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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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적으로 보고를 마친 줄리엣은 빠른 걸음으로 대회의장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황궁 바로 앞에 늘어선 인파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치료사님!”
“치료사님이 여기 계신다고 들었어요!”
황궁 앞에는 못 보던 흰 천막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줄리엣이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밀란 경이 조심스레 귀띔해 줬다.
“황후의 시녀가 치유력으로 다친 사람들을 구원하고 다닌다더군요.”
줄리엣은 담담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큰 사고가 있었을 때 황궁 앞에 사람들을 진료하기 위한 임시 시설을 설치하는 것이야 흔히 있는 일이다.
황궁 앞의 천막 아래, 제국 각지에서 파견된 의료진들이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리고 무채색 옷을 입은 의료진들 가운데 흰 옷을 입고 긴 금발을 늘어뜨린 채 분주히 돌아다니는 여자는 유달리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달리아 아니, 황후의 치료사인 엘리자베스였다.
“치료사님!”
"엘리자베스 님! 저희 아이 먼저 돌봐 주세요!"
다친 아이를 안은 부모들이 그녀를 향해 달려와 간청했다.
"이봐, 줄을 지키라고!”
물론 황궁의 경비병들에 가로막혀 엘리자베스에게 가까이 가지도 못했지만.
“그러지 마세요!”
팔을 걷어붙인 엘리자베스가 달려와 호되게 경비병을 꾸짖었다.
“불쌍한 사람들에게 무슨 짓인가요!”
“하지만 질서가 흐트러지면 더 큰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치료사님.”
"괜찮으니 그냥 두세요!"
"고, 고맙습니다.”
“자아, 제 손을 잡으세요.”
사람들에게 손을 내민 엘리자베스는 천사처럼 웃어 보였다.
“모두 걱정 마세요. 나눠 드릴 약과 의료품은 충분하니까요.”
사람들은 그 광경에 감동 받은 듯 했다.
“친절하신 분……….”
“저런 분이야말로 살아 있는 성녀가 아닐까?”
그러나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줄리엣의 눈매는 가늘어졌다.
‘…… 그때와 똑같아.'
과거에도 달리 아는 신성한 치유력을 사용할 수 있는 축복받은 존재라고 추앙받았다.
적어도 줄리엣은 그렇게 기억했다.
그러나 달리아가 그 보관이고 자신의 기억이 왜곡됐을 가능성이 있다면, 과거의 기억 중 무엇을 믿어야 하고 믿지 말아야 할 할지도 전부 의심해 봐야 했다.
'하지만 왜 약을 주는 거지?'
줄리엣은 신전의 본거지인 루체 른에서 치료 사제들을 직접 보았다.
치료 사제들의 치유력은 귀한 능력이긴 했지만 그들은 저렇게, 번거롭게 약을 쓰거나 하진 않았다.
번쩍하는 빛과 함께 눈 깜짝할 새 상처를 아물게 했었는데.
"저…… 아가씨.”
밀란 경이 뒤에서 조심스레 줄리엣을 불렀다.
밀란이 곁눈질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조금 떨어진 곳에 황후를 비롯한 몇몇 귀부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줄리엣은 노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황후와 눈이 마주쳤 쳤다.
줄리엣은 공손히 인사를 했으나 황후는 홱 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흠!”
황후는 아직도 자신의 앞에서 엘리자베스와 다툰 줄리엣을 용서하지 않은 듯, 그녀를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줄리엣을 발견한 황후의 측근 시녀들이 마치 들으란 듯 떠들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 양이 저렇게 열심히 일하니, 황후 폐하께서도 자랑스러우시겠어요.”
“그럼요, 그럼요. 엘리자베스 양의 선행이 알려질수록 황후 폐하의 명성도 높아지겠지요.”
“이게 다 엘리자베스 양의 재능을 알아보고 데려오신 황후 폐하의 드높은 안목 덕분 아니겠어요?”
“자고로 위기의 순간에 재능이 빛나는 법이지요.”
“신전에서도 크게 치하하고 있다 들었답니다.”
“법황께서 이번 사고에서 가장 큰 도움이 된 사람에게 직접 포상을 내리신다던 걸요?"
"어머, 그렇다면 그 포상은 당연히 엘리자베스 양의 차지겠네요.”
"네. 그리고 엘리자베스 양은 응당 그 공을 황후 폐하께 돌리겠지요.”
황후는 흐뭇하게 웃고 있었고, 줄리엣은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으십니까?”
“네. 그만 가요.”
줄리엣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포상이고 뭐고 줄리엣과는 관계 없는 일이었다. 달리아의 명성이 높아지든 말든 그녀가 알 바 아니었다.
