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그래. 그러자.”
테오가 떠난 직후, 누군가 줄리 엣에게 다가와 말을 붙였다. 사절단을 호위하던 팔라딘 중 한 사람이었다.
“실례합니다, 레이다.”
진홍색 튜닉을 걸친 팔라딘은 줄리엣을 어디론가 안내했다.
“귀빈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그가 안내한 곳은 뜻밖에도 광장에서 조금 떨어진 신전의 야외소극장이었다.
줄리엣을 만나고 싶다고 한 인물은 루체른에서 온 법황 대리, 길리엄 추기경이었다.
추기경은 흐뭇한 얼굴로 어린 사제 견습생들이 공연하는 연극을 관람 중이었다.
"오랜만이군요, 모나드 양."
“네, 잘 지내셨어요?"
길리엄 추기경은 줄리엣과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인물이었다.
살갑게 얼굴 맞대고 인사를 나눌만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저를 보자고 하셨나요?"
“그렇습니다.”
길리엄 추기경은 위엄 있는 태도로 줄리엣을 맞더니 다짜고짜물었다.
“소울 스톤은 어디 있습니까, 줄리엣 양?”
“그건 제 손에 없어요."
뜻밖에도 길리엄 추기경은 더 캐묻거나 하지는 않았다.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그건 신전의 귀중한 보물입니다. 모나드 양.”
“굳이 그게 아니라도 신전에는 보물이 많은 걸로 안답니다."
줄리엣은 점잖게 대꾸했다.
레갈리아라고 불리는 성유물들이 대표적이었다.
줄리엣은 길리엄 추기경의 왼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조금 화려하다 싶을 정도로 알이 커다란 반지가 추기경의 왼손에 끼워져 있었다.
'어부의 반지'라고 불리는 반지역시 레갈리아 중 하나였다.
법황의 대리인 자격임을 증명해 주는 용도였다.
'근데 저건 무슨 효능이 있지?'
줄리엣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어부의 반지는 유명한 성유물일 테지만, 법황청의상징물로서만 유명할 뿐 어떤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있는지는 들어본 적 없었다.
역시 치유력인가?
“계속 그런 식으로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우리 쪽에서도 가만히 있진 않을 겁니다."
'비협조적인 게 아니라, 정말로 소울 스톤을 돌려줄 수 없는걸.'
줄리엣은 제노비아의 소울 스톤이 칼라일 공작의 눈을 고치는데 쓰였다고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것을 돌려주려야 돌려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모나드 양, 저 연극의 내용을 을알고 있습니까?”
“네.”
길리엄 추기경은 문득 반구형의 연극홀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사순절을 기념해서 어린 사제 후보생들이 준비한 연극공연을 선보이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이기 때문에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고, 내용 또한 제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흔한 옛날이야기였다.
“목소리 님, 저는 이제 더 이상 드릴 게 없답니다. 제발 한 번만 더 도와주세요.”
“그렇다면 네 첫 번째 아이를 다오.”
왕의 재단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으로 숲으로 들어가는 데, 그곳에서 수상한 목소리와 만난다.
재단사는 다정한 목소리에 넘어가 고민을 털어놓고, 목소리밖에 모르는 상대가 고민을 해결해 주겠다는 말에 덜컥 계약을 하게 된다.
그 후로 10년간 재단사는 승승장구하며 큰 부자가 되어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 그때 까맣게 잊고 있던 계약 상대가 찾아온다.
그리고 그날은 10년 만에 어렵게 얻은 아이가 태어난 날이었다. 겁에 질린 재단사는 계약 상대를 쫓아내려고 갖은 수를 쓰지만 실패한다.
계약한 상대가 사실은 악마였고 10년 전의 약속대로 결국 첫 아이를 빼앗아 유유히 숲속으로 사라졌다는 이야기였다.
'교훈은 “수상한 존재를 믿지 말자" 정도일까.'
줄리엣이 심드렁히 생각했다.
"악령은 인간의 욕망을 교묘하게 파고드는 존재입니다.”
길리엄 추기경은 어린아이를 훈계하는 것처럼 말했다.
“모나드 양의 그 은 열쇠도 마찬가지지요.”
줄리엣은 갑자기 아티팩트 얘기가 나오자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그건 악령 들린 물건입니다.
아시죠?”
“누가 그래요? 이건 제 가문의 가보인데요.”
“힐데가르트 성하께서 말씀하시더군요.”
힐데가르트는 줄리엣이 루체른에서 만났던 선대 법황이었다.
줄리엣이 가짜 법황인 제바스티안에게 납치되었을 때, 힐데가르트 역시 지하 감옥에 감금되어 있었다.
“갑자기 제 물건은 왜 언급하시는 거예요?”
길리엄 추기경은 진지한 얼굴로 제안했다.
“더 이상 사라진 소울 스톤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 위험한 아티팩트를 저희에게 넘겨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줄리엣은 어이가 없어서 픽 웃고는 말했다.
“저도 궁금한 게 있어요, 추기 경님.”
“뭐지요?”
“예언서가 발견되었다는데 사실 인가요?”
