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156화 (153/229)

156화.

* * *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이른 새벽.

출입이 통제된 황궁 호수 근처의 앰버 궁에서 모의 작당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비밀스러운 회의의 참석자는 다름아닌 2황자 클로프와 그의 부관 그리고 최근 명성이 자자한 황후의 시녀였다.

2황자 클로프는 잔뜩 들떠 있었다.

“훌륭하네. 정말 모든 게 자네가 말한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어!”

엘리자베스가 알려 준 신기한 연막탄은 놀라운 효과를 발휘했다.

클로프가 할 일이라곤 제국 곳곳에 사람을 보내 연막탄을 퍼뜨리는 것뿐이었다.

각지에서 마수들이 날뛰었고 귀족들은 영지를 방어하느라 정신없었다.

마수들의 난동이 대륙 전체로 퍼지자 클로프는 엘리자베스가 말한대로 했다. 아버지 황제를 찾아가 직접 자신이 이번 사태를 해결하겠노라 말한 것이다.

물론 이 사태의 주모자가 본인이었으므로 그의 행위는 완전범죄였다.

“그보다 제가 말씀드린 조건은 어떻게 됐나요?”

황후의 치료사, 엘리자베스가 나긋나긋한 얼굴로 물었다.

그녀는 2황자에게 칼라일 공작을 무너뜨려 주는 대가로 조건을 하나 내걸었다.

함정을 파서 줄리엣 모나드를 거꾸러트리는 것. 그리고 마수들이 날뛰는 곳 한가운데에 던져 달라고 했던가.

“무, 물론일세.”

꽤나 복잡하고 이상한 조건이었지만 2황자는 기꺼이 그 음모에 동참했다.

"준비는 차질 없이 진행 중이 네. 그 여자는 산 채로 찢겨 죽게 될 거야.”

2황자 클로프는 어쩐지 눈치를 보면서 엘리자베스에게 아첨하듯 말했다.

"잘됐군요.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찾아뵙지요.”

엘리자베스 틸먼은 가벼운 미소와 함께 로브를 쓰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남겨진 2황자와 그의 보좌관은다소 불안한 시선을 교환했다.

“언제 봐도 기분 나쁜 여자입니다.”

"그렇지만 유능하잖나.”

“대체 저 여자는 왜 모나드 백작을 미워하는 걸까요?"

그것은 클로프 역시 궁금한 바였다.

엘리자베스 틸먼은 순식간에 황도 시민들의 인기를 얻었다.

대중 앞에서는 천사 같은 얼굴을 한 여자가 뒤에서는 모나드백작을 사지로 직접 밀어 넣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우리는 우리 일만 하면 되는 거야.”

거기까지 말하던 2황자는 문가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보고 화들짝 소스라쳤다.

“누구냐!”

보좌관이 벌컥 문을 열자 문 앞에서 어슬렁거리던 여자가 움찔했다.

“죄, 죄송합니다. 황자님. 시간이 늦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으셔서 …….”

그녀는 2황자의 아내, 황자비파티마였다.

“쯧. 그러게 귀찮게 왜 돌아다녀서는.”

상대가 파티마라는 것을 알게 된 2황자는 가볍게 혀를 찬 다음 그대로 그녀의 곁을 지나쳐 나가버렸다.

노골적으로 무시당한 파티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새벽마다 2황자가 누굴 만나는지 의아해 뒤를 밟았지만 이런 장면을 목격하게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최근 미모와 치유력을 겸비한 엘리자베스 틸먼과 2황자를 두고 심상치 않은 소문이 돌고 있었다.

애써 무시하려고 노력했지만 파티마는 똑똑히 보고 들었다.

조금 전 엘리자베스 틸먼이 밖으로 나왔고…….

'모나드 백작이라고 했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 *

황궁의 정문을 통과하는 동안 줄리엣은 궁 앞에 구름처럼 몰려든 인파를 볼 수 있었다.

줄리엣을 따라온 기사, 주드 경이 심각한 얼굴로 속닥거렸다.

“굉장하죠? 황도 사람들이 저 여자를 성녀라고 부른답니다.”

몰려든 인파 한가운데에서도 흰옷을 입은 엘리자베스는 단연 눈에 띄었다.

“네, 대단하네요.”

담담히 대꾸하며 줄리엣은 생각했다.

아무리 달리아가 치유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루아침에 저 정도 유명세를 얻는 것은 불가능했다.

'뭔가 작위적인걸.'

소문이 이렇게 빨리 퍼질 리 없다.

게다가 어느새 광장에 천막을 세우고 부상자들을 돌보기 시작한 것이 황실의 뜻이 아니라 어디선가 나타난 천사 같은 ‘엘리자베스 틸먼’의 공으로 둔갑해 있었다.

아무래도 배후에서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퍼뜨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누구지?'

황후의 영향력만으로는 저렇게까지 세력을 키우는 데 한계가 있었을 텐데.

