수가 자주 등장하는 곳 아닙니까? 그럼 피해가 더 컸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누가 보면 북부에서 일을 꾸몄다고 해도 믿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공작이 배후에 있지 않고서야,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클로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게 계획대로였다.
'좋아, 별것 아니잖아?'
“자자, 아직 명확한 건 아무것도 없소. 확실한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 속단은 금물이오.”
2황자는 짐짓 중립적인 척 말했지만 사실은 귀족들의 얼굴에 불만이 떠오른 것을 확인하고 쾌재를 부르는 중이었다.
“하지만 세르반 남작의 지적이 옳습니다, 황자 전하.”
“칼라일 공은 평소에도 황실에 불경스러운 작자가 아닙니까?"
“북부는 늘 그랬지요.”
“속을 알 수 없는 자입니다.”
안 그래도 기네스 후작이 사라진 이후로 공작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는 귀족들이 많았다.
한번 의심에 불이 붙자 클로프가 거들 필요도 없었다.
'그러게 고분고분 머리를 조아렸었어야지.’
이렇게 분위기를 몰아가기 시작하면 이내 여론은 칼라일 공작에게 나쁜 쪽으로 돌아갈 것이다.
'식은 죽 먹기군.'
클로프는 완전히 기세등등해졌다.
칼라일 공작에 대한 의심스러운 여론이 정점에 달했을 때를 기다려, 미리 준비해 둔 조작된 증거를 내밀면 그를 아주 보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황자 전하, 부디 공작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부탁드립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내 철저히 시비를 가릴 터이니.”
클로프는 회의를 서둘러 마쳤다.
귀족들은 잔뜩 불만 어린 표정으로 회의장을 나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2황자와 그의 보좌관들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일이 착착 진행되는군요.”
“그래, 그래. 칼라일 공작이 건방지게 설치고 다니는 것도 얼마 안 남았네.”
흐뭇한 미소와 함께 그는 품에서 동그란 금속 구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조금 전 회의에서 증거품으로 어느 귀족이 가져왔던 것과 같은 연막탄이었다.
단 하나 다른 점이라면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는 것뿐이었다.
“이제 적당한 때에 이걸 폐하앞에 던져 놓기만 하면 되네.”
“칼라일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연막탄 말이지요?"
마수로 인해 대부분의 귀족들이 피해를 입은 상황이라, 모두가 조금이라도 의심 가는 자를 찾아 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평소대로라면 대체 어느 멍청한 범인이 연막탄에 가문의 문장을 새겨 놓겠느냐 의심부터 하겠지만.
"그래. 그럼 그 다음은 화가 잔뜩 난 귀족들이 알아서 공작을 물어뜯을 걸세.”
분노와 투기는 손쉽게 이성을 좀먹는다.
시기심과 분노에 눈이 먼 귀족들은 칼라일 공작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북부의 공작이라 할 지라도 과연 제국의 귀족들을 전부 적으로 돌리는 건 위험할 터.
“그리고 이걸 보시면 황제 폐하역시 진노하시겠지요.”
보좌관이 히죽거리며 황자의 비위를 맞췄다.
“그러면 제아무리 칼라일 공작이라도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대단한 계책이십니다, 황자님!”
“이 사람, 과찬이네.”
사실 대단한 계책이랄 것도 없었다.
황후의 치료사가 알려 준 대로 연막탄을 만들어 내고 칼라일 공작을 모함하는 분위기를 조성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승리감에 도취된 2황자 일행은 시시덕거리며 아부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회의장을 마지막으로 나섰다.
복도의 문 그림자 뒤에 여자 하나가 숨을 죽이고 숨어 있던 것을 모르고.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파티마 황자비의 하녀에게서 빌린 옷으로 갈아입은 여자는 변장한 줄리엣이었다.
바깥의 경비가 엄하기 때문인지, 앰버 궁 내부의 경계는 생각보다 허술했다.
줄리엣은 조금 전 엿들었던 대화를 곱씹었다.
“제아무리 칼라일 공작이라도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호수에 빠지고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희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정보였다.
'그렇게 된 거였어.'
놀랍지는 않았다.
2황자 클로프가 뭔가 꾸미고 있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준비를 했을 줄은 몰랐는데.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연막탄이라……. 제법 머리를 썼네.'
평소라면 절대 먹히지 않을 유치한 수법이지만, 2황자 일당은 기반 공사를 단단히 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마수들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칼라일 공작가가 배후로 지목된다면 사방에서 벌떼같이 달려들어 그를 물어뜯을 것이다.
진짜 일을 꾸민 배후는 2황자 클로프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누가 진짜 범인인지, 진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걸 줄리엣은 잘 알고 있었다.
줄리엣은 구두 굽을 두어 번 바닥에 톡톡 두드린 다음 싱긋 미소했다.
모르고 당했다면 타격이 꽤 컸겠지만…….
미리 알게 된 이상 크게 걱정스럽진 않았다.
그보다 2황자의 머리에서 나올만한 계략은 아니라는 게 신경쓰였다. 그는 야심만 넘칠 뿐 이런 잔머리가 없었다.
‘달리아의 짓이겠지..'
줄리엣은 잠시 달리아에 대해 생각했다.
지난번에는 기네스 후작이었고, 이번에는 클로프 황자. 물론 이용당하는 쪽이 나쁘긴 하지만, 칼라일 공작가를 무너뜨리면 대체 뭐가 이득이길래 이러는 걸까?
“거기 누구냐!”
생각에 잠겨 있던 줄리엣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앰버 궁의 시종 하나가 서 있었다.
줄리엣은 당황하지 않고 태연히 준비한 대사를 읊었다.
"아, 저는 파티마 황자비님을 모시고 있는 하녀예요.”
“황자비 전하의 하녀가 여기는 무슨 볼일이지?"
시종이 물었지만 줄리엣은 정작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온 황궁이 발칵 뒤집혔는데 못들으셨나요? 황자비께서 목걸이를 찾는 걸 도와주실 수 있는지 여쭤보고 오라고 하셨어요.”
줄리엣은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고 둘러댔다.
시종은 정말로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 꽤 당황한 눈치였다.
“황자비께서 찾으신다고?"
“네, 아래층에 계세요.”
“좋아. 여기서 잠시 기다려라.”
시종이 상급자에게 보고하기 위해 자리를 뜨기 무섭게 줄리엣역시 미소를 지웠다.
파티마가 기다리고 있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다시 쓰러진 환자 흉내를 낼 생각이었다.
'이런.’
그러나 운이 별로 좋지 않았다.
방향을 틀기 무섭게 복도 끝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던 것이다.
적어도 두셋 이상의 경비병인 것 같았다.
'골치 아프게 됐네.'
시종 한둘쯤이야 괜찮지만 여러 명이라면 누군가는 줄리엣의 얼굴을 알아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왜 혼절했다는 모나드 백작이 하녀 옷을 입고 돌아다니고 있는지 추궁당할지도 모른다.
다시 방향을 틀어 복도 끝의 계단참으로 향하던 줄리엣은 그만 누군가와 살짝 부딪쳤다.
"죄송합…….”
“줄리엣.”
고개를 푹 숙인 채 대충 사과를 하고 지나가려던 줄리엣은 흠칫했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든 다음에는 더욱 놀랐다.
“...…로이?”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는 줄리엣이 아는 사람이었다.
언제나처럼 단정한 옷차림의 로이가 거짓말처럼 거기에 서 있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