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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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엣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눈앞의 존재를 쳐다보았다.
끼기긱.
돌로레스의 형상을 한 그것의 목이 기괴한 각도로 꺾였다.
(겨우 단둘이 있게 됐네.)
그것의 흰자위가 검게 물들더니 줄리엣을 향해 성큼 다가왔다.
줄리엣은 그것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조용히 뒷걸음질 쳤다.
"아무도 믿지 마.”
레녹스가 경고한 것은 이것 때문이었을까? 쭈뼛 목덜미의 솜털이 곤두섰다.
“와아아아!”
등 뒤의 원형 경기장에서는 아까보다 훨씬 커다란 함성이 흘러 나왔다.
(대체 어떻게 번번이 용케 살아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넌 누구야?”
묻는 것과 동시에 줄리엣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이것은 뱀이다.
왜 그런 생각이 떠올랐는지도 모르면서 그런 확신이 들었다.
사람을 잡아먹고 그것의 흉내를 내며 살아가는 이상한 뱀의 이야기.
돌로레스는 이 존재에게 잡아먹힌 것이다.
"돌로레스를 어떻게 했어?"
뻔한 걸 묻는 동시에 줄리엣은 직감했다. 돌로레스는 잡아먹힌 것이다.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야?"
(겁먹을 거 없어.)
돌로레스의 얼굴을 한 존재가 히죽거리며 다가왔다.
(난 그저 오래 전 끝내지 못했던 일을 마무리 지으려는 것뿐이니까.)
'오래 전?'
“…나를 알아?"
(어떻게 모르겠니, 아이야. 나는 과거에도 이번 생에도, 항상 너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위협적인 기세와는 달리 목소리는 얼핏 상냥하게까지 들렸다.
조금씩 뒷걸음질 치던 줄리엣의 등이 나무 벽에 닿았다.
바로 등 뒤, 엉성하게 지어진 불법 경기장 안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움을 청해 봤자 우레와 같은 함성에 묻혀서 들리지 않을 게 뻔했다. 설령 누가 도와 준다 한들, 정체 모를 눈앞의 괴물을 물리칠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이거 어쩌나. 이번엔 아무도 널 도와주러 오지 않아, 공주님.)
돌로레스의 겉모양을 뒤집어쓴 뱀이 잔뜩 비아냥거렸다.
어쩐지 낯익은 말투였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기도 했지만, 줄리엣은 어쩐지 기분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안개 낀 듯 머릿속이 모호한 가운데, 그녀의 머릿속에는 문득 조각난 이미지들이 선명하게 짜맞춰졌다.
'떠돌이 용병이 들려줬던 노란 뱀의 이야기.'
이 뱀은 과거의 줄리엣을 알고 있다는 듯 행동했다. 그렇다면이 뱀의 목적은…….
“일부러 이 시기를 골랐구나."
(뭐?)
시간을 끌어보려는 계획만은 아니었다. 줄리엣은 확신하고 있었다.
“레녹스가 남부로 가서 여기에 없으니까. 그렇지?"
(.......)
뱀은 표정 없는 얼굴로 줄리엣을 노려보다가 히죽 웃었다.
(제법 똑똑하네, 너. 그러면 여기가 네 무덤이 될 것도 알고 있겠지?)
꼼짝없이 독 안에 든 쥐가 된 순간, 경기장 안에서 한차례 함성이 흘러나왔다.
'잠깐, 함성이라고?'
줄리엣은 불현듯 뭔가를 깨닫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건 함성이 아니었다.
“사, 살려줘!”
처절한 비명이었다.
줄리엣은 순간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깨닫지 못했다.
(잔꾀를 부려도 도와줄 사람은 안 와. 네 행운도 여기까지란다.)
“으아악!”
“사, 살려……!”
임시로 세워진 나무 벽 틈새로 투기장 안의 광경이 엿보였다.
매캐한 연기가 깔려 있었고, 어찌 된 영문인지 쇠사슬에 묶인 마수들이 흥분해 날뛰며 관객석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덕분에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관객석을 짓밟는 마수들을 피해 사람들이 정신없이 도망쳐 나왔다.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줄리엣에게도 쿵 하고 부실한 경기장이 울리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이 상황에 인간 여자 하나쯤 사라진들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
돌로레스의 겉가죽을 뒤집어 쓴 뱀이 히죽거리며 서서히 다가왔다.
