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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143화 (140/229)

14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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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녹스 칼라일은 깊고 거대한 공동(空洞) 앞에 서 있었다.

후작가의 저택이 무너진 자리에는 크고 텅 빈 구멍만이 남았다.

빛이 닿지 않을 만큼 어두운 공동이 그의 시야를 집어삼켰다.

이윽고 그는 또다시 익숙한 풍경 안에 서 있었다.

[당신도 나만큼 아팠으면 좋겠어.]

그해 북부의 여름은 쾌청하고 선선했다. 그러나 적어도 공작성의 사람들에게는 지옥 같은 여름이었다.

아이를 잃은 후 줄리엣은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잦아졌다. 줄리엣은 울거나 소리치는 대신 보다 효율적으로 그를 괴롭히는 법을 터득했다.

스스로를 돌보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작게는 성 안의 유리 장식품을 전부 깨뜨려 버린다거나, 화원의 장미를 맨손으로 죄다 꺾어 놓는 다거나.

덕분에 그는 한시도 줄리엣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것은 어떤 예감에 가까웠다.

조금만 눈을 떼면 줄리엣이 거기에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제정신이냐고 그가 화를 내거나다그치면 줄리엣은 희미하게 웃기만 했다.

줄리엣이 미약하게나마 웃는 것은 오직 그때뿐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정말로 무엇이 그를 화나게 하는지 알지 못했다.

사실은, 레녹스는 깨진 유리나 망가진 화단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 것은 얼마를 주든 무가치했다.

그는 다만 깨진 유리에 다친 맨발이 신경 쓰였고, 장미 가시에 찔린 손가락이 눈에 밟혔다.

그 누구 앞에서도 머리를 조아려 본 적 없는 남자는 발을 다친 여자의 침대 아래 기꺼이 무릎을 꿇었다.

어느 여름날의 새벽, 잠든 여자의 발목에 붕대를 고쳐 감아 준 남자는 불현듯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잠든 여자의 고요한 얼굴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는 것은 어떤 유치하고 불가해한 감정 때문이었다.

언제든 내키는대로 잘라낼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착각이었음을.

그 자신조차도 지나치게 늦게 깨달은 감정이었다.

말 모르는 어린 짐승처럼 그의 분노에만 반응하는 줄리엣에게 강요하기에는 너무 늦어 버린 감정이기도 했다.

기네스 후작은 그녀에게 매질을 했지만 그녀에게 수없이 보이지 않는 생채기를 입힌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기 싫어.]

줄리엣은 피부가 드러나는 것을 싫어했다. 더운 날에도 긴 옷을 고집할 정도였다. 정확히는 집요한 학대의 흔적을 남들 눈에 보이고 싶지 않아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줄리엣은 그런 것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더는 흉터를 부끄러워하며 그에게서 감추지도 않았고, 앙상하게 마른 등과 어깨를 내보이는 것조차 아무렇지 않아 했다.

매해 어미 잃은 눈 여우 새끼들을 몰래 보살피던 것조차 그만두었다. 레녹스에게는 그것이 어떤 징조로 느껴졌다.

[차라리 죽여 주세요.]

아무것도 담지 않은 메마른 입술로, 어느 날 줄리엣이 말했다.

그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한마디였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왜 자신이 줄리엣의 표정 하나, 말 한마디에 절절히 목을 매고 있는지.

저를 향해 맹목적인 애정을 보내던 여자는 더 이상 없었다.

그가 그녀의 발치에 엎드려 애정을 구걸할지언정 줄리엣은 차가운 비웃음 한 조각조차 내주지 않을 터였다.

직접 긋지 않았다 뿐이지 줄리 엣을 궁지로 내몬 것은 그 자신이었다.

마음을 다친 상처도 피부에 새겨진다면 그녀를 학대했던 후작과 그는 다를 바 없었다.

줄리엣은 살고자 하는 의지를 를완전히 잃었다.

그녀가 서서히 말라 죽어 가는 것을 알았지만, 어리석은 남자는 끝내 그녀를 놓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 이후, 그는 닫힌 방문 앞에서 몇 번이고 서성였지만 한 번 마음을 닫아 버린 여자가 그를 돌아봐 주는 일은 영원히 없었다.

