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145화 (142/229)

145화.

돌로레스의 의문에 대답해 줄 수 없는 것은 줄리엣 역시 마찬가지였다.

줄리엣은 황후와 달리아가 앉아 있는 방향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일부러 외진 바깥 테이블에 앉은 덕분에, 안쪽의 사람들은 줄리엣이 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줄리엣은 수년 동안 달리아에 대해 생각해 왔지만, 달리아와 이런 곳에서 이런 방식으로 마주치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런.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니?”

다정하게 황후에게 약 쟁반을 가져다주는 달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추기경 님, 이 아이가 제가 요즘 아끼는 아이랍니다."

황후는 곁에 앉은 길리엄 추기 경에게 엘리자베스를 자랑했다.

“엘리자베스는 뛰어난 치유력을 가지고 있지요.”

“호오, 치유력을 말입니까?”

길리엄 추기경은 감탄하는 눈으로 재빨리 달리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거 보기 드문 인재로군요.”

그 광경을 지켜보던 줄리엣은 문득 의아해졌다.

'치유력이 있는데 왜 황후에게 약을 가져다주지?

치유와 처방을 함께하는 걸까?'

한 번 의심스럽기 시작하니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어차피 소용없을 거야. 증거가 없으니까.”

게다가 아무래도 달리아에게는 사람의 기억을 조작하는 능력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돌로레스는 달리아가 멀쩡히 황후의 곁에 있는 게 퍽 억울한 모양이었다.

"저, 그럼 돌로레스가 마차를 불러올게요. 아가씨는 여기서 잠시 기다리세요.”

돌로레스는 줄리엣의 답도 기다시에 물었다.

“…… 저 여자야?"

“저게 그 달리아 입니까?"

두 사람 모두 알려 준 적 없는데 용케 달리아를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테오와 에셀리드는 달리아가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최소한 줄리 엣이 그녀를 확인하러 왔다는 정도는 알았다.

“응. 그런데 지금 이름은 달리 아가 아니라 엘리자베스 틸먼이야.”

“그게 뭐야?”

“그냥 그렇대.”

“젠장. 더럽게 복잡하네.”

테오가 투덜거렸다.

그리고 주드 경이 확인해 준 바에 따르면, 놀랍게도 틸먼가 사람들은 '엘리자베스' 라는 이름의 막내딸이 있다고 말했다고 했다.

'기록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막 내딸 말이지.’

그건 꽤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틸먼 가문 사람들의 기억도 조작한 걸까?'

줄리엣은 달리아가 어떤 식으로 여기저기에 녹아들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기억을 조작하는 능력이라니.

추측이 맞는다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섬뜩한 능력이었다.

“그런데 돌로레스는 어딨어?"

“돌로레스? 그 여자는 왜?"

“돌로레스가 불러서 온 거 아니야?”

줄리엣과 테오가 눈싸움하듯 서로를 쳐다보자 에셀리드가 끼어들어 상황을 중재했다.

“다른 마차를 타고 먼저 돌아가겠다고 했답니다."

“…… 돌로레스가요?"

줄리엣이 미심쩍어 하자 에셀리 드가 확인해 주었다.

“예.”

줄리엣은 조금 걱정스러웠다.

혼자 돌아다니다 황궁에서 무슨 일을 당하면 어쩌려고?

달리아에 대한 적의를 불태우던

“아가씨를 위험에 빠뜨렸잖습니까. 솔직히 저는 아직도 꺼림칙합니다.”

“돌로레스는 이용당한 입장이니까요.”

그런데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던 테오가 불쑥 말했다.

“이상하다. 아까 그 여자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누구를?”

“저 달리 아란 여자 말이야.”

“달리아가?”

언제 봤다고 낯이 익어? 잠시 의아해하던 줄리엣은 이내 납득했다.

어쩐지 낯설지 않은 조합이더라니. 두 사람은 카르카손의 암시장에 잠입했을 때 달리아와 잠시 스쳐 지나간 적이 있었다. 테오는 생긴것과 달리 의외로 눈썰미가 좋은 편이었다.

"아!”

그러나 테오가 내놓은 대답은 은전혀 의외였다.

“기억났다, 어디서 봤는지.”

미친 법황, 제바스티안에게는 어릴 때 죽은 누나가 있었다.

“제노비아 말이야?"

"몰라. 그런 이름이었나? 어쨌든 그 여자애.”

제노비아는 손꼽히는 신성력을 타고난 천재였다. 하지만 그 재능 때문인지, 어린 나이에 화재사고로 죽었고 그녀의 신성력은 소울 스톤으로만 남겨졌다.

그 후 제바스티안은 죽은 누이의 소울 스톤을 이용해 법황 자리에까지 올랐고 말이다.

그들은 로켓 목걸이에서 죽은 제노비아의 초상화를 본 적 있었다.

