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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151화 (148/229)

151화.

“7년 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제가 약속했었죠. 보관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다고요.”

줄리엣은 전생의 기억을 통해 그가 도둑맞은 가보를 찾고 있다.

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곁에 머물게 해 주면 대가로 가보를 찾는 걸 도와주겠다.

제안했다.

어차피 7년 뒤에 프란 부부가 훔쳐 달아난 보관이 달리아와 함께 세상에 나타날 테니까. 그때까지만 함께 있으려 했다.

“그 약속 지금 지킬 수 있을 것 같아요.”

줄리엣은 다소 홀가분하게 말했다.

사실 줄리엣은 이미 그 약속의 반절은 지켰다. 사라진 보관의 의행방을 알아냈고, 그 덕분에 칼라일 공작가는 도둑맞았던 보관을 다시 손에 넣게 되었다.

지난 생과 달리 달리아와 다른 방식으로 조우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훨씬 오래 전에 그에게 털어놓았어야 했다.

그가 그렇게 달리아를 찾고 있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7년간 모른 척했다.

그가 달리아와 만나면 또 자신을 을 떠날 것이 겁나고 두려워서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레녹스의 한쪽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

“무슨 약속?”

“말씀드렸잖아요. 달리아를 다시 만날 수 있게 돕겠다는 약속이요.”

그런데 레녹스의 표정이 조금 묘했다. 상황을 이해하기는커녕 뭔가 의아하다는 기색이었다.

“달리아를 만나?"

“네.”

“어떤 식으로?"

줄리엣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질문은 좀 이상하게 들렸다. 혹시 달리아를 네가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느냐, 어떻게 찾아 낼 수 있느냐고 의심하는 걸까?

그렇다면 처음부터 설명해 줄 수 있었다.

“전하, 저는 예전에도 달리아를 만난 적 있어요.”

레녹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예전’이란 게 이전의 삶을 뜻한다는 것을 알아들은 눈치였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관계였으니까요.”

줄리엣은 남 얘기를 하듯 가볍게 웃었다.

그녀는 회귀 전의 삶에서 달리 아가 어떤 식으로 나타났는지, 그리고 달리 아가 어떤 존재였는지 기억나는 대로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북부의 공작성으로 달리아가 오게 된 일부터, 달리아가 동쪽 탑에 머무르는 사이 사람들 사이에 어떤 소문이 오르내렸는지도.

그러는 동안 레녹스는 굳은 얼굴로 듣기만 했다.

“달리아가 북부에 나타난 건 그 무렵이에요.”

어설프게 줄리엣이 숨겼던 아이의 존재가 들통나고, 그녀의 백일몽이 산산이 조각난 어느 봄날에.

“그러고 보니 전하는 제가 어떻게 달리아를 알고 있는지, 도둑맞은 가보의 존재를 알고 있는지 묻지 않으셨네요.”

줄리엣이 희미하게 웃었다.

정말로 추궁했더라면 꽤 곤란했을 것이다. 같은 삶을 두 번째 살고 있기 때문에 알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기억 못하시겠지만, 그때 저희는 크게 싸웠어요."

싸웠다기에도 모호했다.

그는 화를 냈고 줄리엣은 울면서 그에게 매달렸다.

레녹스는 들어 줄 수 없다며 자리를 박차고 떠났고, 줄리엣은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전전긍긍했다.

돌아오면 다시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속이려던 건 아니었다.

고 말하면 모든 게 괜찮아지리라 믿으면서.

그러나 며칠 뒤 돌아온 레녹스는 는 혼자가 아니었다. 줄리엣은 그의 방 앞에서 서성이다가 우연히 하녀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공작님께서 드디어 찾아 오셨대’라고요.”

처음에는 그가 찾았다는 게 뭔지도 몰랐다.

줄리엣은 자신을 구해 준 남자에 대해 아는 것이 터무니없이 적었다. 그러나 줄리엣은 달리아의 존재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순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동쪽 탑?”