(한심하긴.)

레녹스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너는 아직도 거절당할까 봐 무섭지. 안 그래?)

우아하게 꼬리를 살랑거리는 집채만 한 흑표범이 빙글거렸다.

(그래, 그 보관만 손에 넣으면 이번엔 네 여자를 살릴 수 있을 것 같아?)

“……입 다물어.”

검은 표범은 즐거운 듯 킬킬거렸다.

(글쎄. 설령 그 뱀을 처리한다고 한들, 그 여자가 너를 용서할지는 별개의 문제잖아. 그렇지 않은가?)

아티팩트와 계약을 한 인간들은 얼핏 보기엔 아무 대가 없이 운좋게 강력한 힘을 손에 넣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레녹스는 분명히 알았다.

이 차원 너머의 교활하고 사악한 존재들은 대가 없이 무언가를 주는 법이 없다.

죽을 때까지 환청과 환각에 시달리든지, 혹은 대대로 이어지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대개 악령들이 좋아하는 것은 공포나 고통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었다.

레녹스는 이 교만한 표범이 자꾸만 고통스러운 과거를 끄집어내는 것 역시 그 때문이리라 추측했다.

“전하.”

레녹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부관이 그를 보고 있었다.

공작이 한참 동안 저택이 무너진 자리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염려스러웠던 모양이다.

"괜찮으십니까?”

“유난 떨 것 없어.”

레녹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누가 죽은 것도 아니잖나.”

기사들 또한 그를 따라 조금 전까지 후작가의 저택이 있던 곳을 쳐다보았다.

그의 말대로였다.

칼라일 공작의 일행은 자칫 붕괴에 휩쓸릴 뻔했지만 제 때에 밖으로 나온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운 좋게 부상자조차 없었다.

“붕괴는 지반이 약화되어 그런 것 같습니다.”

“최근 남부에서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다는군요.”

“설마하니 이 정도 규모의 저택이 무너질 거라고는…….”

침착하게 보고 했지만 기사들의 안색은 심상치 않았다.

그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칼라일 공작의 남부행은 조용히 진행되었다. 그런데 타이밍 좋게 그가 후작저에 발을 들이기 무섭게 저택이 붕괴하다니.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하지 않았는가. 누군가 인위적으로 그의 목숨을 노렸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었다.

"기네스 후작이 꾸민 짓일까요?”

“하지만 후작은 실종 처리되었잖습니까.”

공식적으로는 실종 상태였지만, 기사들은 기네스 후작이 더 이상 뭔가를 꾸밀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

기사들이 짐짓 심각한 의견을 주고받는 동안 레녹스는 잠시 아무것도 없이 뻥 뚫린 거대한 공동을 들여다보았다.

(이야, 옛날 생각나고 좋은걸.)

그의 곁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은 검은 표범의 모습을 한 악령이었다.

(새삼스레 옛날 생각나지 않아?

음?)

검은 표범은 입맛을 다셨다.

추억에 잠긴 것은 흑표범 쪽인 것 같았지만, 레녹스는 악령이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약 스무 해쯤 전, 그는 온갖 마수가 들끓는 전쟁터 한복판의 마굴 안에 내던져졌다.

그 마굴의 모습 또한 이것과 비슷한 형태였다. 훨씬 비좁고 무시무시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내는 동안 그는 칼라일가의 핏줄이 얼마나 먹음직스러운 것인지, 또 얼마나 위험천만한 악령들을 불러낼 수 있는지를 배웠다.

끝이 어딘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지하도 인상적이었지만, 그보다 놀라운 것은 구멍을 중심으로 그려진 동그란 모양의 자국이었다.

조금 전, 저택이 붕괴하는 바람에 후작저의 지하에 남은 흔적 또한 드러났다.

“그러고 보니…….”

한눈에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그것은 마법사들이 사용할 법한 소환진이었다.

“이건 어떤 종류의 소환진일까요?”

