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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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레스가 돌아오지 않았다고요?”
잠시 뒤, 백작가로 돌아온 줄리 엣은 돌로레스가 저택에 오지 않았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예, 아무래도 이미 황궁 밖으로 도망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줄리엣이 납득하기 어려운 설명이었다.
돌로레스는 굳이 번거롭게 도망칠 필요가 없었다.
억지로 잡아 두고 있던 것도 아니고, 하필 황궁에서 모습을 감췄다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게다가 달리아를 보던 시선이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도망보다는 실종일 수도 있었다.
'돌로레스에게는 몇 가지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의 정령을 빼앗아 온다는 그 방법 같은 거.
줄리엣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돌로레스가 말하기를 기네스 후작은 돌로레스에게 다른 사람의 정령을 빼앗는 법을 훈련시켰다.
고 했다.
그들이 최면에 걸린 척한 줄리 엣에게서 나비 마물의 통제권을 빼앗아 왔다고 확신한 것 역시 그런 훈련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아쉽게 됐네.
그러나 줄리엣은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돌로레스에 대한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었다.
“…….할아버지?”
“줄리엣.”
어쩐지 어수선하다 싶더니, 백작가의 작은 마당은 짐을 꾸리는 일군들로 가득했다.
줄리엣은 황망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다 물었다.
“떠나신다고요?”
“그래, 급히 처리할 일이 생겼단다.”
집으로 돌아오니 리오넬 르바탄이 떠날 채비를 마치고 줄리엣을 기다리고 있었다.
줄리엣은 머뭇거리며 외조부를 붙잡았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요?"
"미안하구나.”
줄리엣은 리오넬의 대답을 듣고서야 그가 수배자 신세였음을 떠올렸다. 몰래 줄리엣을 만나러 이곳으로 온 것 자체가 위험을 무릅쓴 일이었을 것이다.
'조르면 안 돼.'
에셀리드가 거실에 책을 잔뜩 쌓아 둔 채 줄리엣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걱정 마십쇼. 뭐, 어르신을 영영 못 뵙는 것도 아니고요.
그보다 아가씨는 저랑 같이 이걸 읽으셔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에셀리드는 테이블 위에 잔뜩 쌓인 책 더미를 툭툭 두드렸다.
“이게 뭐예요?”
“아가씨께서 부탁하신 자료들입니다.”
별다른 설명 없이도 줄리엣은 그것이 자신이 부탁한 아티팩트에 대한 정보임을 알아들었다.
그러나 잠시 책을 훑어보던 줄리 엣은 고개를 갸웃했다.
“에셀.”
"네. 뭐 문제 있나요?"
에셀리드는 뻔뻔하게 되물었다.
뺀질거리는 표정을 보아하니 뭐가 문제인지 아는 게 확실했다.
“이건 아이들 이야기 책이잖아요?”
인 책이거나 줄리엣도 읽을 수 있는 평범한 동화책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가씨랑 저는 고대 문자를 못 읽잖습니까. 해석하는 데는 두 달이 더 걸린답니다.”
그렇다고 그 기간 동안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 적어도 이야기 책이라도 읽자는 얘기였다.
줄리엣은 한숨을 내쉬며 책 한 권을 받아 펼쳤다.
어린 시절부터 익숙한 옛날이야기들이 가득했다.
**
엘리자베스 틸먼은 하루아침에 유명 인사가 되었다.
황후의 총애를 받는 미모의 시녀가 첫날부터 공공연히 줄리엣과 대립각을 세웠다는 소문이 돌자 줄리엣을 싫어하던 사람들은 특히 반겼다.
"여기, 이쪽으로 오세요. 엘리자 베스 양!”
심이 몰릴 리 없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틸먼은 정식 시녀라기 보다는 치료사에 가까웠다.
게다가 황후가 엘리자베스를 침이 마르도록 추켜세우기도 했고, '그' 줄리엣 모나드와 척을 졌다.