“네.”

동쪽 탑은 북부에 머무는 동안 줄리엣에게는 단 한 번도 허락된 적 없는 공간이었다.

오직 공작가의 가주와 그 배우자에게만 허락된 영역.

“잠깐. 그건...…."

"괜찮아요. 그녀가 직접 말해 줬으니까.”

"뭐?"

줄리엣과 마주친 순간, 그 여자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사람처럼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아, 드디어 만났네요.]

햇살처럼 밝고 명랑한 달리아의 사랑스러움은 줄리엣을 절로 주눅 들게 했다.

[레녹이 말해 줬어요. 학대받던 여자를 구해 왔다죠?]

줄리엣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달리아는 그녀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질문들을 모두 해소해 주었다.

마치 그녀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가족도 없는 불쌍한 여자니까 친절하게 대해 주라고 당부했어요. 걱정 말아요.]

달리아는 자애로운 안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친절히 진실을 을알려 주었다.

줄리엣은 그간 품었던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돌아가신 공작 부인께서도 항상 온정을 베푸는 분이셨답니다.]

공작성의 사용인들이 수군거리던 뜬소문들은 모두 사실이었노라고 확인해 주었으니까.

그보다 확실한 대답이 있을까.

달리아 프란은 공작성의 구조는 물론이고 이제는 모두 죽고 없는 그의 가족들과 혈통에까지 모르는 게 없었다.

결국 애써 외면했던 하녀들의 말이 맞았던 것이다.

희미한 달빛처럼 어딘지 모르게 그늘지고 불길한 줄리엣 모나드는 동정과 호기심의 대상이었을뿐.

멍청한 줄리엣 모나드.

그런 것도 모르고 헛된 꿈에 부풀어서.

줄리엣은 싱긋 미소 지었다.

“그 다음은 전에 들으셨던 대로예요.”

마침내 헛된 꿈에서 깨어난 줄리엣은 완전히 지쳐 버렸다.

가족도 기댈 곳도 없어진 줄리 엣은 하나 남은 아이까지 빼앗길까 두려워졌고 도망치기로 했다.

그리고 그런 줄리엣에게 때마침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준 상냥한 여자도 있었고 말이다.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는 내내 레녹스는 그녀의 발치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차갑다 못해 싸늘한 무표정으로 듣기만 했다.

이따금 그의 눈이 예리하게 번뜩였지만 그는 줄리엣의 말에 끼어들거나 하지 않았다. 줄리엣이 그다음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는.

“그리고…….”

줄리엣은 얼른 입을 열지 못했다. 과거를 털어놓는 것쯤이야 쉬웠다.

그러나 이건 그녀가 오랫동안 겁내 왔던 순간이었다. 줄리엣은 그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 일지 몰라 더럭 겁부터 났다.

“그리고 얼마 전에 다시 달리아를 만났어요.”

“....…뭐?”

좀처럼 동요하는 법 없는 남자의 눈이 순간 크게 뜨였다.

그의 손이 줄리엣의 어깨를 다급히 움켜쥐었다.

“잠깐. 언제? 어디서?"

대번에 그의 안색이 변했다.

줄리엣은 레녹스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잠시 바라보았다.

언젠가 예상한 그대로의 반응이었다.

지난 7년간이 그에게는 언제 이 별을 고해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이었다면, 줄리엣에게는 달리아가 나타나면 어떻게 될지 수없이 고민하는 기간이었다.

그 악몽에서 줄리엣은 그의 발치에 앉아 자신을 내치지 말아달라 울며 애걸하는 역할이었지만 적어도 지금 무릎 꿇은 쪽은 레녹스였다.

다급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남자의 모습을 보면서 줄리엣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상상과는 달리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고여 있던 눈물도 어느새 말라 버렸다.

“전하가 남부에 계시는 동안, 황궁에서요.”

줄리엣은 담담히 말했지만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 황궁?”

