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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144화 (141/229)

144화.

*

이른 아침, 줄리엣은 남부에서 날아온 특별한 손님을 맞았다.

삐이.

“……이게 뭐죠?"

“전서 매입니다, 아가씨.”

남부에서 전령새가 도착했던 것이다.

잘 훈련된 전령새는 그녀를 보자 서신이 묶인 발을 척 하고 내밀었다.

보내온 이의 성정대로 편지라기 보다는 쪽지에 가까운 서신이었다. 내용도 길지 않았다.

[곧 돌아가니 위험한 짓 하지 말고 기다릴 것.]

레녹스가 보낸 그 짧은 전언에는 칼라일 공작 자신을 돌보는 말은 없었다.

그러나 줄리엣은 그 짧은 행간에서 그 자신은 멀쩡하니 걱정하지 말라는 무뚝뚝한 메시지를 단번에 읽어 냈다.

매가 도착한 것이 오늘 새벽의 일이었으므로 레녹스는 빠르면 하루 뒤, 늦어도 사흘 뒤에는 수도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별로 특별할 것 없는 편지였다.

거기까지는.

'문제는….'

[아무도 믿지 마. 내가 돌아갈때까지.]

추신처럼 서신 말미에 휘갈겨 쓴 짧은 문장이었다.

줄리엣은 그 의미심장한 마지막 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아는 레녹스 칼라일은 은이런 말을 쉽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도'의 범위에는 가족과 친구들도 포함되는 걸까?

잠시 생각하던 줄리엣은 고개를 들었고 그녀를 열렬히 쳐다보던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공작가의 비서들이 편지에 뭐라고 써 있는지 궁금해 죽겠다는 는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오고 계신대요.”

“그리고요?”

“늦어도 이틀 내에는 도착할 거고, 다친 데는 없나 봐요.”

“…… 그, 그게 다입니까?"

“네. 곧 도착하니까, 그때까지 돌아다니지 말고 얌전히 집 안에 있으라시네요.”

“허, 전하다우시군요."

“그렇죠.”

줄리엣은 종이를 깔끔하게 반으로 접었다.

공작가의 가신들은 서둘러 다른 서신들도 차례로 열어보았다. 그러나 줄리엣 앞으로 온 내용 이상의 특별한 말은 없었다.

“부상자도 없답니다.”

“한시름 덜었군요.”

“어쨌든 무사하시다니 다행입니다. 아가씨도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줄리엣은 빙그레 웃었다.

“걱정 안 해요.”

"예?"

줄리엣은 그의 안위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돌아온 다음의 일을 고민하고 있었다.

'말해 줘야겠지.'

그가 돌아오면, 줄리엣은 그에게 알려 줘야 할 일이 있었다.

지금 황궁에 누가 와 있는지.

줄리엣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북부는 겨울이 한창일 텐데, 대륙 서남부에 위치한 수도는 벌써부터 봄이 오는 것처럼 훨씬 따뜻해졌다.

그가 찾던 달리아는 정작 남부가 아닌 수도에 있었다.

레녹스가 수도로 돌아와 달리아와 마주치게 된다면 과연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레녹스는 줄리엣에게 절대 호위없이 나돌아 다니지 말라고 당부했었지만 줄리엣은 돌아오기 전에 반드시 확인해 둬야 할 게 있었다.

예를 들어 달리아가 정말로 기네스 후작을 도와 그녀를 해치려고 했던 배후인지, 그녀의 목적은 무엇인지 등등.

그러나 잠시 외출하려는 줄리엣에게는 상당히 거창한 호위 두사람이 따라 붙었다.

메리골드 상단의 마법사, 에셀리드와 ㅈ줄리엣의 이종사촌인 테옦자ㅣ 그녈르 따라 나선것이다.

“왜 와?

“넌 왜 따라와?"

“그냥 고맙다고 하면 안 되냐?"

테오가 투덜거렸다.

오늘 줄리엣의 목적지는 황궁이었다. 조용히 황궁에 들러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그들을 태운 마차는 머지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러나 허리에 검을 찬 테오와 에셀리드 두 사람은 황궁 안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호위는 밖에서 대기하셔야 합니다.”

황궁의 경비대장이 그들을 저지했다.

“뭐? 그게 무슨 헛소리야?”

“테오.”

테오가 인상을 썼지만 줄리엣은 그를 밀어내면서 힐끔 궁 안을 건너다보았다.

얼핏 보기에도 법황을 상징하는 진홍색 깃발이 내걸려 있었다.

만월제 기간이라 법황의 사절단이 신성한 불씨를 가져온 모양이었다.

법황의 사절단이 황궁에 머무는 동안은 황궁 내에 날붙이는 반입이 금지되었다.

"괜찮아. 둘이 다녀올게요."

뭐라 항의하려는 테오를 에셀리 드가 만류하는 사이, 줄리엣은 보닛을 쓴 하녀와 함께 황궁의 의정문을 통과했다.

“동행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경비대장의 물음에 커다란 보닛을 쓰고 있던 여자가 슬쩍 얼굴을 보였다.

줄리엣이 재빨리 대답했다.

“백작가의 하녀예요.”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경비대장은 별 의심 없이 줄리 엣과 보닛 쓴 하녀를 들여보내주었다.

황궁 안으로 들어온 직후 하녀가 보닛을 벗으려 하자 줄리엣이 그녀의 손을 슬쩍 붙잡았다.

