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
상상력이 풍부한 어린아이들이 흔히 그렇듯, 이따금 줄리엣은 생생한 꿈에 시달렸다.
그녀가 직접 본 것처럼 선명한 꿈이었다. 행복하다기보다는 대개 악몽이었지만.
[서둘러!]
얼굴도 모르는 어느 중년의 부부가 낯익은 복도를 내달리고 있었다.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부부는 품 안에 뭔가를 끌어안고 있었다. 강보 안에 싸인 것은 천사같은 얼굴을 한, 금발의 작은 여자아이였다.
아이는 잠든 듯 미동도 없이 가만히 안겨 있었다.
[지금 도망가야 해!]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줄리엣은 이미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북부의 공작성에서 일했다는 프란 부부였다.
정신없이 도망치던 중, 아내가 남편을 붙잡았다.
[여보, 정말 이래도 괜찮을까요?]
[여기까지 와서 멍청한 소리 하지 마! 이게 어떤 물건인지 몰라서 그래?]
남편 쪽이 버럭 화를 냈다.
횃불 아래에서 탐욕스러운 눈이 어딘지 부자연스럽게 번뜩였다.
마치 뭔가에 씐 사람처럼.
[‘이것’만 있으면 우리는 큰 부자가 될 거라고!]
[아, 알겠어요…….]
그들은 다시 바삐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줄리엣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남편이 몸을 돌렸을 때, 그는 더 이상 금발의 여자아이를 안고 있지 않았다.
그가 강보로 둘둘 말아 끌어안고 있는 그것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반짝이는 금관이었다.
줄리엣은 그들이 복도를 벗어날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분명히 20년 전, 공작성에서 일하던 부부가 어린 딸과 함께 공작가의 보물을 훔쳐 달아났다.
"프란 부부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대대로 공작가에 충성해온 기사가 직접 확인해주었다.
그들이 공작가의 가보를 훔쳐 달아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부부에게는 딸이 없었노라고.
레녹스가 그녀에게 직접 말해주었다.
"인사해. 이 보관의 이름이 달리아니까.”
'달리아'는 결국 그들의 딸이 아니라 도둑맞은 보물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대체 왜 그렇게 믿게 되었던 걸까?
(인간의 기억이란 참 단순하 하지.)
문득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 믿은 이상,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아차리기는 몹시 힘들어. 안 그래?)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시야가 어두워졌다.
(일어났네.)
그리고 줄리엣은 낯익은 침실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눈을 뜬 줄리엣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었다.
(안녕.)
줄리엣은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검은 표범을 빤히 쳐다보았다.
낯이 익은 존재였다. 광장에서 레녹스와 마주쳤을 때 그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짐승이었다.
(드디어 만났네.)
줄리엣은 침착하게 물었다.
“당신도 악령인가요?”
(역시 똑똑하네, 너.)
검은 표범이 씩 웃었다.
사실 표범의 정체가 악령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조금 전처럼 줄리엣의 꿈속에 불쑥불쑥 들어와서 억지로 그녀의 정신을 헤집던 것은 나비들의 특기였다.
그러니 이 표범의 정체 역시 악령일 게 뻔했다.
(그래, 맞아. 너희 인간들은 나를 악령이라고 부르지.)
줄리엣은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폈다. 주변이 어둑한 걸 보니 시간이 좀 지난 것 같았다.
'몇 시쯤이지?’
주위를 살피던 줄리엣은 문득 자신의 손에 여전히 번쩍이는 티아라가 쥐여 있다는 걸 깨달았다.
(드디어 만났는데 반응이 영 싱거운걸.)
검은 표범은 한가하게 그런 소리나 했다. 잠시 티아라를 내려다보던 줄리엣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나를 알고 있어?”
(모를 리가 있나.)
표범 형상의 악령은 이 대화가 즐거운 듯 연신 싱글거렸다.
(우린 여러 번 만났어. 너는 지금껏 나를 보지 못했겠지만. 어때, 이제 알아보겠어?)
줄리엣은 검은 표범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불쑥 말했다.
"너, 그 검이구나.”
온몸이 새카만 표범의 본체를 를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흔히 귀신이 붙었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칼라일 공작의 검.
