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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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념체의 효과는 놀라웠다.
악착같이 자신은 죄가 없다며 주장하던 기네스 후작은 사념체에게 잠식당하는 순간 모든 것을 토설했다.
자아를 상실한 기네스 후작은 자백제라도 맞은 것처럼 뭐든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했다.
딱 하나를 제외하고는.
"달리아는 어디에 있어?”
질문을 바꿔 달리아를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그녀가 누구인지 등등을 물었다.
하지만 기네스 후작은 달리아에 관한 질문에만은 대답 대신 격렬한 발작을 일으켰다.
“거부 반응일 겁니다.”
후작을 신문하는 자리에는 메리골드상단의 마법사, 에셀리 드도 동석해 있었다.
“아무래도 누군가 인위적으로 후작의 기억에 손을 댄 것 같군요.”
에셀리드는 심각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희한하죠. 정신 조작은 몹시 위험하고 어려운 술법인데요."
줄리엣은 불과 얼마 전만 해도기네스 후작이 달리아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다만 짐작 가는 것은 있었다.
돌로레스가 달리아에 대한 기억을 모조리 잊었던 것처럼, 후작역시 그렇게 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고작 하룻밤 사이에.
"이상한 일입니다. 사념체를 이용한 보름달의 저주는 무척이나 강력한 고대의 주술인데요."
에셀리드가 투덜거렸다.
“기억을 못 한다는 건 말도 안됩니다. 만약 누군가 후작의 기억을 조작했다면…… 그건 사념체보다 강력한 힘이라는 거죠.”
에셀리드가 호기심으로 눈을 빛냈다.
“달리 아라…….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도 그 이름을 들은 적 있습니다.”
“그랬죠.”
줄리엣이 싱긋 웃었다.
돌로레스에게 달리아를 아느냐 .
고 묻던 자리에 에셀리드도 있었다. 에셀리드는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달리아가 대체 누굽니까?”
“음…… 어떤 여자예요.”
줄리엣은 조금씩 생각을 정리하면서 말했다.
실은 줄리엣은 갈수록 달리아에 대해 자신이 놀랄 만큼 아는 게 없다는 걸 실감하는 중이었다.
“아직 저랑은 만난 적이 없는 데, 어쩐 일인지 그쪽도 저를 알고 있는 것 같네요.”
알쏭달쏭한 말에 에셀리드는 인상을 구겼다.
“혹시 마법사인가요, 그 여자?”
"그럴지도 몰라요.”
줄리엣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의심이 아니라 확신 단계였다. 에셀리드의 말을 빌자면, 강력한 고대 저주를 이겨낼 만큼 강한 마법사일지도 몰랐다.
돌로레스에 이어 기네스 후작까지.
달리아가 마법사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녀가 사람의 기억을 마음대로 왜곡하고 지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줄리엣은 지금껏 막연하게 공작가의 가보를 되찾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그에 따른 의문이 해소될 거리고 생각했다.
'보관을 포기하고 달아난 걸까?
후작이 몰락해서?'
하지만 레녹스가 보관을 되찾았다는 데도 의문이 해결되기는커녕 정체는 점점 더 모호해졌다.
프란 부부의 딸이란 것은 기억의 오류이거나 착각이라고 치더라도, 줄리엣은 이제 달리 아가 진짜 존재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럼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네? 뭘요?"
거기까지는 생각해 두지 않았다.
"아티팩트가 하나만 있는 게 아닌 걸 확인하셨잖습니까.”
"아…… 그 노란 뱀이요?”
줄리엣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노란 뱀은 엊그제 줄리엣이 우연히 만난 용병 출신 기사에게서 들은 이야기였다.
제롬이라는 이름의 기사는 용병 시절 자신의 동료가 거대한 뱀악령을 다루는 걸 보았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 마물의 특징은 줄리엣의 나비들과 상당히 습성이 유사했다.
“그건 그냥 들은 얘기예요. 확실하지도 않고요.”
“하지만 세상에 악령이 붙은 아티팩트가 그 은 열쇠 하나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건 그렇다. 로이도 비슷한 얘기를 들려줬었다.