“왜요?”

“달리아가 너를 알아보면 곤란해 질거야.”

그러자 돌로레스는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보닛을 다시 썼다.

보닛을 쓰고 줄리엣의 하녀로 위장한 것은 돌로레스였다.

“그 여자가 돌로레스를 알아볼까요?”

“달리아가 기네스 후작을 조종한 그 여자가 맞는다면 그럴 거야. 그러니까 조용히 얼굴만 확인하고 나오자.”

기네스 후작의 양녀였던 돌로레스는 시계탑에 갇혀 있다가 줄리 엣이 꺼내 준 뒤로 백작가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줄리엣은 후작에게 매수되어 자신을 해치려 했던 돌로레스에게 딱히 호의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악의도 없었다.

무엇보다 돌로레스는 오늘 그녀를 위해 해 줄 일이 있었다.

돌로레스는 달리아가 후작을 조종해서 줄리엣을 해치려 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줄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

줄리엣은 하녀로 위장한 돌로레스와 함께 황후의 거처로 향했다.

“악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욕망을 경계하고 몸을 정갈히 하십시오!”

진홍색 튜닉을 입은 기사들이 돌아다니면서 외쳤다. 추기경들을 호위하는 팔라딘이었다.

봄의 만월제는 루체른에서 파견된 고위 성직자가 신성한 불씨를 가지고 황실을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그 때문인지 여기저기에서 사제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올해는 만월제가 좀 빠른 편이군요.”

"듣자 하니, 올해는 법황 성하께서 행차하신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궁정 관료들이 그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매해 이 시기에 수도에 없었던 줄리엣은 당연히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에셀리드가 물어다준 소식 중에는 그런 얘기도 있었다.

"황실에 대한 여론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잇따라 뒤숭숭한 사건들이 끊이질 않아서요.

황제가 무리해서 큰 규모의 행사를 열고 황실의 위엄을 과시하려고 한 것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는 거였다.

"신전에서 예언서를 찾아냈다는 소문도 들립니다.

그런 얘기도 있었다.

만약 예언서의 존재가 진짜로 밝혀진다면 황제는 꽤 곤란한 지경에 처해질 터였다.

가뜩이나 왕권을 위협하는 신전이었는데, 이런 시기에 예언서까지 등장한다면 황제에게는 좋을게 없었다.

“어머, 모나드 백작님.”

황후궁에 가까워지자 바깥 뜰에 늘어선 테이블들이 보였다.

외진 테이블에 앉아있던 귀부인들이 줄리엣을 발견하고 먼저 알은체했다.

몇몇은 지난번의 어색했던 만남을 상기하며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오실 줄 몰랐네요."

“모나드 백작님도 축원을 받으러 오셨나요?”

줄리엣은 고개를 갸웃했다.

“축원이요?”

“네. 지금 추기경께서 황후 폐하와 이야기를 나누고 계세요.”

활짝 열린 테라스 창 너머로 황후의 모습이 보였다. 황후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사람은 진홍색 사제복을 입은 추기경이었다.

그들의 주변에는 궁정의 실세인 시녀장을 비롯해 황후의 측근들이 모여 있었다.

줄리엣은 황후의 바로 옆에서 시중을 드는 진한 금발의 여자를 발견하고 눈을 깜빡였다.

듯 안쪽을 힐끔거렸다.

다들 멀리서 온 고위 성직자로부터 축원을 받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추기경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은 황후와 가까운 귀부인들 뿐이었다.

그러나 축원에는 관심이 없었던 줄리엣은 일부러 외진 자리를 골라 앉았다.

그때였다.

돌로레스가 흥분해서 줄리엣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맞아요, 저 여자예요!"

돌로레스가 줄리엣에게 속삭였다.

“후작이 극진히 모시던 그 여자가 맞아요!”

주위의 귀부인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어머, 그 숙녀분은 누구시죠?”

“.……제 하녀랍니다."

줄리엣은 귀부인들에게 짧게 설명하고는 돌로레스에게 소곤소곤 물었다.

“확실히 아는 얼굴인 거야?”

"네! 돌로레스가 분명 봤어요!"

돌로레스는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던 여자를 다시 보고는 놀라고 흥분한 것 같았다.

“기네스 후작이 저 여자를 얼마나 떠받들었다고요!”

돌로레스는 확신에 찬 어조로 달리아가 후작가에 머물 때의 일을 늘어놓았다.

“저 여자가 후작에게 사람을 제물로 마력석을 만드는 법을 알려준 사람이에요.”

줄리엣은 그런 돌로레스를 잠시 바라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돌로레스는 달리아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런데 먼발치에서 달리아를 보자마자 기억을 고스란히 되찾은 것이다.

'그건 나랑 똑같네.'

줄리엣 역시 비슷한 경험을 했다. 기억 속의 달리아가 어떻게 생겼는지 혼란스러워 하던 것이 거짓말처럼 달리아를 다시 본 순간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동쪽 탑에 머물던 달리아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었는지도.

돌로레스의 말은 장황하긴 했지만 핵심은 기네스 후작이 거의 신을 모시는 것처럼 달리아의 말한마디 한마디를 숭앙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저 여자가 어떻게 황궁에 있는 거죠?”

돌로레스가 문득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게 말이야.”

줄리엣의 눈매가 저절로 가늘어졌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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