“.…누구에게 들었습니까?"
길리엄 추기경이 눈을 빛냈다.
하지만 놀라는 눈치는 아니었다.
“다들 그러던걸요."
“예, 사실입니다.”
길리엄 추기경은 어쩐지 잘난 척하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처럼 말했다.
줄리엣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전 생에서도 예언서가 등장했었다.
오래된 석판이 발견된 적이 있는데 그 석판은 잇따라 일어나는 재앙들을 정확히 예견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언서라고 불렸다.
가령, 황궁의 호수가 붉게 물들었던 일이라든지.
줄리엣은 싱긋 웃으며 물었다.
“만약 제가 이 열쇠를 그 예언서와 맞바꾸자고 하면 주실래요?”
“....… 줄리엣 양.”
“못하시겠죠?그거랑 똑같아요.”
“다르지요! 성유물은 세상의 질서를 확립하는 반면 줄리엣 양의 그 열쇠 같은 아티팩트는 세상을 혼란스럽게 할 뿐입니다.”
“저는 그런 대단한 얘기는 몰라요.”
잠시 줄리엣을 노려보던 길리엄추기경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그렇게 말할 거라고 하시더군요.”
“누가요?”
“힐데가르트 성하께서요."
길리엄 추기경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 끼고 있던 반지를 내밀었다.
“3등급 성유물인 어부의 반지입니다.”
“이걸 왜 저한테 주세요?”
“그것도 법황 성하의 지시입니다.”
길리엄 추기경이 딱딱거렸다.
“줄리엣 양의 악령 들린 아티팩트로부터 아가씨를 보호해 줄 거라고 하셨습니다.”
줄리엣은 조금 고민했다.
그녀의 생각으로는 나비들이 없으면 그녀 스스로를 보호하기 더 어려운 게 아닐까 싶었다.
'게다가 지난번엔 나비들이 사라진 적도 있었고.'
제노비아의 소울 스톤 때문에 한동안 나비들이 모습을 감추기도 했었다. 원인은 모르지만 그 이후 줄리엣은 신성력 있는 물건에 덥석 손을 대기가 좀 그랬다.
줄리엣은 일단 조심스럽게 장갑 낀 손으로 어부의 반지를 받아들었다.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일단 받았다가, 맨손으로 만지지 않고 어딘가 깊이 숨겨 두면 되겠지. 그런 가벼운 생각이었다.
줄리엣이 신전의 소극장에서 나왔을 때는 해가 조금씩 넘어가고 있는 시각이었다.
조용히 소극장을 빠져나온 줄리 엣은 비단 주머니에 넣어 둔 볼록한 반지를 의식하며 나비들을 불러내 보았다. 다행히 나비들은 멀쩡히 소환되었다.
성유물을 만진 것만으로 사라지거나 하진 않는 모양이었다.
조금 안도한 줄리엣은 천천히 시가지를 거닐었다.
사순절을 기념해서 시가지에는 행사가 한창이었다. 구경하던 줄리엣은 임시로 세워진 원형경기 장 앞에 걸음을 멈췄다.
‘잔인해라.'
사순절의 하이라이트는 각지에서 공수해 온 마수들을 콜로세움에 몰아넣고 돈을 걸고 싸움을 붙이는 투전이었다.
“당장 일어나!”
“젠장, 내가 얼마를 걸었는데!”
흥분한 고성이 오갔다. 줄리엣은 눈살을 찌푸렸다.
갑옷처럼 단단한 가죽 피부를 를가진 거대한 코뿔소 마물이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줄리엣 아가씨.”
줄리엣이 미간을 찌푸린 채 그 광경을 노려보는데, 누군가 뒤에서 그녀를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돌로레스?”
머리부터 발끝까지 로브를 뒤집어 쓴 돌로레스였다.
"어떻게 된 거야? 어디 갔었어?”
“저, 다른 볼일이 있어서요.”
줄리엣은 잠시 눈을 깜빡이다.
다시 물었다.
“.……볼일이 여기 시가지에 있었니?”
"네. 그런데 아가씨를 여기서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어요.”
돌로레스가 웃으며 말했다.
“왜 혼자 위험하게 돌아다니세요? 가요. 제가 지름길을 알아요.”
돌로레스는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줄리엣은 돌로레스의 뒷모습을 한참 쳐다보다가 느리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횃불 아래 일렁이는 그림자가 마치 뱀처럼 보였다.
문득 스스로를 3인칭으로 부르는 돌로레스의 말버릇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래? 지름길은 언제 익혔어?"
그녀는 최대한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바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얼마 전에요.”
“그럼…… 돌로레스, 너 그림자가 왜 그래?"
줄리엣은 나비들을 언제든 부를 준비를 하며 되물었다.
그 순간 돌로레스의 형상을 한 그것의 고개가 끼기기 소리를 내며 뻣뻣하게 돌아갔다.
그것은 줄리엣이 말한 대로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꿈 틀거리며 뭔가가 튀어나올 듯 혼란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내 그것은 히죽 하고 웃었다.
(들켰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