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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150화 (147/229)

15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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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에서 출발한 칼라일 공작일행은 예정보다 이른 시점에 수도에 당도했다.

“그런데 왜 연기가 …….”

수도의 성문을 통과하기도 전에 그들은 수도 방향에서 소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늘을 가릴 만큼 거대한 연기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고 거리의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그들은 서둘러 수도 안으로 들어섰다.

“전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엘리엇은 사색이 된 얼굴로 달려왔다.

“줄리엣 님께서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이쪽은 저희가 맡을 테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레녹스는 시가지 방향으로 말머리를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투기장이 붕괴하고 마수들이 풀려나는 바람에 광장 근처가 아수라장이었다.

마수들이 흥분해 요란하게 시설물을 부수기는 했지만 시민들이 급히 대피한 덕분에 인명피해는 크지 않았다.

“도, 도와주세요……!"

물론 몸을 피하는 것이 힘든 노인이나 어린아이도 더러 있었다.

서걱.

어린 남매를 향해 달려들던 마물이 균형을 잃고 고꾸라졌다.

남매를 구출하기 위해 달려가던 수도 경비대는 그들을 구출한 사람을 금방 알아보았다.

“칼라일 공!”

살았다는 안도감과 그들을 도와줄 조력자가 생겼다는 기쁨에 반색하던 것도 잠시.

칼라일 공작은 경비대장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급히 물었다.

“모나드 백작을 봤나?"

"…예?”

낯선 이름에 당황한 경비대원이 되물었다.

레녹스는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했다.

“줄리엣 모나드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저, 저쪽! 광장 근처에 계신 걸 봤습니다!”

다행히 줄리엣을 아는 누군가가 대답했다.

레녹스는 대답을 듣자마자 말머리를 급히 광장 쪽으로 돌렸다.

그러나 그 순간, 그들의 눈앞에 기묘한 광경이 펼쳐졌다.

"......?"

“저, 저게 뭐야!”

쿠르르르.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던 마수들이 돌연 멈춰 섰던 것이다.

심지어 마수들은 자신들을 공격하는 경비대원들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느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무너진 임시 투기장이었다.

거대한 뿔을 가진 마수 한 마리가 비척비척 걸어가더니 무너진 투기장 쪽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걸 시작으로, 주변에 있던 마수들도 한둘씩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모두가 눈앞에 펼쳐진 기이한 광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을 잃었다. 그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당황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만은 이 모든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그래, 네가 찾는 여자는 저기 있어.)

검은 표범이 태평하게 중얼거렸기 때문이다.

(이미 좀 늦은 것 같지만….….)

레녹스는 반쯤 정신을 내려놓은 채 무너진 건물의 잔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하! 위험합니다! 물러나셔야…!"

그를 뒤따라온 수하들이 만류했다. 그러나 주변의 마수들은 그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레녹스는 무너진 벽 아래에서 그가 찾던 여자를 발견했다.

“…… 줄리엣.”

줄리엣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채 멍하니 제 손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줄리엣.”

다시 한번 부르자 줄리엣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전하.”

레녹스는 재빨리 줄리엣에게 다가가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먼지를 뒤집어쓰기는 했으나 겉으로 보기에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줄리엣이 무사하다는 것을 깨닫자 레녹스는 안도감과 동시에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목 끝까지 차오른 말들이 잔뜩 있었지만 입 밖으로 먼저 나온 것은 분명 걱정이었다.

"내가 분명 얌전히 기다리라고 했을 텐데.”

그러나 줄리엣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레녹스의 표정이 굳었다.

"너…… 왜 울어.”

푸른 눈에 눈물이 그렁했다.

창백한 얼굴은 멍한 게 아니라 겁에 질린 거였다.

“..… 나비가.”

그는 줄리엣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줄리엣이 들여다보던 그녀의 손바닥 위에는 나비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줄리엣의 나비라는 것을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희미하게 반짝이는 나비들은 조약돌 같기도 했다.

(아직. 밖에. 있어.)

(도망가.)

‘그것이 오기 전에.'

손톱만큼이나 작아진 크기의 나비들은 목소리까지 잃어버린 것 같았다.

“다시 올 거지?”

줄리엣이 물었지만 나비들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계약자. 가지고, 있어.)

(그러니까. 열 수 있어.)

'……무엇을?'

"아.”

잠시 그 말뜻을 고민하던 줄리 엣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옷깃을 더듬었다.

그리고 몸에 지니고 있던 소지 품을 몽땅 끄집어냈다.

한 손에는 어부의 반지, 다른 손에는 은 열쇠가 들려 있었다.

줄리엣은 잠시 생각했다.

아무래도 조금 전 이상한 괴생명체를 막아 준 것은 이 어부의 반지였던 것 같았다.