애석하게도 그 말이 맞았다. 줄리엣은 힐끔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도망칠 곳도, 도움을 청할 곳도 없다.
발밑에는 임시 경기장을 짓고 남은 노끈이나 목재 따위가 굴러다녔으나 그뿐이었다.
‘어떡하지..'
그 순간.
파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나비들이 일제히 뱀을 향해 달려들었다.
"!"
줄리엣은 순간 당황했다.
그녀가 불러내기도 전에 무수한 나비 떼가 돌로레스의 탈을 뒤집어쓴 존재에게 달려든 것이다.
하지만 돌로레스의 겉가죽을 뒤집어쓴 정체불명의 존재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 쳤다.
(쯧, 쓸데없는 발악을.)
돌로레스의 탈을 쓴 뱀이 팔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너희는 나를 거역할 수 없게 되어있어. 그러니 방해하지 말고 구경이나 해!)
그러자 반경 내에 있던 나비들은 푸스스 빛 가루를 뿌리며 부서졌다.
나비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줄리엣은 그들이 시간을 벌어 준 틈을 놓치지 않았다.
경기장으로 통하는 얇은 나무 벽에 힘껏 등을 부딪쳤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금 위쪽에 걸려있던 램프가 툭 하고 맥없이 떨어진 것을 제외하곤.
(벽이라도 부수고 도망가려고?
그 정도로 벽이 부서지겠어?)
뱀은 노골적으로 비웃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파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번에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것의 손이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이다.
파지직!
허공에서 불꽃이 튀었다.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간발의 차이로 줄리엣을 놓친 그것이 으르렁거렸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는 것은 줄리엣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믿을 수 없는 행운을 놓치지 않기로 했다.
줄리엣은 망설이지 않고 발치에 떨어진 램프를 냅다 걷어찼다.
쨍그랑!
그와 동시에 바닥에 놓여 있던 밧줄을 타고 불이 번졌다. 기름을 먹은 밧줄은 순식간에 불이 붙었다.
(키에에에~!)
덩달아 불길에 휩싸인 그것이 당황한 듯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움찔한 줄리엣은 곧장 벽 가까이 몸을 붙였다.
펑!
그리고 그 순간. 반쯤 무너진 나무 벽 틈새로 새어 나온 정체 모를 연기가 불을 만나 폭발을 일으켰다.
줄리엣은 충격으로 잠시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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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 났습니다!”
같은 시각.
헐레벌떡 황자궁의 문이 열리더니 시종이 달려왔다. 그는 2황자 클로프의 시종이었다.
“황자님! 지금 광장에서 마수들이……!"
시종은 다급히 상황을 설명했다.
“투기장 건물이 붕괴해서, 그 안에 있던 마수들이 풀려나 시민들을 공격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게 정말인가?”
2황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수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테라스로 향했다.
과연 시종의 말대로였다.
광장에서 심상치 않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디선가 불이 난 듯 뭔가 타는 냄새와 희미한 비명도 들렸다.
“성분을 알 수 없는 연막탄들 때문에 마수들이 폭주한 것 같습니다.”
“계획대로군.”
“예?”
시종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클로프는 당황하거나 애석해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었다.
눈을 끔뻑이는 시종의 등을 재빨리 떠밀어 내보낸 것은 클로프의 부관이었다.
“어흠, 자네는 그만 나가 보게!"
"아, 예…….”
얼결에 시종이 쫓겨난 뒤, 클로 프는 대놓고 탐욕스럽게 양손을 비볐다.
“이제 이 일을 칼라일 공작에게 뒤집어씌우면 된다고 했지……!”
자신만만해진 클로프는 서랍에 곱게 숨겨 뒀던 동그란 금속 구체를 집어 들었다.
그 여자가 준 연막탄이었다.
마물의 공격성을 높이는 특수한 약초가 들어가 있다고 했던가.
“..…너무 노골적이지 않을까요?”
불안한 듯 황자의 부관이 물었다.
“세상에 어느 멍청한 인간이 자기 가문의 문장을 범죄 현장에 남기겠습니까?”
