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 * *
법황과의 면담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작은 배 앞에서 파티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알현은 즐거우셨나요?"
파티마가 형식적인 인사를 했다.
“네, 황자비 전하 덕분에요."
“그럼 돌아가죠..”
줄리엣의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하던 파티마는 먼저 배에 올랐다.
작은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오는 동안 줄리엣은 주변을 구경했다.
법황 덕분에 구경하게 된 보랏빛 호수가 신기해 어쩐지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아쉬웠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호숫가에 세워진 작은 건물이 줄리엣의 눈에 들어왔다.
호박처럼 노란 지붕이 얹어진 별궁이었다.
별궁의 외관을 느긋이 구경하던 줄리엣은 문득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 건물로 들어가는 것을 발견했다.
화려한 옷차림을 보아하니 출입을 허가받은 귀족들인 것 같았다. 그리고 가장 앞에 선 사람은….
'으응?'
파티마의 남편이자 2황자인 클로프였다.
'인적 없는 호숫가의 별궁에 클로프와 귀족들이라……'
잠시 눈을 깜빡이던 줄리엣은 공작가 가신들이 해 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2황자가 자청해서 사건을 조사하고 있답니다.”
클로프가 몇몇 귀족들과 함께 조사단을 꾸려서 갑작스레 마수들이 난동을 부리게 된 원인을 조사하고 있다고 했던가.
남의 일이라곤 관심 없는 2황자가 자청해서 그 일을 맡았다고 하니, 어쩐지 수상했다.
줄리엣이 황궁 경비병에게 떠보듯 물었다.
“저기가 앰버 궁이던가요?”
“예, 그렇습니다.”
'저 안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게다가 2황자가 달리아와 손을 잡았다면 무슨 꿍꿍이인지 더욱 의심해 볼 필요가 있었다.
“.……크흠, 곧 뭍에 도착합니다.
내릴 준비를 하시지요.”
줄리엣이 앰버 궁을 유심히 보는 걸 눈치챘는지 황궁 경비대가 경계하듯 말했다.
앰버 궁은 신성한 호수와 마찬가지로 출입이 통제되는 구역에 속해 있었다.
황제의 직계혈족이거나 미리 허가받은 귀빈이 아니고서는 드나들 수 없었다.
'뭔가 방법이 없나?'
곰곰이 생각하던 줄리엣은 맑은 호수와 자신의 옷차림을 번갈아 보았다.
알이 작은 다이아몬드를 꿰어 만든 목걸이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줄리엣은 잠시 멈칫했다.
칼라일에게 받은 선물들 중 하나인 이 목걸이는 미끼로 쓰기에는 지나치게 고가였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다시 찾아올 것 같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이게 아니면 몸에 지니고 있는 소지품은 은 열쇠밖에 남지 않았다.
줄리엣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은 열쇠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품 안에 숨겼다.
차르륵.
그리곤 몰래 목걸이를 호수에 떨어뜨렸다.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호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것을 확인한 줄리 엣은 맞은편에 있던 파티마에게 조용히 접근했다.
“황자비 전하.”
"뭐…… 뭐예요, 갑자기?"
“뭐?
파티마는 갑자기 줄리엣이 친근하게 말을 걸자 흠칫 소스라쳤다. 누가 보면 잡아먹겠다는 줄 알겠다.
“저한테 빚진 거 있으시죠?”
“비, 빚이라니? 난 그런 적"
파티마는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누가 봐도 뭔가 찔리는 사람의 태도였다.
그러나 줄리엣도 알고 파티마도 알았다. 어린 시절 파티마는 줄리엣에게 용서받기 어려운 잘못을 했고, 그것은 둘 사이를 틀어지게 만든 오랜 앙금이었다.
“파티마."
줄리엣은 그런 파티마의 팔목을 붙잡아 시선을 마주했다.
“내가 지금부터 미친 짓을 할 건데…….”
나긋나긋한 줄리엣의 목소리에는 거절하기 어려운 묘한 힘이 있었다.
“나한테 좀 맞춰 줘."
"뭘?"
“…..”
파티마는 줄리엣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잠시 후.
“꺅!”
풍덩!
곧이어 신성하고 조용한 호숫가에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목격자였다.
갑자기 파티마 황자비와 모나드백작이 언쟁을 벌였다. 두 사람의 사이가 나쁜 것은 유명했으므로, 거기까지는 별일 아니었다.
정말 큰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줄리엣 모나드가 호수에 빠졌던 것이다.
“백작님!"
다행히 호숫가에 거의 다다른 상황이라 수심은 깊지 않았고, 놀란 사람들은 얼른 물에 빠진 줄리엣을 건져냈다.
"황자비 전하,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나, 나도 몰라요! 갑자기 모나 드 백작이 목걸이를 도둑맞았다.
고 먼저 시비를……!”
파티마 황자비도 크게 놀라고 긴장한 듯 횡설수설했다.