(맞았어. 인간치곤 감이 좋네.)
줄리엣은 불현듯 어떤 사실을 떠올렸다.
수다스러운 나비들은 그녀에게 말을 걸지 못해 안달을 냈다.
아티팩트를 깨울 수 있는 인간은 몇 되지 않기 때문에 계약자에게 집착한다고 했었던가.
'그런데 어떻게?'
(그래. 악령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는 보통 계약자 하나뿐이지.)
마치 그런 줄리엣의 생각을 꿰뚫어 보았다는 듯 검은 표범은 은웃었다. 표범이 어떻게 웃을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줄리엣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럼 내가 지금 너랑 대화를 하는 건…….”
(네 나비들의 힘이 약해졌기 때문이지. 이야, 그 멍청이들에게 감사해야겠네.)
줄리엣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나비들에게 이상이 생겼다는 걸 이런 식으로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검은 표범은 줄리엣이 관심을 을주자 신이 난 것 같았다.
(화낼 것 없어. 어차피 소원을 을들어주는 악마 따위는 흔하잖아.)
검은 표범은 짐짓 새침하게 꼬리로 책 더미를 쳐서 무너뜨렸다.
(나나 네 나비들도 똑같아. 우리가 원하는 게 뭐라고 생각해?)
줄리엣은 잠시 생각했다.
이 악령들이 아주 오래전에 강제로 소환되어 아티팩트에 묶여버린 차원 너머의 존재들이라면….
“원래 속한 차원으로 영원히 돌아가는 거겠지.”
(생각보다 더 똑똑하네.)
검은 표범은 만족스럽다는 듯 꼬리를 살랑거렸다.
(맞아. 나는 원래 내 차원으로 돌아가고 싶어. 여기도 재밌긴 하지만…….)
검은 표범은 서글프다는 듯 말을 이었다.
(생각해 봐. 너희 같은 미물들의 요구나 들어주려고 수백, 수천 년 동안 지루하게 기다려야 한다는 게 말이 돼? 이 위대하신 몸이 말이야.)
수다스럽게 떠들던 검은 표범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비천한 인간들에게 의지해야 한다니.)
화륵.
갑자기 온화하게 말하던 맹수가 불현듯 검은 불꽃에 휩싸였다.
줄리엣은 놀라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일순간, 우아한 고양잇과 맹수의 균형 잡힌 얼굴 대신 흉측한 형상이 일렁였다가 사라졌다.
(게다가 여기서는 제대로 힘을 쓰지도 못한다고.)
본모습을 드러낸 것도 잠시, 검은 표범은 어쩐지 처량하게 하소연했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는지 알아?)
짐승의 형상을 한 자칭 위대한 존재는 어린애처럼 칭얼거렸다.
말을 좀 유창하게 한다는 점을 빼고는, 정말로 줄리엣의 나비들과 다를 게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보잘것없는 짐승 형상을 하고 마물 흉내나 내고 있지만 자신들의 힘은 정말로 대단하다.
그러나 힘의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에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뭐 그런 내용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고작 인간의 기억이나 뒤적거리는 게 전부이니….)
“그럼 그게 너였구나."
줄리엣은 순간 깨달았다.
(음?)
“레녹스에게 내 기억을 보여 줬던 게.”
줄리엣의 눈매가 서늘해졌다.
(음, 그건 맞아.)
“그래서 레녹스에게 과거 기억을 일깨워 줬어? 그것과 너희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게 무슨 상관인데?”
(엄밀히 말하면 관계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해. 어쩔 수 없었어.)
검은 표범이 변명하듯 말했다.
그녀의 나비들이 물리적인 힘을 행사하기보다는, 가장 두려워하는 환상을 보게 하고 그 감정을 먹어 치우는 식으로 사람을 조종했던 것과 비슷한 방식인 것 같았다.
(화내지 마. 악령은 계약자의 감정에서 가장 큰 에너지를 얻는 법이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줄리엣은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저 표범의 말대로 악령들이 계약자의 고통에서 힘을 얻는다면, 그녀의 나비들도 그녀가 감정을 내준다면 다시 힘을 되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러면…… 네 말대로 내가 기억을 더 떠올리면 나비들을 다시 더불러낼 수 있어?"