게다가 바구니 안에서 갑갑한 듯 닉스가 뒤척이고 있어서 서둘러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누군가 줄리엣의 앞을 가로막았다.
“모나드 백작님!"
저쪽 끝에서 누군가 반색을 하며 달려왔던 것이다.
“여기 계셨군요!"
뒤따르는 사람을 잔뜩 달고 나타난 사람은 화려하게 차려입은 수도의 대신관이었다.
뭐야?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대신관의 말은 더욱 의아했다.
“저희는 감읍했습니다. 부상자들을 위해 그렇게 큰 금액의 기부 금을 내놓으시다니요!”
줄리엣은 굳이 고개를 들지 않고도 황후와 그 측근들이 얼마나 경악했는지 알 수 있었다. 쏟아지는 시선 때문에 목덜미가 따끔거렸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가장 어리둥절한 것은 다름 아닌 줄리엣이었다.
“누가요? 제가요?”
“그렇습니다! 이야, 과연 명문가의 가주다운 마음 쓰임이십니다!"
대신관이 워낙 호들갑을 떨어 대는 통에 진료소 앞에 줄지어 서 있는 시민들은 물론이고 엘리자베스조차 그녀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필시 제도의 시민들도 모두 백작님의 선행을 칭송할 겁니다!”
그러나 정작 줄리엣은 아직도 의아했다.
설마, 레녹스가 한 것일까?
줄리엣은 공작가의 기사인 밀란과 시선을 교환했지만 밀란 역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줄리엣이 황궁에서 당혹스러운 상황을 마주하고 있던 그 무렵, 레녹스는 가신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충실한 비서가 급히 달려와 그를 찾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뜻이다.
“전하, 별채에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레녹스는 잠시 들여다보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별채에 그가 볼일이라곤 하나뿐이었다.
별채는 줄리엣이 머무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줄리엣은 황궁에 가고 없었다.
대회의에 잠시 보고하러 간 것 뿐이라 크게 걱정하진 않았는데 무슨 일이지?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줄리엣에게 무슨 일 있나?”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돌려보내."
그러나 공작의 비서는 물러가지 않았다.
“그, 그게……. 만나 보셔야 할것 같습니다, 전하."
공작저에 손님이 오는 것은 별달리 특별할 것 없는 일이다.
그러나 레녹스는 방문객의 소식을 알리는 비서의 태도가 부자연스럽다고 느꼈다.
"일단 응접실로 모셨습니다.”
어딘지 어색한 비서의 말에 칼라일 공작은 우선 별채로 걸음을 옮겼다.
"아, 어서 오게.”
그리고 그는 응접실에 들어서는 순간, 비서가 그토록 절절맸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응접실 한쪽에서는 벽난로가 타닥타닥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의 안락의자에는 여유 넘치는 자세로 기대앉은 붉은 머리의 노인이 하나 앉아 있었다.
“앉지 그러나?"
자신의 집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리를 권하는 노인에게는 흉내내기 어려운 관록이 흘러넘쳤다.
그가 맞은편 자리에 앉자 노인이 여유롭게 잔을 들어 보였다.
“좋은 술이군.”
칼라일 공작에게 이렇게 스스럼없이 하대할 수 있는 이는 몇 없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나?"
“예.”
레녹스는 담담히 긍정했다.
기실, 몇 번인가 마주칠 기회는 있었으나 직접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기네스 후작을 감옥에 잡아 가뒀을 때 줄리엣은 그에게 부탁했었다.
"후작의 목숨을 끊는 건,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셨으면 해요.”
그 다른 사람이란 것이 바로 그녀의 외조부인 리오넬 르바탄이었다.
기네스 후작은 줄리엣에게는 부모의 원수였다. 그리고 리오넬르바탄에게는 딸과 사위를 죽인 원수이기도 했다.
줄리엣은 자신의 원한보다 조부에게 복수의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줄리엣에게는 한 번도 이야기한 적 없지만, 레녹스는 지금까지 리오넬 르바탄의 행적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무슨 일로 예까지 걸음 하셨습니까?”
“겸사겸사. 내 손녀의 명예를 살려 줄까 싶어서."
레녹스는 그 알 듯 모를 듯한 말에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나 리오넬 르바탄은 짐짓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쳐다봐도 안 가르쳐 줄걸세.”
“약 오르지?”
표정은 인자한데 나오는 말은 꽤나 유치했다.
“그래, 내가 뭘 좀 알아볼 게 있어서 자리를 비웠었는데 말이야. 자네한테 직접 확인할 게 있어서 왔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