황후를 제외하고, 달리아 가까이 있으면서 그녀와 손을 잡았을만한 인물.

'대체 누굴 포섭한 걸까?'

줄리엣은 몇 가지 의심 인물들의 이름을 떠올려 보았다.

기네스 후작을 이용했던 것처럼, 누구든 달리아에게 이용당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줄리엣은 파티마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세요, 모나드 백작.”

줄리엣을 맞이한 것은 2황자비인 파티마였다.

오늘 그녀는 파티마의 초대로 이곳을 방문했다.

평소 같으면 줄리엣을 향해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했을 파티 마였는데 오늘은 어쩐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무슨 일이지?’

고개를 갸웃하는데 줄리엣과 친한 황궁 시녀 몇몇이 재빨리 눈치채고 귀띔해 주었다.

“조심하세요. 파티마 님의 심기가 별로 좋지 않답니다."

“왜요?”

“그게…….”

황궁 시녀들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와르르 실토했다.

“황후 폐하의 치료사와 2황자 전하의 사이가 심상치 않답니다.”

“2황자님과 치료사가 같은 건물에서 나오는 것을 본 자가 여럿이랍니다.”

'……달리아와 2황자가?' 줄리엣은 눈살을 찌푸렸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조합이었지만 동시에 납득이 갔다.

2황자 클로프는 능력에 비해 지나치게 야심만만한 자였다. 그리고 달리 아는…….

줄리엣이 아는 달리아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욕망을 간파하는 재주가 있었다.

황후와 황자가 협력해 준다면 달리아가 손쉽게 영향력을 키울 수 있었을 것이다.

상황을 납득한 줄리엣은 앞서 가는 2황자비 파티마의 뒷모습을 힐끔거렸다.

결혼식을 올린 지 얼마나 됐다.

고, 2황자 부부의 사이가 냉랭하다는 것은 유명했다.

애초에 2황자 클로프는 재산 하나만을 보고 졸부 집안인 파티마와 결혼을 감행한 것이었다. 그런데 최근 파티마의 친정인 글랜필드가의 사업이 갑자기 기울었다.

어린 시절의 동화들은 착한 마음씨를 가진 아가씨가 왕자님과 결혼하면서 끝이 나지만 현실은 동화가 아닌 것이다.

사이가 단단히 틀어져 버린 어린 시절의 친구였지만 줄리엣은 풀죽은 파티마를 보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귀빈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침울한 얼굴의 파티마가 줄리엣을 호숫가로 인도했다.

황궁 내에는 자그마한 호수가 있는데 제국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붉게 물들어 재앙을 경고하는 신성한 호수였다.

지금은 붉지는 않았지만 오묘한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마수들이 날뛰는 바람에 사람들이 많이 다쳤기 때문일까?'

재앙을 예고한다더니.

신기한 듯 호수를 들여다보던 줄리엣은 작은 조각배에 올라탔다.

조각배는 금세 호수 한가운데의 인공 구조물에 도착했다.

아름다운 돔 지붕을 얹은 가제보였다.

돔 지붕 아래에는 원탁이 놓여 있었다. 원탁 주변으로 사제복을 입은 성직자들과 호위인 듯한 팔라딘이 서 있었다.

줄리엣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줄리엣이 도착했는데도 아무도 그녀에게 법황을 소개해 주지 않았다.

줄리엣을 안내해 온 파티마마저 무슨 지시라도 받은 듯 입을 꾹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줄리엣은 똑같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사제들 틈에서 법황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줄리엣은 다른 사제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장 가장 구석 자리에 앉은 노부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무릎을 굽혀 예를 표했다.

“법황 성하.”

그녀가 가장 수수한 차림새의 노인 앞에 멈춰 서자, 지켜보던 사람들은 적잖이 놀란 듯 수군거렸다.

아무래도 입을 닫고 있었던 것은 그녀를 시험해 보려는 의도였던 것 같았다. 하지만 애초에 무의미한 시험이었다.

“줄리엣 양.”

백발에 가까운 회색 머리칼을 가진 노부인이 줄리엣을 보고 부드럽게 미소했다.

“오랜만이오.”

노부인의 이름은 힐데가르트로, 줄리엣과는 이전에 루체른에서부터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가짜 법황이었던 제바스티안이 축출되고 난 뒤, 선대 법황이었던 힐데가르트가 다시 법황위에 오른 것이다.

"네, 강녕하셨어요?”

힐데가르트는 보란 듯 싱글거리며 다른 사제들에게 물러가라는 듯 손짓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비키자, 작은 가제보 아래에는 줄리엣과 법황 그리고 법황의 호위한 사람만 남았다.

줄리엣이 법황의 옆자리에 앉자 그녀가 쯧쯧 혀를 찼다.

“그래, 큰 소동이 있었다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법황이 은밀히 속삭였다.