(아니.)
신나게 떠들던 표범은 의외로 딱 잘라 말했다.
“왜?”
(네 나비들이 힘을 잃은 것은 그 뱀에게 약점을 잡혔기 때문이야.)
"약점?”
(네가 나비들에게 네 몸을 통째로 허락해 줘도 그 뱀이 버티고 있는 이상 제대로 힘을 되찾는 건 불가능해.)
“무슨 약점을 잡힌 건데?"
(이름을 들켰잖아.)
"......?"
검은 표범이 워낙 심각하게 말해서 줄리엣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스노우드롭?”
(그래. 그 이름.)
표범의 미소가 진해졌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대단한 약점인 건가? 줄리엣은 더 물으려고 했다.
그때였다. 밖에서 희미한 인기 척이 들렸다.
(이크.)
검은 표범은 눈에 띄게 움찔했다. 그리곤 작별 인사도 없이 자연스럽게 침실 벽을 통과해 사라졌다.
달칵.
문이 열리고 들어온 것은 공작가의 하녀였다.
“공작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표범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금방 내려갈게.”
줄리엣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응접실로 걸음을 옮겼다.
얇은 잠옷에 맨발로 공작가의 저택을 걷는 내내 마주친 공작가 사람들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아래층이 시끌시끌하다 했더니, 응접실에서 뭔가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공작가의 가신 여럿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막 외출에서 돌아온 듯 못 보던 예복을 걸친 칼라일 공작의 모습도 보였다.
오가는 대화를 엿들으니 대충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갔다.
광장에서 마수들이 난동을 부린 일로 사태 해결을 위해 급히 대회의가 소집된다고, 그때 레녹스가 문가에 선 줄리 엣을 발견했다.
"아, 줄리엣 양.”
그가 곁눈질하는 것을 발견한 한가신들도 그녀를 알은체했다. 동시에 회의는 끝이 났다.
사람들이 모두 떠난 응접실에는 레녹스와 줄리엣, 단둘뿐이었다.
줄리엣은 손 안의 작은 티아라 르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게 달리아라고?'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줄리엣이 입을 열었다.
“그럼 달리아 프란은…… 그 여자는 누구죠?”
“제 이름이 달리아라던가?”
줄리엣이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침묵하던 레녹스가 대놓고 냉소했다.
달리아가 사람이 아니라 보물의 이름이라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 달리아가, 그 여자가 전하의 애칭을 알고 있었어요."
“그랬겠지.”
레녹스는 담담히 긍정했다.
“그건 수백 년 동안 북부의 공작성에 숨겨 뒀던 물건이니까 내 이름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을 거야.”
가문의 일들을 낱낱이 꿰뚫고 있던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달리아는 틀림없이 공작성의 동쪽 탑에…….”
거기까지 말하던 줄리엣은 문득 깨달았다.
동쪽 탑은 공작가의 가주 내외만이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건 공작성의 온갖 진귀한 보물들을 보관하는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레녹스는 나직하게 긍정했다.
물론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설명되지는 않았다.
일단 타이밍이 몹시 공교로웠다. 레녹스가 달리아를 찾아서 공작성으로 돌아온 것은 그녀와 크게 다툰 직후의 일이었다.
왜 하필 레녹스는 그때 달리아를 공작성으로 찾아와야 했던 걸까?
"네 가문의 선조가 했던 일과다르지 않아. 그것들을 가둬 두기 위해서지. 세상에 풀리기에는 너무 위험한 것들이니까.”
“…가둬 두기 위해서라고요?"
그러자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7년 전 아무것도 모르던 그녀가 문을 열어 나비들을 꺼내 놓을 때까지, 그것들은 수백 년 동안 갇혀 있었다고 했었다.
줄리엣은 깨어날 때까지 손에 꼭 쥐고 있던 티아라를 만지작거렸다.
그 말인즉, 이것 역시 은 열쇠와 마찬가지로 아티팩트라는 말이었다.
“줄리엣.”
레녹스가 다가와 그녀의 앞에 꿇어앉았다.
“그건 사람의 기억을 혼란시키는 물건이야.”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