“확실히 그렇군요."

줄리엣이 말도 안 된다고 코웃음치려는데, 에셀리드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초상화와 많이 닮았네요.”

“……하지만 저번에는 그 제노비아가 나랑 닮았다며?"

줄리엣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녀 역시 제노비아의 초상화를 봤었다.

“그래. 그래서 그 정신 나간 법황 놈이 너를 납치했잖아."

테오가 새삼 곱씹으니 열 받는다는 듯 씨근거렸다.

“그런데 어떻게 제노비아와 달리아가 닮았다고 할 수 있어?"

“글쎄, 묘하게도 두 사람 모두 그 죽은 제노비아라는 소녀와 닮았습니다.”

에셀리드가 줄리엣의 눈치를 살피며 재빨리 덧붙였다.

“줄리엣 양과 저 달리아라는 여자는 조금도 닮지 않았는데도요.”

줄리엣은 미간을 찌푸렸다. 전 전 생부터 악연이었던 상대와 닮았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아귀가 맞긴 했다.

줄리엣이 오랫동안 궁금해했던 의문점 중 하나였기도 했다.

전생의 삶에서, 왜 제바스티안은 그토록 달리아를 전폭적으로 지지했을까 하는 의문.

단순히 달리아가 가진 신성력이나 치유 능력 때문이라고만 생각하기에는 영 미심쩍은 부분이 있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말대로, 달리아와 제노비아가 닮았다면 설명이 돼.'

죽은 누이를 닮은, 그것도 치유력을 가진 달리아가 눈앞에 나타났다면 제바스티안은 그녀에게 매료되었을 게 뻔했다.

하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뭐, 세상에 닮은 사람이 셋은 있다니까요.”

줄리엣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자 에셀리드가 수습하듯이 얼버무렸다.

* *

줄리엣의 추측대로 돌로레스는 아직 황궁 안에 남아 있었다.

'흥, 내가 포기할 것 같아?'

줄리엣은 달리아를 잡을 방도가 없다고 했지만, 돌로레스는 달리 아를 가만 놔둘 생각이 없었다.

돌로레스는 그냥 돈을 받고 기네스 후작이 시킨 대로 했을 뿐인데, 감옥에 갇혀서 힘든 일을 겪어야 했다.

심지어 기네스 후작이 폭삭 망하는 바람에 잔금은 받지도 못했다.

그런데 달리아라는 수상한 여자는 기네스 후작의 계획을 사주했는데도 무려 황후의 시녀가 되었려면 어떻게 가야 하냐고 물으려고 했다.

그러나 걸음을 멈추고 돌로레스를 돌아본 여자는 뜻밖에도 그녀가 찾던 여자, 달리아였다.

"나 알지요?"

달리아를 단단히 벼르던 돌로레스가 그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때마침 달리아는 혼자 있었다.

달리아는 무표정으로 되물었다.

“내가 그쪽을 어떻게 알죠?"

"네에? 기네스 후작의 저택에서 봤었잖아요!”

그러자 금발의 달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를 기억한다고? 어떻게?"

"발뺌할 생각 말아요!"

설마 시치미를 뗄 생각인가 싶어 돌로레스는 손으로 허리를 짚었다.

“나 전부 기억하거든요? 당신이야말로 기네스 후작에게 헛바람을 넣었잖아?”

돌로레스는 줄리엣에게 기억을 추궁당했던 이후로 자신의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 남부 후작저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글로 적어 기록해 두었다.

덕분에 돌로레스는 달리아가 기네스 후작과 함께 무슨 짓을 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신이 부랑자와 고아들을 데려다가 산 채로 마력석을 만들라고 시켰잖아!”

그러나 지금은 엘리자베스라는 가명을 쓰고있는 수상한 여자는 돌로레스를 섬찟한 눈으로 빤히 보기만 했다.

“이, 이봐요?”

그 시선에 불편해진 돌로레스가 그녀를 다시 불렀을 때였다.

(쓸모없는 것.)

“그….”

돌로레스가 조금 겁을 먹고 주츰 뒷걸음질 치는 순간, 달리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탁한 목소리였다.

조금 전ㄲ자ㅣ와는 전혀 다른,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목소리가 겹쳐서 들렸다.

“누, 누가 도와….!”

겁을 먹고 달리아가 도움을 청하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찌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달리아와 눈이 마주친 돌로레스는 비명도 지르지 못할 만큼 놀라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 흰자위가 있었던 달리아의 눈이 검게 번들거렸다.

“아……아….”

돌로레스는 덜덜 떨면서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했다.

다음 순간, 돌로레스의 눈앞에 있는 존재는 더 이상 인간 여자의 형상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입을 쩍 벌린 거대한 노란 뱀이었다.

잠시 후.

우드득, 우드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희미한 비명이 잦아들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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