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왜, 왜 이러세요, 아가씨!"
청보라색 눈을 가진 여자가 울먹였다.
잠시 동안 줄리엣은 그녀의 옷소매를 붙든 채 얼어붙어 있었다.
틀림없는 달리아였다.
어떻게 생겼는지 흐릿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거짓말처럼, 줄리엣은 달리아와 몇 번이고 마주쳤던 순간들을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줄리엣이 달리아를 향해 채 뭐라고 묻거나 말하기도 전에, 달리아가 지른 비명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왔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에요?"
그러나 달리아는 줄리엣을 처음보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제가 줄리엣 아가씨께 뭔가 잘못을 저질렀나요?"
"아, 아파요! 모나드 영애……!"
옷소매를 붙잡았을 뿐인데 손목이라도 비틀린 것처럼 여자가 타이밍 좋게 울먹거렸다.
“모나드 백작! 갑자기 무슨 소란인가?”
당황한 황후가 달리아의 비명에 자리에서 일어나자 궁정 시녀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 손 놓게, 모나드 백작!"
황후의 노성에 시녀장이 얼른 줄리엣의 어깨를 끌어당겼고 그 바람에 그녀는 조금 비틀거렸다.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차마 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괜찮으냐?”
"엘리자베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줄리엣이 여자를 노려보았다.
'달리아가 아니라?'
줄리엣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래, 이 아이 이름은 엘리자 베스 틸먼일세.”
그 틈에 줄리엣의 묘한 박력에 눌려서 다가오지 못하고 있던 황후가 얼른 끼어들었다.
“엘리자베스는 내가 바렌에서 만나 데려온 아이일세. 치유력이 뛰어나 내 시녀로 삼고 싶다고 제안했지.”
그럼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고?
줄리엣은 잠자코 엘리자베스라는 여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
왜 그런 이름을 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분명 달리아였다.
"엘리자베스의 가문인 틸먼 자작가 역시 훌륭한 가문일세."
황후는 줄리엣을 꾸짖듯 말했다.
“모나드 백작가만큼은 아니라도, 엘리자베스 역시 귀한 가문의 영애란 말이야!"
황후는 완전히 달리아, 아니 엘리자베스의 역성을 들기로 한 것 같았다. 황후는 아예 줄리엣을 지위가 낮은 황후의 시녀를 괴롭힌 악당 취급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게 무슨 일이냐니까?
엘리자베스, 네 입으로 말해 보렴.”
황후가 떨고 있는 엘리자베스를 향해 달래듯 말했다.
“저, 저는 그저 황후 폐하께 약을 가져다 드리려 했을 뿐인데…… 이쪽의 아가씨께서.”
줄리엣은 잠시 실소를 터뜨렸다. 은쟁반을 떨어뜨리는 소리가 제법 컸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곳이 황궁 한복판의 홀이기 때문인지.
어느 틈에 구경꾼이 잔뜩 늘어나 있었다.
줄리엣은 이 상황이 어떻게 보일지 깨달았다.
약 쟁반을 나르던 황후의 시녀.
그리고 어리고 죄 없는 시녀에게 시비를 건 평판 나쁜 공작의 정부.
좀처럼 보기 드문 구경거리 일 일것이다.
부축해 주는 시녀들에게 둘러싸인 엘리자베스가 순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제가 모나드 영애께 결례를 범했나요? 그렇다면 부디 용서를…….”
“나를 몰라요?"
“네?”
"아까부터 나를 모른다는 듯 굴고 있잖아요.”
줄리엣이 표정 없는 얼굴로 재차 엘리자베스라는 여자에게 물었다.
"우리, 만난 적 없나요?"
“네에?”
엘리자베스가 세상에서 가장 무고한 얼굴로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걸로 충분한 대답이 된 듯했다. 만난 적 없다는 간접적인 시인이었다.
“그만하게, 모나드 백작!"
황후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엘리자베스는 이제 내 시녀이자 치료사일세. 이 이상의 무례는 허락하지 않겠네.”
황후가 윗사람답게 위엄 있게 혀를 찼다.
“모나드 백작이 사람을 착각한 게 아닌가?”
지나가던 궁정 귀족들과 심부름하는 시종들까지 먼발치에서 목을 빼고 구경하고 있었다.
줄리엣은 문득 싱긋 웃었다.
“네. 그런가 봅니다. 폐하.”
여태까지 집요하게 황후의 시녀를 몰아붙이던 것과는 정반대로 명쾌한 시인이었다.
뜻밖에도 줄리엣이 순순한 태도로 물러나자 황후는 조금 당황하면서도 위엄 있게 명령했다.
“……흠, 그럼 엘리자베스에게도사과하게.”
“흉한 모습을 보여드려 송구해요, 폐하."
줄리엣이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흠잡을 데 없는 태도로 먼저 황후에게 예를 갖추자 황후는 조금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다음 줄리엣은 방향을 바꿔 다른 시녀들에게 부축받고 있는 달리아, 그러니까 엘리자베스에게도 고개를 숙여 보였다.
“결례를 범했어요, 엘리자베스틸먼 양.”
“아, 저는 괜찮.......”
“그런데.”
고개를 반짝 든 줄리엣이 순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나를 몰라요?"
“모나드 백작!”
황후가 기막히다는 듯 노성을 질렀다.
줄리엣이 고개를 조아려 사과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구경꾼들이 뜻밖의 상황 전개에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백작님,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말씀해주시면 고칠게요.….”