이 세계의 위험한 존재들을 소환하는 아티팩트들 중에 유일하게 이름이 알려진 것이 '스노우드롭'이라고,
“다른 말로 하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티팩트들이 더 많이 존재한다는 거죠.”
“그렇죠……."
줄리엣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인즉, 세상에 활개치고 다니는 악령인지가 아가씨 나비들만이 아니란 얘깁니다.”
"내 인생에 악령이랑 얽히는 건 나비들로 충분해요."
줄리엣은 딱 잘라 말했고 에셀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정 그러시다면야. 하지만 아가씨.”
“네?”
"아무래도 다들 잊고 계시는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인데, 어르신은 괜찮으신 겁니까?”
“할아버지가 괜찮으시냐뇨?”
에셀리드가 애가 탄다는 듯 외쳤다.
"어르신은 수배자 신세시잖습니까. 수도에 이렇게 와 계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아.”
줄리엣은 그제야 에셀리드가 리오넬 르바탄의 안위를 걱정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확실히 그렇기는 하지.”
적왕, 리오넬 르바탄은 사실 수십 년 전에 억울하게 사형 선고를 받은 인물이었다. 황실의 권위를 위협할 정도로 그의 세력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공식적으로 리오넬은 황제가 다스리는 땅에 발을 들이는 즉시 사형대로 끌려가도 이상하지 않은 처지였다.
줄리엣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것치고는 지난번에도 수도에 오셨잖아요. 그때는 아무 일도 없었고요.”
"그거야 유일한 손녀딸이 부르시니 달려오신 거고요."
에셀리드가 투덜거렸다.
“언젠가 문제가 생겨도 저는 모릅니다.”
물론 황제의 눈을 피해 제도를 들락거리는 것은 위험하긴 하다.
하지만 리오넬 르바탄은 감수할게 뻔했다.
르바탄가 사람들은 수십 년 만에 재회한 외손녀이자 조카딸이라면 깜빡 죽는 면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괜찮으세요."
“들키면 전쟁이라도 하실 생각 이십니까?”
줄리엣의 느긋한 태도에 에셀리 드는 의아해졌다.
설마, 칼라일 공작의 군사력을 믿는 걸까?
줄리엣은 작게 키득거렸다.
“제가 그 정도도 대비하지 않고 할아버지께 편지를 보냈을까 봐요?”
줄리엣은 에셀리드에게 종이 한 장을 보여 주었다.
“당시 할아버지의 재판 판결문이에요.”
에셀리드는 판결문을 대충 훑었다.
'황제의 땅에 발을 들이는 순간 사형.' 그런 내용이었다.
정작 리오넬 르바탄은 참석하지 않은 채 진행된 궐석 재판이었고, 사실은 제도에 발을 들이지 말라는 으름장에 가까웠지만.
“이게 뭐 어떻다는 겁니까?"
에셀리드는 아직 알아채지 못한 눈치였지만 줄리엣은 자신했다.
“걱정 말아요, 에셀리드. 황제는 할아버지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할 테니까요.”
똑똑.
그때였다. 응접실 밖에서 하인 이 헐레벌떡 달려와 고개를 내밀었다.
“줄리엣 아가씨, 황궁에서 찾으십니다!”
“하!”
에셀리드는 이제 어떻게 할 거 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서 오세요, 줄리엣."
하지만 에셀리드의 염려와는 달리, 황궁에서 줄리엣을 부른 것은 리오넬 르바탄이 수도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 들통났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결혼식을 도와준 들러리들에게 주는 부케랍니다.”
정식으로 2황자비가 된 파티마가 입을 비죽이며 줄리엣에게 부케를 건넸다.
“황후 폐하께서 빠짐없이 나눠주라고 당부하셨어요.”
곡식 나락을 엮어 만든 부케였다.
겉보기에는 초라하지만 나름 의미 깊은 물건이었다.
부케라고 하면 흔히 꽃을 엮어 만든 걸 떠올리지만 곡식 나락으로 된 부케는 악마를 막아 주고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의미가 있었다.
“감사해요, 황자비 님.”
줄리엣은 싱긋 웃으며 곡식 날 알을 만지작거렸다.
“흥.”
파티마는 마지못해 고개를 팩돌렸다.