“보내 준 반지는 도움이 되었소?”

"네, 무척요.”

줄리엣은 옷깃 틈에 숨겨 온 반지를 내밀었다.

그것은 길리엄 추기경이 줄리엣에게 전해 주었던 어부의 반지였다. 광장에서 뱀과 마주친 다음 날 힘을 다 썼기 때문인지 검게 변색되어 버렸지만.

줄리엣은 내내 이 어부의 반지 덕분에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했다.

분명, 그 뱀이 줄리엣에게 달려 들던 순간에 불꽃이 튀었었다.

원리는 모르지만 신성한 성유물이니까 그 정체 모를 뱀에게도 통한 게 아닐까?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오."

힐데가르트는 검게 변한 반지를 보고도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줄리엣은 그녀가 아무래도 이런 사태가 벌어질 것을 알고 있었을 거라 짐작했다.

"왜 저한테 그걸 보내셨어요?"

줄리엣은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별 이유는 없었소. 그저 성유물로 물리칠 수 있는 것은 악령이니, 은혜 갚음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

애매한 답변이었다.

"악령이 요……."

어쨌든 법황이 줄리엣의 목숨을 한 번 구해 준 것은 사실이었다.

그 틈을 노려서 뱀에게서 도망칠수 있었고 말이다.

'그러면 또 그 뱀이 다시 찾아올 때를 대비해서 성유물을 구비해 놓기라도 해야 하나?'

조용히 생각하던 줄리엣이 물었다.

“법황 성하, 신전에는 악령에 대한 자료도 잔뜩 있겠죠?”

“그렇소만. 왜?”

“그러면 노란 뱀 모습을 한 악령에 대한 기록도 있나요?"

“노란 뱀?”

힐데가르트는 조그마한 눈으로 줄리엣을 쳐다보았다. 재미있다는 듯한 시선이었다.

"갑자기 뱀은 왜 궁금하오?”

줄리엣은 머뭇거리다가 애매하게 말했다.

“실은 어부의 반지를 그렇게 만든 게 아무래도 그 뱀 같아서요.”

“그렇소?”

힐데가르트 법황은 생글생글 웃었다.

"듣자 하니, 아가씨가…….”

“모나드 백작이요.”

줄리엣이 무뚝뚝하게 정정하자 힐데가르트가 재미있단 듯 싱긋 웃었다.

법황을 호위하는 팔라딘, 즉 신성 기사는 줄리엣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신전의 수장이자 존경받는 법황, 힐데가르트를 옆집 할머니 대하듯 하는 줄리엣이 무례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래, 모나드 백작이 고맙게도 선뜻 거금을 내놓았다 들었소.”

줄리엣은 애매한 미소로 답했다. 그녀는 아직까지 누가 그녀의 이름으로 그런 기부금을 내놓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레녹스는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눈치를 보아하니 그가 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허면 그것을 포상으로 받겠소?”

“포상이요?”

그러고 보니 애초 법황에게 초대된 목적이 그것임을 깜빡 잊고 있었다.

“애초 나는 제노비아의 소울스톤을 돌려받지 않는 것을 포상으로 하려고 했소만."

“그건 별개죠. 저는 성하의 생명의 은인이잖아요."

줄리엣이 뻔뻔하게 대꾸하자 힐데가르트 법황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좋소. 내 백작이 원하는 것을 보내 주리다.”

그런데 힐데가르트가 일어나려던 줄리엣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아가씨, 아니. 모나드 백작.”

줄리엣은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자그마한 노부인의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악력이었다.

“제바스티안이 백작의 안부를 물었소.”

제바스티안?

“그 사기꾼이요?"

줄리엣이 미간을 찌푸렸다.

완전히 미쳐버린 다음, 루체른의 지하 감옥에 감금됐다고 들었는데.

“그 애도 불쌍한 아이라오."

“불쌍하긴 무슨.”

제바스티안은 완전히 미친놈이었다. 그의 죽은 누나, 제노비아와 줄리엣이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줄리엣을 납치하지 않았던가.

험한 꼴을 겪었던 줄리엣은 그를 동정할 만한 호의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하는 힐데가르트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전에 제바스티안이 이상한 이야기를 했소.”

“무슨 얘기요?”

“가을이 오기 전에 장례식 준비를 해야 하니, 제노비아가 좋아하는 꽃을 마련해 달라고."

순간 줄리엣은 대답할 말을 잃었다.

제바스티안은 줄리엣을 줄곧 제 노비아라고 불렀다. 죽은 누이를 꼭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런데 장례식을 준비해야 한다고?

‘마치 내가 곧 죽을 것 같다는 말로 들리는데.’

웃어넘기려고 했지만 어쩐지 목덜미가 섬뜩했다.

“…그게 다였나요?"

“그렇소. 부디 몸을 조심하시오.”

줄리엣은 애써 싱긋 웃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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