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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155화 (152/229)

155화.

"말씀하시죠.”

“자네 집안에 전해지는 그 몹쓸저주 말이야, 줄리엣도 알고 있나?”

리오넬 르바탄은 날씨 이야기를 하듯 담담히 물었다.

레녹스는 적왕이 동부로 급히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런 순간이 올 것임을 직감했었다.

리오넬 르바탄은 레녹스의 침묵으로 충분한 답변이 됐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늙은이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이야기지. 왜 좀처럼 떠올리지 못했나 싶더군.”

동부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이 노련한 왕은 어디서 답을 구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칼라일 공작가는 언제나 흉흉한 소문에 시달렸다.

사람의 피를 마신다든가 태어난 후계자가 마뜩찮으면 내다 버린다든가 하는 터무니없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리오넬 르바탄은 그 소문들 틈에 진실이 숨어 있음을 간파한 현명한 노인이었다.

“저번에 줄리엣 녀석이 불쑥 악마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래서 문득 생각이 나더군. 공작가에 평탄한 승계가 이어진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게.”

리오넬 르바탄은 이미 모든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리고 그거, 자네 집안에 붙어 있다는 그 저주와 관련된 일이지. 아니 그런가?"

“……줄리엣을 위험하게 하지 않을 겁니다.”

레녹스가 내놓을 수 있는 답은 그것뿐이었다.

“아니지, 내가 듣고 싶은 답은 그게 아닐세.”

리오넬 르바탄은 고개를 저었다.

“이보게 칼라일 공, 이 힘없는 늙은이가 욕심이 뭐 있겠나? 나는 그저 그 애가 마음 놓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것뿐이야."

체격이 장대한 리오넬 르바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쓸쓸하게 들렸다.

“무시당하거나 경멸받지 않고, 누구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그게 자네에겐 별것 아닐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중요하다네.”

그건 레녹스에게도 중요했다.

감히 가당치도 않은 것들이 줄리엣을 넘보지 못하게 하겠노라고, 그는 맹세했었다.

그러나 레녹스는 차마 비통한 표정으로 심정을 토로하는 리오넬 르바탄의 앞에서 자신이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7년 동안 붙잡아 두기만 하고 결혼조차 해 줄 수 없는 놈팡이는 마음에 안 들어.”

"......."

“바닥을 기면서 받들어 모셔도 아까울 판에, 어디 남의 집 귀한 손녀를.”

한껏 눈썹을 늘어뜨린, 짐짓 슬픔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리오넬르바탄이 본심을 노골적으로 내비쳤다.

“누가 얼어 죽을 북부 핏줄 아니랄까 봐. 우리 애가 대체 뭐가 아쉬워서 그런 춥고 험한 데 가서 서 고생을 시키나, 고생을. 떼잉!”

리오넬 르바탄은 이제 불쌍한 척도 하지 않았다.

“자고로 손녀 사윗감은 고분고 분 말 잘 듣고 조신한 놈이 제일…….”

노골적인 불만을 묵묵히 듣고 있던 레녹스가 차분히 말을 끊었다.

“그러면 그것도 아시겠군요.”

“무엇을?”

“제가 줄리엣에게 청혼한 것 말입니다.”

“....… 뭘, 했다고?"

잠시뿐이었지만 레녹스는 똑똑히 보았다. 시종일관 여유가 넘치던 리오넬 르바탄의 이마에 힘줄이 솟는 것을.

레녹스는 싱긋 웃더니 나긋나긋하게 덧붙였다.

“예, 두 번 청혼했습니다.”

"아니, 누구 마음대로!”

리오넬 르바탄이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조금 전의 말과는 꽤나 앞뒤가 다른 반응이었다.

레녹스는 붉으락푸르락하는 리오넬 르바탄의 반응을 지켜보다가 느긋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거절당했습니다.”

“..… 거절해?”

“예, 두 번 다 거절당했습니다.”

그것도 보기 좋게.

레녹스는 빙긋 웃었다.

뭐든 해 주겠다고 매달렸으나 줄리엣은 그와의 결혼을 원치 않는다고 거듭 말했었다.

“흥. 그것 참 안됐군.”

리오넬은 분노를 금방 가라앉히고 도로 자리에 앉았다. 말과는 달리 고소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분위기는 한결 누그러졌다.

손녀딸을 데려간 이 몹쓸 놈이 못마땅한 것은 여전했으나 그들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유대감이 있었다.

줄리엣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긴다는 공통점 말이다.

“그래서 우리 애를 울렸나?"

그 말에 레녹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건 리오넬 르바탄이 기대했던 그대로의 반응이었으며, 동시에 처음으로 레녹스 칼라일이 제 나이다워 보이는 순간이었다.

리오넬 르바탄은 어쩐지 통쾌해졌다.

'새파랗게 젊고 시건방진 놈이.

나이답지 않게 유들유들하더니.'

처음으로 평정을 깨뜨린 걸 보면 저 괘씸한 도둑놈이 마음이 있긴 있구나 싶어 리오넬 르바탄은 속으로 입을 비죽였다.