니 흥미가 돋지 않을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가 온 뒤로 마음 편히 잠들 수 있게 되었답니다. 이 얼마나 축복받은 능력인지!”
그래서 엘리자베스 틸먼은 손쉽게 사람들 사이에 섞여들 수 있었다.
덕분에 엘리자베스는 뭐든지 알수 있었다.
가령, 사교계에 떠도는 공공연한 소문이라거나.
“그분은 어떤 분이세요?"
“모나드 백작이요? 아.”
피식피식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줄리엣 모나드는 지난 수년간 사교계 사람들이 가장 헐뜯기 좋아했던 먹잇감이었다.
“대단한 여자죠, 정말."
“몇 년 동안이나 줄리엣 모나드가 칼라일 공작을 귀찮게 쫓아다녔답니다.”
“다른 여자들이랑은 다르게 끈질겼어요.”
한참 듣던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지금은 헤어진 상태인가요?”
"아, 그게…… 좀 애매해요."
“저는 헤어졌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지난번 연회장에서, 분명 다들 보셨잖아요.”
신나게 뒷담화를 하던 귀족들이 일순간 입을 다물었다.
칼라일 공작이 검을 빼 들고 윽박지르던 현장에는 이 자리에 참석한 귀족들 상당수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요. 그게 이상한 점이죠.”
“그럼 아직 헤어진 게 아닌 걸까요?”
“칼라일 공작이 한 번 이별한 여자를 받아 준 적은 없으니 아마도…….”
“맞습니다. 자그마치 7년 동안 공작을 지겹게 쫓아다닌 쪽은 줄리엣 모나드였으니까요."
“보는 사람이 낯부끄러울 정도였어요. 무슨 여자가 자존심도 없는지….”
사람들에 둘러싸인 엘리자베스가 문득 입구 쪽을 힐끔거렸다.
순간적으로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들이 방금 전까지 입에 올리던 줄리엣 모나드가 막 들어서고 있었다.
"어머, 뻔뻔하기도 하지.”
“역시 오늘도 참석했네요.”
소곤거리는 사람들을 아랑곳 않고 줄리엣은 말에서 내렸다.
사순절 행사에는 마차 대신 말을 타고 오는 것이 관례였다.
오늘 자리에 초대된 것은 황실의 최측근들이거나 유서 깊은 공신 가문의 후손들뿐이었다.
사순절을 앞두고 루체른에서 온 사절단을 환영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는 치유력이 굉장하답니다.”
줄리엣이 승마 트랙에 도착한 것을 확인하기 무섭게 황후는 주변의 사절단들에게 엘리자베스의 칭찬을 늘어놓았다.
"바렌에서 병든 사람들을 돌보던 엘리자베스를 우연히 보았지 지요. 마음씨도 어찌나 고운지."
“과찬이세요, 폐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사제가 아닌 사람이 치유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특히나 드물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줄리엣은 최근 들어 과거의 기억을 다시 한번 곱씹게 되었다.
아이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겁에 질려 도망치려던 줄리엣에게 손을 내밀었던 것은 다름 아닌 달리아였다.
“내가 도와줄게요.”
라며 친절하 하게도 도망칠 말까지 준비해 주었다.
어딜 보나 수상쩍은 친절이었지만 어리석은 과거의 줄리엣은 그녀를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듣기로, 동쪽 탑에 귀하게 모셔진 여자는 그녀와는 달리 밝고 순수한데다, 법황의 애정을 받는 놀라운 예언의 소녀라고 했으니까.
승마는 줄리엣의 몇 안 되는 장기였는데, 공교롭게도 말을 타고 도망치던 날에는 북부의 숲을 채 빠져나가기도 전에 미친 듯 날뛰는 말을 제어하지 못하고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직접 그녀에게 말을 내 준 여자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런 여자가 하필 줄리엣에게는 결코 잊지 못할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고 있는 게 과연 우연일까?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