어쩐 일인지 줄리엣 모나드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호숫가에서 기다리던 그녀의 호위 기사들은 미친 듯 화를 냈다. 그들은 줄리엣을 가까운 궁으로 옮기고 의원을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잠깐!”
축 늘어진 줄리엣을 들고 정신없이 앰버 궁으로 들어서려 하는데 호위병들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앰버 궁에 머물 수 있는 것은 황족뿐입니다! 폐하의 허락 없이는……!”
“아니, 우리 백작님께서 쓰러지셨잖아!”
줄리엣의 호위 기사로 따라 나왔던 주드는 맡은 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사람이 쓰러졌는데 무슨 소리야? 모나드 백작님이 잘못되시면 당신이 책임질 겁니까!"
주드는 길길이 날뛰었다.
황궁의 경비병들은 그제야 이 아가씨가 칼라일 공작의 연인이라는 걸 상기했다.
“그, 그럼 빨리 다른 곳으로 옮기면….”
“뭐요? 정신을 잃은 환자를 함부로 옮기면 안 된다는 상식도 모릅니까? 당신이 그러고도 의사야!”
“아니 나는 의사가아니라"
“뭐? 아직도 의사를 안 불렀어?
우리 아가씨가 쓰러지셨는데!”
“그럼 냉큼 의사를 불러와야 할 거 아뇨!”
아주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황후궁까지 거리가 얼만데, 대체 어딜 가라는 겁니까!”
“자자, 진정들 하고. 우선 모나 드 백작을 안으로 모시게!"
공작가 기사들의 성화에 의식을 잃은 줄리엣은 무사히 앰버 궁에 입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파티마와 그녀의 하녀들을 제외한 다른 기사들은 입궁을 거부당했다.
곧이어 하녀들이 황궁의를 부르러 자리를 비웠다.
콰당.
문이 닫히고 빈방 안에는 파티 마와 정신을 잃은 줄리엣 둘만이 남았다.
“.…다, 다들 갔어.”
겁먹은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파티마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네가 말한 대로 했어. 그런데….”
파티마는 침상 위에 축 늘어진 줄리엣을 내버려 두고 창가로 달려가 꼼꼼하게 커튼까지 쳤다.
“저,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거야?”
바깥의 시야를 모두 차단한 파티마가 뒤를 돌아보자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줄리엣이 눈을 반짝 떴다.
"네. 무척 잘하셨어요, 황자비전하."
언제 졸도했었냐는 듯 멀쩡하게 몸을 일으킨 줄리엣은 파티마를 향해 싱긋 웃었다.
*
같은 시각.
“그러니까…… 황자비와 모나드백작이 다투다가 백작이 호수에 빠졌다고?”
알현실에 앉아 있던 황제는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신성한 호수에서 있었던 사고가 황제의 귀에 들어오기까지는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아니, 두 사람이 대체 왜 싸웠다는 건가?”
황제의 질문에 시종장이 난감한 얼굴로 대답했다.
“모나드 백작이 지니고 있던 귀한 목걸이가 없어진 모양입니다.”
“.....…목걸이?"
“예. 백작이 목걸이를 잃어버렸다고 주장했고, 황자비께서는 자신의 하녀들을 의심하는 거냐며 말다툼을 벌이시다가 그만……….”
“까짓 거 목걸이 물어 준다고 하게!”
황제는 벌컥 성질을 냈다.
나이 어린 여인들이 신경전을 벌이는 일에 황실이 휘둘리다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앰버 궁에 황족이 아닌 이들을 들인 건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하오나 폐하, 모나드 백작이 잃어버린 것이…… 선물 받은 다이아몬드 목걸이라고 합니다. 몹시 중요한 물건이라고 고집을 부렸답니다.”
“가지가지 하는군. 경비병들을 보내 찾아 주도록 해라!"
잠시 고민하던 황제는 호통을 을쳤다.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이런 일에 시간을 뺏길수 없었다.
“예, 폐하.”
그러자 경비병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물러났다.
곁에 있던 시종장은 조심스레 황제에게 말을 꺼냈다.
“폐하. 법도가 지엄한데, 허가받지 않은 외부인을 앰버 궁에 들이시는 것은 아니 될……….”
“지금 그게 대수인가? 그냥 모나드 백작이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해!”
짜증 섞인 황제의 말에 시종은다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데 명을 받아 돌아 나가는 것 같던 시종장이 갑자기 다시 황제를 불렀다.
“저…… 폐하."
“이번엔 또 뭐야?”
신경질적으로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본 황제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알현실 입구에 서 있는 한 남자를 알아본 것이다.
문가에 선 검은 머리칼의 남자는 그림에서 튀어나온 양 훤칠한 체격의 미남자였다.
"칼라일 공작이 들었습니다.”
한 박자 늦게 시종장이 고했다.
"고, 공작….”
"황제 폐하.”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그 그림이 지옥의 왕을 그린 것 같다는 점이었지만.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것 같은 냉랭한 목소리로 칼라일 공작이 되물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