2황자비의 들러리로 예식 준비를 같이했던 귀부인들은 화기애애하게 성공적인 축제에 대한 감상을 교환했다.
"마법사들도 대단했지만, 이국에서 공수해 온 마수들은 구경해 보셨어요?”
“세상에, 정말 대단했답니다.”
줄리엣은 한가하게 축제 구경을 하러 돌아다닌 기억은 없었지만 얼핏 들은 것 같긴 했다.
황제가 큰 비용을 들여 진귀한 마수들을 사람들 앞에 전시했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줄리엣은 철장 안에 갇힌 마수들에게는 흥미가 없었고 조용히 앉아서 달리아의 정체에 대해서나 고민했다.
“그러고 보니…… 칼라일 공작께서는 출타중이신가요?"
누군가 조심스레 물었다.
고개를 든 줄리엣은 살롱 안에 앉아있던 귀부인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을 향해 있는 걸 알고서야 그게 자신에게 한 질문임을 알았다.
"나, 나쁜 뜻은 아니고요!"
질문을 한 귀부인이 필사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돌아오시면 두 분을 함께 초대하고 싶어서요……. 어떠세요?"
글쎄.
줄리엣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렸다.
'레녹스가 보관을 가지고 돌아오면….'
줄리엣은 그와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잔뜩 있었다.
어쩌면 레녹스 쪽에서 먼저 관계를 정리하고 싶어하지 않을까?
줄리엣이 막 대답하려 입을 열려던 때였다.
“이런, 여기들 모여 있었군요."
“황후 폐하!"
홀 안에 앉아 있던 귀부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예를 표했다.
자연스럽게 인사를 받아 준 황후는 비어 있던 줄리엣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줄리엣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에요, 황후 폐하.”
"어머, 그래 보이나?"
황후가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기뻐했다.
“네.”
줄리엣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황후는 고질적인 간염을 앓고 있어서 이 시기가 되면 바깥출입을 자제했다. 결혼식 기간에도 공식 석상에 얼굴을 몇 번 비치지 않을 정도였다.
정말로 심각한 듯, 얼마 전에는 온난한 바렌 지역으로 요양을 갔다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황후는 얼굴빛이 좋지 않았지만 이전보다는 한결 편안해 보였다.
"바렌에서 좋은 치료사를 만났지 뭔가. 젊은 사람답지 않게 착실하고 뛰어난 ...…."
황후는 꽤 신이 나서 줄리엣을 붙잡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한참 지루한 대화를 늘어놓는 데, 바깥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후 폐하, 약이 준비되었답니다. 들게 할까요?"
황후의 시녀인지 간병인인지가 온 것 같았다.
“아, 들어오게.”
줄리엣은 눈치껏 빠져나갈 타이 밍을 살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볼게요, 폐하.”
황후가 붙잡을세라 줄리엣은 우아하게 절을 한 뒤 흠잡을 데 없는 자세로 홀을 나왔다. 그런 줄리엣을 따라 다른 귀부인들 역시 밖으로 쪼르르 몰려나왔다.
귀부인들은 앞다투어 친근한 제안을 했다. 그러는 와중 줄리엣은 얼핏 약 쟁반을 들고 홀 안으로 들어가는 여자 하나와 스쳐 지나갔다.
“저, 모나드 백작님. 괜찮으시면 저희 집에 가서 차를.……."
“저희도 좋은 찻잎을 들여왔답니다.”
그러나 줄리엣은 창백해진 얼굴로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곤 곧장 걸음을 돌려 방금 전 스쳐 지나갔던 여자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꺄아!"
소매를 붙잡힌 여자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쿠당탕.
살짝 소맷자락을 붙잡았을 뿐인데, 붙잡힌 여자는 크게 놀랐는지 들고 있던 쟁반을 내던졌다.
그 바람에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은쟁반이 바닥을 굴렀다.
“모나드 백작? 아니, 왜 그러는가?”
황후와 황후의 시녀들이 놀라 줄리엣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줄리엣의 시선은 약 쟁반을 들고 왔던 여자에게 꽂혀 있었다.
"… 달리아?"
주홍빛 도는 긴 금발과 청보라 색 눈동자.
틀림없는 달리아 프란이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