레녹스의 표정이 험악해지는 것을 줄리엣은 유심히 관찰했다.

'달리아가 수상하단 얘기는 할 필요 없으려나.'

이전 생에서도 탑에서 한 발짝도 못 움직이게 할 만큼 귀하게 아끼던 존재였으니.

어쩌면 그는 달리아의 능력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까… 지금 달리아는"

“…… 는 ,황궁에 있어요. 황후의 치료사를 찾으면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이야기를 마친 줄리엣은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러나 레녹스는 당장 자리를 를박차고 일어나거나 황궁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대신 그녀를 조용히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줄리엣.”

레녹스가 그녀의 손끝을 조심스레 쥐었다.

"네가 ‘찾는 걸 도와주겠다' 던의미가 도둑맞은 가보와 달리아란 여자, 이 두 가지였단 건가?”

"네, 맞아요.”

줄리엣은 담담히 긍정했다.

그러나 레녹스는 다시 물었다.

“……그리고 내가 남부에 보관을 찾으러 간 사이, 너는 달리아를 만났다'고?”

줄리엣은 살짝 짜증이 나서 퉁명스레 긍정했다.

“네, 그래요.”

만났다. 뿐인가. 머리채만 안 잡았을 뿐이지 대화도 하고 황후의 앞에서 다투기도 했다.

“킥.”

그런데 줄리엣을 관찰하듯 보던 레녹스는 보기 드물게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웃어?'

“동쪽 탑이라. 그랬군.”

그의 입매가 보기 좋은 호선을 그렸다.

“그래. 이제 이해가 가네.”

모양 좋은 손가락이 줄리엣의 손끝을 감싸 쥐는 것과 동시에, 레녹스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스치는 것을 줄리엣은 똑똑히 보았다.

그건 줄리엣이 해석하기 어려운 미소였다.

그는 화를 억누르는 사람처럼 싸늘하기도 했고 사냥감의 약점을 포착한 포식자처럼 희열에 찬 것 같기도 했다.

"뭐…… 가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줄리엣의 손끝을 만지작거리던 레녹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춰왔다.

“줄리엣.”

그녀는 조금 놀랐다.

마주한 붉은 눈이 생각보다 따뜻해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답지 않게 조심스럽게 줄리엣의 눈가를 만지작거리는 손도 따뜻했다.

“왜냐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거든.”

다정한 어조와는 달리 레녹스가 딱 잘라 말했다.

“네가 만난 건 달리아가 아니야.”

"…네?”

당황한 줄리엣을 향해 레녹스가 말을 이었다.

“줄리엣, 네 말대로라면 너는 달리아를 본 적 없어.”

달리아를 본 적 없다니?

“이전에도, 지금도.”

줄리엣은 잠시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그런 그녀를 향해 레녹스가 싱긋 미소했다.

“보여 줄 게 있어.”

줄리엣이 뭔가 묻기도 전에 레녹스는 품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꺼내 그녀의 손안에 쥐여 주었다.

줄리엣의 눈이 크게 뜨였다. 황홀한 광채를 뽐내는 보석관이었다.

“이건…?”

“남부에서 찾은 보관이야. 네 말대로 후작의 서재에 있더군."

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줄리엣은 조금 감탄했다.

공작가가 오랜 세월 되찾으려 했던 게 이해가 갔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20년 전, 프란 부부가 훔쳐서 달아났다는 공작가의 가보, 보석이 아로새겨진 티아라.

반짝이는 금관은 대단히 정교하고 섬세했다.

"…… 공작가의 가보가 될 만하네요.”

“그래. 그리고 가보에는 보통 거창한 별칭이 붙지.”

싱긋 웃는 레녹스의 미소가 꽤나 의미심장해서 줄리엣은 조금 불안해졌다.

"별칭이요?”

“그래. 인사해.”

레녹스가 상냥하게 냉소했다.

“이 보관의 이름이 달리아니까."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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