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153화 (150/229)

153화.

레녹스 칼라일은 잠시 집안의 의비밀에 대해 생각했다.

공작가에 전해지는 보관은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되는 위험한 물건이었다. 사람의 정신을 흘리고, 기억을 왜곡해서 종국에는 미치게 만드는.

레녹스는 줄리엣의 손을 끌어다 그 끝에 입을 맞췄다.

“……하지만 달리아가 너의 기억을 혼란시켰다고 한들, 이제와서 네가 겪었던 일이 없던 일이 되지는 않겠지.”

"너무 멀리, 돌아온 것 같아요.”

줄리엣의 말대로였다.

돌이키기에는 이미 모든 것이 엉망으로 엉켜 있었다.

달리아 때문에 기억이 왜곡되었다고 한들, 그래서 레녹스가 실제로 줄리엣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진다고 한들 무슨 소용 일까.

그는 줄리엣이 스스로 독배를 마시게 한 과거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사람의 정신을 혼란시키다니.'

한편, 줄리엣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차라리 그 여자가 진짜 칼라일공작의 운명의 상대이고, 그 자리를 탐냈다는 것 때문에 줄리엣에게 원한을 갖고 있다는 것이 훨씬 나았다.

문득, 엘리자베스 틸먼이 줄리 엣에게 그녀의 가족들을 들먹이던 것이 떠올랐다.

그건 명백한 협박이었다.

만약 그것이 인간의 기억을 혼란시키는 힘을 가진 존재라면 더욱 위험했다.

‘하지만 왜?

“달리아가 이 티아라의 이름이라면, 그 여자는 대체 뭐죠?”

그리고 대체 왜 이토록 집요하게 그들을 괴롭히는 걸까?

줄리엣은 고개를 들어 그녀의 의연인에게 물었다.

레녹스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줄리엣이 그 질문을 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건 직접 보게 될 거야.”

* * *

줄리엣은 그 후로 며칠 동안이나 레녹스가 말한 '직접 보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뭔가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만은 짐작했다.

“대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대회의는 공작가, 후작가, 백작가 등 3작위 중에서도 유서 깊은 가문들을 대상으로 소집되는 황실 회의였다.

폭주한 마수들이 수도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이후로 황궁에서 긴급회의가 이어지고 있었다.

"모나드 백작은 소집에 응하십시오.”

황제의 사자가 줄리엣을 찾아온 것은 이튿날 아침이었다.

황궁으로 와서 각 가문이 입은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보고하라는 명이었다.

어차피 모나드 백작가는 가세가 기운 지 오래라 가진 거라곤 손바닥만 한 땅 조금이 전부였다.

보고할 피해도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얼굴을 비추긴 해야 했다.

이럴 때는 가진 게 없다는 것이 참 좋다.

줄리엣은 차분한 감청색 예복을 골라 입고 단정히 하나로 틀어 올린 머리에 베일이 달린 모자를 쓰는 것으로 외출 준비를 마쳤다.

레녹스는 외출하는 줄리엣을 보고도 공작가의 기사 하나를 호위로 내줬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마차가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동안 줄리엣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전날까지만 해도 들떠 있던 축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부서진 건물들을 복구하려면 한참 걸릴 것 같았다.

사태는 진정된 것이 아니라 점점 번져 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즉, 마수들이 대륙 전역에서 폭주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원인으로 수상한 연막탄이 발견되었거든요.”

줄리엣의 호위를 맡은 밀란 경이 곁에서 소곤소곤 일러 주었다.

“연막탄이요?”

“예.”

줄리엣은 광장에서 보았던 장면 들을 떠올렸다.

확실히 알 수 없는 회색 연기가 퍼지고 난 후부터 마수들이 미친듯이 날뛰기는 했었다.

'대체 정체가 뭐지?'

“아, 클로프 황자가 대책 기구를 설치하고 진상을 파악하고 있답니다.”

"2황자가요? 의외네요.”

"예, 꽤나 수상하죠.”

줄리엣이 떨떠름하게 말하자 밀란 경이 씩 웃으며 거들었다.

“한번 알아볼까요?"

줄리엣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당장 급한 일부터 하죠.”

줄리엣은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위험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공작가의 단속을 일렀다.

북부에 있을 때, 마수가 자주 출몰할 때마다 했던 일이라 밀란과 줄리엣은 호흡이 잘 맞았다.

“북부는 괜찮을까요?"

북부의 공작성이 걱정되어 묻자 밀란 경이 의미심장하게 씩 웃었다.

“그건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하기야. 북부는 역사적으로 마수 출몰이 가장 잦은 지역이었다. 북부 사람들보다 대마물 전투에 대비가 잘 되어 있는 사람들도 없겠지.

줄리엣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아가씨, 기억 안 나십니까?”

“뭐가요?”

“엊그제 광장에서 말입니다"

밀란은 줄리엣을 발견했을 때의 광경을 떠올렸다.

'그때 분명 마수들이…….' 사방으로 날뛰던 마수들이 일순간 잠잠해지던 순간이 있었다.

심지어 줄리엣이 있던 허물어진 건물을 향해 무릎을 꿇기까지 했다.

그녀가 자리를 떠난 순간, 다시 날뛰기 시작한 것을 생각한다면 기묘한 일이었다.

“네?”

그러나 줄리엣은 그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밀란 경은 말을 주워 삼켰다.