돌로레스의 탈을 쓴 뱀이 줄리 엣을 움켜쥐려는 순간, 엄청난 불꽃이 일었었다.

'나름 성유물이란 건가.'

하지만 나비들이 말하는 ‘열 수 있다’는 물건은 아마 은 열쇠 쪽일 것이다.

“이 열쇠가 있으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어?”

(아니.)

그러나 줄리엣이 은 열쇠를 들어 보였을 때는 나비들의 크기와 목소리가 아주아주 작아진 상태였다.

(그것. 나중.)

(계약자. 위한 거.)

(계약자만, 열 수 있어.)

(문. 안에….)

(열고, 도망.)

(뱀. 만나면. 열어.)

줄리엣은 처음으로 어눌하게 종알거리는 나비들에게 애틋한 감정을 느꼈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돌로레스의 탈을 쓴 뱀을 향해 나비들은 강렬한 적의를 드러냈다.

줄리엣을 지키기 위해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달려들었고, 그게 치명상이었음이 틀림없었다.

“.……너희 차원 너머에서 위대하고 사악한 존재라며.”

그래서 매번 강제로 역소환되어도 다시 나타나곤 했던 거잖아.

하지만 어쩐지 이번에는 나비들이 푸른 불꽃에 휩싸여 사라지는 대신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

는 생각이 들었다.

(노란. 뱀. 위험.)

(빼앗겼어. 우리.)

작은 목소리로 나비들은 뭔가 전하려고 애썼다.

주변에서 소음이 울렸지만 줄리 엣은 몸을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숨을 죽였다.

(계약.자야.)

(미안.해…….)

그녀는 그만 울고 싶어졌다.

항상 머리를 울리던 목소리는 이제는 집중하지 않으면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다.

줄리엣에게는 그것이 어떤 전조로 느껴졌다.

“…… 뭐 때문에 이렇게 됐지?”

굳은 얼굴로 레녹스가 물었지만 줄리엣은 설명할 수 없었다.

한 번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한 적 없지만, 돌아온 이래로 줄리엣은 어떤 불길한 직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이번에도, 가을이 오기 전에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직감.

어쩌면 이대로 곁에 있는 존재를 다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레녹스.”

줄리엣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에게 설명하는 대신 마음속에 맴도는 말을 내뱉었다.

“……더는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

“네가 왜 도망쳐.”

줄리엣은 흐린 눈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그녀의 눈앞에는 초조한 기색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어떻게 말해도 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미 한 번 경험한 적 있지 않은가.

과거와 똑같았다. 계절이 바뀌고, 달리아가 나타나고, 줄리엣모나드는 가진 것을 모두 잃은 채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될 것이다.

‘어차피 끝이 정해져 있어서 모든 걸 잃어버리게 될 거라면.'

더 이상 그 불안감에서 도망치 치거나 외면하느니 다 털어놓고 편해지는 게 나았다.

최소한 그가 달리아를 만나서 그들을 둘러싼 상황이 달라지기 전에, 직접 이야기하고 싶었다.

남자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와 줄리엣의 뺨을 훔쳤다.

“묻잖아. 네가 왜 우느냐고."

줄리엣은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었단 것을 깨달았다.

뺨이 온통 젖어 있었다.

“전하, 드릴 말이 있어요.”

“....… 그래. 일단 여길 나간 다음에.”

“지금이 아니면 안 돼요.”

줄리엣은 저를 일으켜 세우려던 남자의 손목을 도로 붙잡았다.

“지금, 얘기하고 싶어요.”

줄리엣은 입 모양으로만 미소지었다.

고집스레 그를 붙잡으면서도 그가 손을 뿌리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레녹스는 뜻밖에 순순히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춰 주었다.

“말해.”

“항상 궁금했어요.”

줄리엣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그 대단한 칼라일 공작을 무릎꿇리고 그의 애정을 한 몸에 받는 기분은 어떤 걸까."

그녀의 손이 뺨에 닿자 레녹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을 뿐 피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줄리엣의 말에는 그도 눈에 띄게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여자가 나타나면 나는 어떤 식으로 버려지게 될까 하고요.”

“줄리엣.”

“그런 걸 눈치 못 채는 여자는 없어요.”

줄리엣이 킥 하고 웃었다.

하물며 그들의 관계는 처음부터 줄리엣이 매달리다시피 해서 이어진 계약 관계였다.

“그래서 늘 달리아가 나타나는 게 무섭고 불안했어요."

줄리엣은 그렇게 직감했다.

그리고 드디어 달리아가 나타났다. 기억하는 과거와는 다른 형태였지만, 그리고 달리아는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어떻게 살아났지만, 앞으로는 이렇게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떠나기 전에 모두 털어놓고 싶었다. 그래야 두고두고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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