엘리자베스의 커다란 청보라색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황후 폐하의 앞에서 심한 말은 삼가 주세요. 그건 폐하의 권위에 해가 되는 일인걸요.”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의 간청에도 줄리엣은 뻔뻔한 얼굴로 그녀를 싸늘히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누가 봐도 이 상황에서 나쁜 것은 가여운 시녀를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트집을 잡아 괴롭히는 못된 줄리엣 모나드였다.
“저기, 모나드 백작님……….”
보다 못해 그녀에게 친절했던 귀부인들이 줄리엣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릴 정도였다.
그러나 줄리엣은 자신이 얼마나 악독하게 보이든지 상관 없었다.
“그러니까 나를 만난 적도, 알지도 못했다는 거죠?”
아주 예전부터, 줄리엣은 그런건 신경 써 본 적도 없었다.
“그렇다면 확실히 이상하네요.”
줄리엣의 붉은 입술이 그림 같은 호선을 그렸다.
“네?”
“엘리자베스 틸먼 양은, 내가 붙잡은 순간 나를 '줄리엣 아가씨'라고 불렀잖아요. 그리고 '모나드 영애' 라고도 했고요.”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화를 내던 것도 잊고 황후가 의아하단 듯 물었다.
“어머, 많이 이상한 일이지요, 황후 폐하.”
줄리엣은 생글생글 웃으며 태연히 대꾸했다.
"엘리자베스 양은 바렌 출신이라 황도 사교계에는 처음이라고 들었어요. 맞나요?"
“그, 그런데?”
“그런데…… 저를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다는 아가씨가 첫눈에 정확히 제 이름과 얼굴을 알아보았으니까요. 이 많은 귀부 인들 틈에서요.”
“드, 듣고 보니 그렇네요?"
“분명, 황후 폐하께서 모나드백작의 본명을 호명하시기 전부터 그렇게 불렀지요?”
"모나드 양의 이름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하나둘씩 귀부인들이 수긍하기 시작했다. 좌중이 술렁이기 시작하자 가장 당황한 것은 황후였다.
정작 엘리자베스라는 시녀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줄리엣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그런 억지가 어디 있나, 모나드 백작! 우연히 들어서 알았을 수도 있지. 아니 그런가?"
줄리엣은 당황하는 황후를 향해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어차피 줄리엣은 황후를 괴롭힐 생각은 없었다.
살기등등하게 줄리엣을 노려보는 달리아의 표정이면 그녀에게는 충분한 답이 되었다.
“물론 그렇죠. 타당하신 지적이세요, 폐하.”
줄리엣은 싱긋 웃은 다음 다시 한번 우아하게 절을 했다.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흠잡을 데 없는 우아한 동작이었다. 따르는 시종 하나 없었지만 누구도 감히 그런 그녀를 붙잡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곧장 황궁 밖으로 나온 줄리엣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황궁 밖에서 대기 중이던 마차에 올라 탔다.
'달리아가 치료사라고?'
당연하지만 이전 생에서는 없었던 일이었다.
전생에서 달리아를 둘러싼 소문은 워낙 많았지만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그녀가 기적을 행하는 소녀라는 것이었다.
강력한 치유력을 가진 사제는 언제나 귀했다. 그런데 달리아는 사제도 아니면서 강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었고, 덕분에 법황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최소한 달리아가 치유력을 가지고 있는 건 맞는 걸까.'
마차 안에서 줄리엣은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전생에 달리아를 지지해 주던 법황 제바스티안이 이번 생에서는 가짜라는 것이 들통나 쫓겨났다.
그래서 달리아가 지금껏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것뿐이고, 지금은 황후의 비호를 업고 등장한 거라면?
'기네스 후작 다음은 황후야?'
줄리엣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자베스 틸먼이라니.
감쪽같이 새 신분과 이름으로 등장했으니 달리아는 기네스 후작과의 연관성 또한 부정할 게 틀림없었다.
"도착했습니다, 백작님.”
"아.”
마차가 멈춰 선 다음 고개를 든 줄리엣은 문득 실수를 깨달았다.
목적지를 제대로 말하지 않은 탓에 마부가 습관적으로 그녀를 백작저가 아닌 공작가의 저택으 으로 안내한 것이다.
줄리엣은 마차를 돌리라고 할까했지만 마차를 알아보고 뛰어오는 기사를 발견하고 마차에서 내렸다.
“주드 경.”
“예, 줄리엣 양.”
줄리엣은 마중 나온 주드를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틸먼 자작가를 알고 있어요?”
그러자 주드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어디 보자, 틸먼 자작이라. 중부의 기사 가문 아닙니까?"
“그렇죠?”
기억이 맞는 것을 확인한 줄리 엣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들어 본 적 있어요.”
엘리자베스 틸먼.
달리아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이름 중 틸먼이라는 가문명은 최소한 진짜였다.
“혹시 그 가문에 대해 알아봐줄 수 있을까요?"
“어렵지 않지요. 뭐가 궁금하십니까?”
“틸먼 자작가에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의 딸이 있는지요."
“예, 그러지요.”
주드는 어쩐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으려던 줄리엣은 그제야 칼라일공작저가 묘하게 어수선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줄리엣 양!”
다소 어색하게 주드가 줄리엣이 앞을 가로막았다.
“제가 백작가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
줄리엣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일인데요?"
"아…… 별일 아닙니다.”
주드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그는 거짓말에 소질이 없었다.
"주드 경.”
“……줄리엣 양께 알리지 말라고 하셨다고요!”
줄리엣은 멈칫했다.
“레녹스…… 전하께 무슨 일 있나요?”
안절부절못하던 주드는 줄리엣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더 버티지 못하고 결국 실토했다.
“주군께서 사고를 당하셨답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