“솔직히 말하지, 공작. 나는 자네가 마음에 안 들어."

리오넬 르바탄은 위엄 있게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네가 대체 무슨 수로 줄리엣을 곁에 붙잡아 놨는지도 모르겠네.”

“… 그건 저와 줄리엣 사이의 약조입니다.”

"뭐, 그건 아무래도 좋아. 사실 내가 그렇게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은 아닐세.”

리오넬 르바탄은 마주 선 공작의 어깨를 두드렸다.

“다만 이것 하나만은 명심하게나. 한 번만 더 우리 애를 울리거나 위험하게 만들면…….”

멀리서 보면 짐짓 다정한 조손처럼 보이는 광경이었지만 오가는 말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는 각오해야 할 걸세.”

리오넬 르바탄을 물끄러미 마주보던 레녹스는 싱긋 웃었다.

“새겨듣겠습니다.”

리오넬은 의미심장한 경고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아, 그리고 줄리엣에게 내가 왔었다는 얘기는 하지 말게."

리오넬 르바탄이 떠나고 나서 한참 동안 레녹스는 그 응접실을 떠나지 못했다.

바깥에서 마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려오고, 간발의 차이로 또다시 누군가 저택으로 돌아오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그는 홀로 응접실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윽고 응접실로 다가오는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그 발걸음의 주인을 기다리며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그의 평생에 가장 익숙지 않은 일이었다.

하물며 고작 인기척만으로 그를 안달 나게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전하.”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가능하게 만든 여자가 앞에 서 있었다.

“여기 계셨어요?”

외출에서 돌아온 줄리엣은 차분한 감청색 드레스 차림이었다.

품에는 커다란 검은 고양이 같은 아기 용을 안고서.

“손님이 오셨었나요?"

응접실에 남은 손님의 흔적을 보고 줄리엣이 말했다.

“그래.”

“전하, 여쭤보고 싶은 일이 있어요.”

대수롭지 않게 넘긴 줄리엣은 용건을 꺼내 놓았다. 그녀의 이름으로 어마어마한 액수의 기부 금을 내놓은 것이 누구인지 도통알 수 없었다.

“혹시 전하가 하신 일인가요?"

레녹스는 그제야 깨달았다.

리오넬 르바탄이 말한 '손녀의 명예'는 이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레녹스는 줄리엣의 이름으로 거 액의 기부금을 내놓은 것은 리오넬의 소행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자신이 온 것을 비밀로 해 달라던 그의 당부를 떠올리며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듣고 계세요?"

“..…그래.”

레녹스 칼라일은 평생 궁금해해본 적 없었던 일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었다.

어떤 여자에게 청혼한다는 것은 그녀의 가족과 세상을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가족과 친척들. 다소 극성맞지만 애정 어린 걱정과 참견까지.

문득 그는 줄리엣이 그의 청혼을 거절한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리오넬 르바탄의지적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저한테 하실 말씀 없으세요?”

의심스럽다는 듯 줄리엣이 물었다.

“있어.”

대답과 함께 레녹스는 다가온 줄리엣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줄리엣은 움찔했지만 그를 밀어 내지는 않았다.

“!"

잠에서 깨어난 새끼 용이 짜증스럽게 울면서 바닥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줄리엣.”

“네.”

"내가 너를 처음 봤을 때 말이야.”

이번 생에 그들이 처음 만났을때.

검은 상복을 입고 표정 없는 얼굴로 창백한 독기를 뿜어내던 줄리엣을 그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는 이제 알수 있었다.

그때 그가 줄리엣에게 손을 내밀었던 것은, 기댈 데 없고 의지할 곳 없는 그 쓸쓸함에 마음이 끌렸던 것이다.

레녹스는 자신이 뭘 바랐던 것인지 깨달았다.

그는 줄리엣에게 가족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눈이 먼 사람에게 무지개가 무슨 빛깔인지 설명할 수 없다.

부모의 애정을 받아 본 적도 없고 정상적인 가족과 울타리가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그런 것을 줄리엣에게 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줄리엣은 더 이상 그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가족까지 생겼으니 그가 줄 수 있다고 매달리는 일에 연연하지 않는 게 당연하다.

돌이켜보면 그의 애정은 언제나 얄팍하고 초라했다.

값비싼 패물이나 재산을 안겨주고 이번에야말로 웃어 주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그녀의 주변을 맴도는 것만이 그가 애정을 기대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줄리엣의 웃음을 사기에 한없이 모자랐다.

“왜요?”

“……아무것도.”

하고 싶은 말은 언제나 차고 넘쳤다.

가지 마.

평생 옆에 있어.

그러나 하나같이 입 밖으로 낼수 없는 말들뿐이었다.

그의 내면에는 아직도 탐욕스럽게 애정을 갈구하는 교활한 어린애가 존재했다.

욕심과 아집으로 붙잡고 있지만, 약속한 기간이 지나면 줄리 엣은 그를 버릴 터였다.

줄리엣은 그에게는 과분했고, 탐욕스럽게 그러쥐고 놓지 못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그였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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