그리고 그 연막탄에는 공작가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모르는 소리. 원래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법이야.”
혀를 끌끌 차며 클로프는 자신했다.
여자가 일러준 계획은 간단하고 치명적이었다. 미쳐 날뛰는 마수들이 수도를 엉망으로 휘젓는다.
면 제국민들은 분노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범인을 색출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질 것이고, 그때 때맞춰 자신이 은근슬쩍 이 증거를 제시하면 된다.
“그러면 이번에야말로 그 시건 방진 칼라일 공작 놈도 끝이지."
클로프가 비릿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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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아악!”
바깥에서 들려온 난데없는 비명에 줄리엣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줄리엣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비틀거렸다. 비척거리며 일어나 바깥을 살피자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쇠사슬에서 풀려난 마수들이 돌아다니고 있었고, 사람들은 도망치기 바빴다.
그녀가 쓰러져 있던 곳은 반쯤 무너진 경기장 건물의 안쪽이었다.
'운이 좋았어.’
줄리엣은 이마를 훔치며 상황을 정리했다.
아무래도 투기장에 퍼진 정체불명의 연기 때문에 쇠사슬에 묶여있던 마수들이 폭주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까 그건….….
그건 대체 뭐였지?'
줄리엣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뱀은 어디 갔지?'
정체는 몰라도 다행히 불길에 휩싸인 게 타격이 있긴 했던 모양이었다. 그 정도로 죽을 것 같진 않았지만 도망친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줄리엣은 반쯤 허물어진 경기장건물에 몸을 숨기고 잠시 숨을 골랐다.
“……이게 무슨 난리람."
마수들이 풀려나서 광장을 온통 휘젓고 다니는 것을 보던 그녀는 문득 아까부터 너무 조용한 나비들이 신경 쓰였다.
(.....)
"괜찮은 거야?”
줄리엣은 아직 역소환되지 않은 나비들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그녀의 주변으로 몇 마리가 힘없이 내려앉아 날개를 반짝였다.
(괜찮아. 우리.)
줄리엣은 나비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정체 모를 그 괴물에겐 나비들의 힘도 통하지 않았다.
'그런 건 처음 봤어.'
줄리엣은 일부러 입술을 깨물었지만, 그럼에도 가늘게 몸이 떨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기괴한 각도로 꺾이던 목과 완전히 검게 물들던 눈의 흰자 위…….
“그건 뭐였어?”
(못해. 말.)
(우리. 맹세했어.)
(그렇게. 되어 있어.)
나비들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희미한 목소리로 간신히 답했다.
"너희들은 나에게 설명해 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
줄리엣은 투덜거렸다. 하지만 내심 그게 나비들이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한계인 것을 알았다.
소지품을 뒤지자 다행히 깨끗한 손수건이 남아 있었다.
줄리엣은 손수건으로 호흡기를 막은 다음, 아직 연기가 자욱한 투기장 안쪽을 염탐했다. 바닥에 손바닥만 한 동그란 금속 구체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연막탄인가?'
줄리엣은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북부에서 지낼 때, 마수 사냥에 쓰이는 저런 모양의 연막탄을 본적 있었다.
아무래도 저 구체에서 흘러나온 회색 연기가 마수들을 미친 듯 날뛰게 한 원인인 것 같았다.
연기를 마신 사람들은 쓰러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여러모로 상황이 나빴다.
흥분한 마수들을 피해 도망치다.
가 부상을 입은 사람들도 부지기 수였다.
섣불리 나갔다가는 오히려 휩쓸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줄리엣은 잠시 천막을 붙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
'생각을 하자, 생각을.'
지금 내가 뭘 할 수 있지?
(계약. 자.)
(계약자.)
그 순간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희미한 목소리들이 그녀를 불렀다.
“왜 그래?”
나비 두 마리가 힘겹게 날갯짓해서 주변을 밝혔다.
(미안. 해.)
“.....… 뭐가?" ”
갑작스러운 사과에 줄리엣은 당황했다.
(나쁜. 뱀. 아직 있는데.)
(우리. 졸려.)
(이제 가야. 해.)
“간다고? 어디로?”
나비들은 힘없이 느리게 날개를 반짝였다. 금방이라도 모두 사라질 것 같았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