주변의 숲에서부터 시작된 둥근원이 저택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아예 저택 전체가 거대한 소환진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소환진 내부에는 뱀처럼 보이는 동물을 형상화한 듯 형이상학적인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 가루처럼 떨어져 있는 진홍색 투명한 돌조각들이 눈에 띄었다.

밀란 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기네스 후작이 팔아 치우던 인공 마력석인 것 같습니다."

인위적인 진홍색을 띠는 돌멩이는 마력석의 흔적이었다.

기네스 후작은 일찍이 마력석광산을 발굴하는 척하고, 사실은 고아나 부랑자들을 잡아다 인체로 마력석을 만드는 금지된 술법을 사용했다.

굳이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대부 분의 인간의 몸에는 조금이라도 마력이 있기 마련이었다. 진짜 그걸 실행에 옮기는 것은 미친짓이었지만.

(그걸 누가 알려 줬다고 생각해?)

어느 틈에 가까이 다가온 검은 표범이 의미심장하게 눈을 빛냈다.

(인위적으로 마력석을 만들어내는 방법 말이야.)

레녹스는 웃음기 없이 읊조렸다.

“이걸로 불러냈군.”

"예? 무얼 말입니까?"

“뱀의 본체.”

“.....… 뱀이요?”

“그래.”

아마 기네스 후작이 깨운 악령은 후작에게 인위적으로 마력석을 만드는 법을 알려 줬을 것이다. 대충 부자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든지.

악령들이 쓰는 가장 기본적인 수법이었다. 사악한 존재들은 인간의 가장 약한 부분이나 욕망을 절묘하게 파고드니까.

멍청한 기네스 후작은 인공적으로 만든 마력석이 자신의 재산을 불려 줄 거라고 기뻐했겠지만 실상은 이용당한 것에 불과했다.

어디까지나 악령의 본체는 다른 차원에 있기 때문에, 아무리 대단한 신격이라고 한들 이곳에는 과도하게 개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인간들의 혼을 대가로 바치면 불완전하지만 본체를 소환할 수 있지.)

그 대화를 듣고 있던 검은 표범이 음침하게 웃었다.

그리고 후작이 무수한 사람을 희생시켜가며 만든 마력석들은 후작이 불러낸 악령의 힘을 키우는 데 쓰였을 것이다.

하필 그의 계약자인 레녹스 칼라일은 악마와 상종하지 않으려드는 인간이라, 결코 허락하지 않을 행위였지만.

악령에게 권한을 마음껏 줘 봤자 시도 때도 없이 환영을 보게 되거나 정신이 피폐해져서 죽어버리기만 하므로 그건 퍽 현명한 태도라고 할 수 있었다.

기네스 후작이 그런 것을 알 리 없었지만, (우리는 말할 수 없게 되어 있어. 약속이니까.)

검은 표범은 꽤 기분이 좋은 듯 꼬리를 살랑거렸다.

(하지만 우리 중에는 유독 인간을 증오하다 못해 아예 닮아 버린 녀석이 있지.)

레녹스는 검대에 묶어 둔 매듭을 만지작거렸다.

공작가의 기사가 말하기를, 줄리엣이 프란 부부에게 딸이 있느냐 물은 적 있다고 했다.

그 말인즉, 그가 알지 못하는 과거에 줄리엣이 달리아와 접촉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가 가장 바라지 않는 전개였다.

보관은 그를 이곳으로 불러내기 위한 미끼에 불과하고, 사실은 과거처럼 줄리엣과 접촉하기 위해 일을 꾸민 거라면?

삐이이이.

활강한 전서매가 우아하게 기사의 팔로 착지했다.

“밀란.”

"예, 전하.”

매를 팔에 앉힌 기사가 그를 돌아보았다.

“성에 사냥 준비를 하라고 전해."

밀란은 귀를 의심했다.

“사냥이요?”

“그래.”

말에 오른 칼라일 공작이 출발채비를 서두르며 대답했다.

하지만 밀란은 당황한 얼굴로 로되물었다.

“무슨 사냥 말씀이십니까?”

성이라고 함은 북부를 가리켰다. 하지만 갑자기 사냥이라니?

“뱀을 잡으러 가야지."

그러나 고삐를 바투 쥔 칼라일공작의 대답은 담백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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