“뭐예요. 싱겁기는."

줄리엣은 가볍게 웃곤 회의장으로 향했다.

대회의라고 해도 이름만큼 대단하지 않았다.

중앙 귀족들을 제외하면 피해 사실을 보고하러 온 각 가문 사람들이 잠시 들렀을 뿐이니까.

게다가 칼라일 공작가처럼 광활한 영지를 가진 대귀족들은 대부 분 대리인을 보냈다.

다들 자기 영지에서도 마수가 난동을 부리진 않나 살피기 바쁜 모양이었다.

그렇다 보니 분위기는 사무적이었다. 각 귀족들은 자신들의 영지의 피해 상황을 보고했고, 당장 피해를 입은 시설물들을 어떻게 복구할 것인지 논의했다.

황제의 당부도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요란스러운 행사를 삼가고, 당분간 구호 활동에 전념할 것.

“그래, 누가 복구 활동을 돕겠나?”

황제가 묻자 마지못해 모인 귀족들은 반강제로 지원을 약속했다.

“저희는 구호 자금을 내놓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필요한 면직 물품들을 지원하도록 하지요.”

그러나 반강제로 구호금을 내놓는 것마저 부유한 귀족들의 몫이었다.

모나드 백작가처럼 규모가 작은 가문들은 황제와 독대하지도 않았다.

하물며 과거에 양녀 얘기를 거절한 이후, 줄리엣은 황제와 직접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대신 황궁의 관리가 돌아다니면 묻고 기록했다.

서 직접 피해 규모를 차례대로 줄리엣은 자기 차례를 기다리면서 모나드 백작가 앞으로 온 소집장의 글귀를 들여다보았다.

[가장 친애하는 벗, 수호자 모나 드.]

제국의 초대 황제, 에른스트 대제는 모나드 백작가에 그런 이름을 내려 주었다.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 줄리엣 역시 궁금해 했던 기억이 있었다.

개국공신 가문들이 대부분 기사 가문인 것에 비해 모나드 백작가는 그 활약상이 비교적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은 가문이었다.

하지만 줄리엣은 은 열쇠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열쇠가 가두고 있던 나비들.

만약 초대 모나드 백작 역시 정령사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고 나비들을 가둔 공을 세웠던 것이라면?

그래서 스노우드롭이라는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이라면 이해가 갔다.

그리고 검은 표범이 말하기를, 이름은 악령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약점이라고 했었다.

'이름이 알려지는 게 그렇게 큰 일인가?'

“줄리엣 아가씨.”

"누구…… 에셀리드?”

뒤에서 누가 불쑥 부르는 바람에 생각에 빠져 있던 줄리엣은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상단의 마법사, 에셀리드가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손에는 눈에 띄게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여기서 뭐 해요?

묻는 것과 동시에 줄리엣은 에셀리드가 어울리지도 않는 기사 복장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게다가 무식한 크기의 바구니는 뭐란 말인가? 뭔진 몰라도 엄청난 게 들어있는 게 분명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급히 아가씨를 만나려면."

에셀리드가 투덜거렸지만 줄리 엣은 황당해졌다.

그럼 차라리 공작가로 찾아오면 될 거 아냐?

눈에 띄는 바구니를 들고올거면 변장은 왜 했는데?

지적하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줄리엣은 얼결에 그가 내민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

상상 이상의 무게에 줄리엣은 휘청했다.

그리고 그녀가 휘청하는 순간, 익숙한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삐약!”

“......?"

어쩐지 수상하게 들썩인다 싶더니.

줄리엣은 커다란 바구니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닉스를 데려오면 어떡해요?"

줄리엣이 소곤거리며 타박했다.

에셀리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명령받은 대로 했을 뿐입니다. 아가씨가 위험하시대서."

에셀리드는 새끼 용이 살아 있는 부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명령? 누가요?”

“누구겠습니까? 칼라일 공작이 죠.”

'레녹스가?' 언제부터 둘이 아는 사이였는데?

줄리엣은 점점 더 의아했지만 에셀리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광장에 계셨다면서요?”

그 말을 듣자 줄리엣은 문득 그에게 상의할 일이 떠올랐다.

“에셀.”

“예?”

"나 뱀을 봤어요.”

“…… 뱀이요?”

줄리엣은 최근 겪었던 일을 하나씩 들려주었다.

광장에서 돌로레스의 탈을 뒤집어 쓴 기이한 존재를 만난 일.

“저는 그게 뱀이라고 생각해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왜냐면, 최근에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간밤에 골몰하던 줄리엣은 뱀이야기를 또 누구로부터 들었는지 기억해 냈다. 잠시 남부에 갔을 때 마주친 기사가 해 줬던 이야기였다.

'이름이 제롬이었나?'

그 기사가 들려 준 바에 따르면, 그의 동료가 노란 뱀 악령에게 잡아먹혔다고 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훌리 오라는 남자가 사막에서 목격됐다고 했어요.”

에셀리드는 그녀의 설명을 진지하게 경청했다.

“그러니까 아가씨 말씀은, 그 뱀 악령이 사람을 잡아먹고 그 겉모습을 흉내 내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그 말씀이십니까?"

"네. 그리고 그 뱀이 아마 제가 광장에서 마주친 뱀과 같은 존재같아요.”

이번에는 돌로레스를 잡아먹고 그녀의 겉가죽을 뒤집어 쓴 것처럼.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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