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
“도착했습니다.”
삐이이이.
전서 매가 한 무리의 말 탄 기사들의 머리 위를 날고 있었다.
“저기가 기네스 후작의 저택입니다.”
레녹스 칼라일이 남부 후작가의 저택에 당도한 것은 늦은 오후였다.
잠든 줄리엣을 엘리엇과 다른 기사들에게 맡겨두고 온 뒤로, 그들을 여정은 비교적 평탄했다.
푸르륵.
별다른 사고 없이 목적지에 당도한 일행은 저택의 앞뜰에 이르러 말고삐를 놓았다.
남부의 대영주였던 기네스 후작의 대저택은 현재는 텅 비어있었다. 황궁에서 파견된 소수의 경비병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니, 칼라일 공이 아니십니까? 여긴 어쩐 일로…….”
경비병들은 뜻밖의 인물이 방문한 것에 놀랐다.
"들어가겠다.”
레녹스는 방문 목적을 그들에게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경비병들은 쭈뼛거리며 칼라일공작과 그의 기사들이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멀거니 지켜보기만 했다.
“저어, 전하.”
"왜.”
“줄리엣 님을 그렇게 두고 와도 괜찮을까요?”
레녹스와 함께 저택을 들어가던 밀란 경이 걱정스럽다는 듯 그에게 물었다.
게이트를 통과한 직후, 잠든 줄리엣을 남겨두고 온 것이 못내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레녹스는 담담히 대꾸했다.
“화내겠지.”
“예……. 분명 그러실 겁니다.”
밀란 경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레녹스에게는 줄리엣을 을몰래 떼어놓고 와야 했던 이유가 있었다.
줄리엣은 과거의 트라우마는 온전히 그녀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이라며 화를 내겠지만 레녹스의 관점은 달랐다.
나약한 것은 그녀가 아니라 레녹스 칼라일이라는 남자였다.
그는 도저히 이 풍경 속에서 줄리엣이 서 있는 장면을 견딜 수 없었다.
“그런데 줄리엣 양이 정말 여기에 보관이 있다고 하셨습니까?"
"허. 하지만 이래서야. 뭐가 남아있을지 모르겠군요.”
밀란 경이 가볍게 혀를 찼다.
기사들은 저택 이곳저곳을 둘러보면서 칼라일 공작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의 말대로였다.
후작저는 텅 비어있었다.
몇 남지 않은 하인들이 조금이라도 값나가는 물건을 챙겨 도망치는 바람에 을씨년스러웠다.
“줄리엣 양이 뭔가 잘못 아신게 아닐까요?”
"......."
레녹스는 줄리엣이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과거와 연관이 있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남부의 기네스 후작저예요. 거기에 전하가 찾으시던 물건이 있어요.”
레녹스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복도를 응시했다.
기사들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검고 거대한 표범 한 마리가 보란 듯이 히죽거리다가 유유히 몸을 돌려 어딘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마치 따라오라는 듯한 몸짓이었다.
“저쪽이군.”
기사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뒤쫓았다.
한참 걷던 표범은 반쯤 문이 열려있는 구석의 방 앞에 멈춰섰다.
무심코 그 안을 들여다본 기사가 기겁하며 물러섰다.
“윽."
“....… 끔찍하군요.”
온통 붉은 벽지로 장식된 방안은 살풍경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섬뜩한 도구들이 즐비했다.
“고문실인 것 같습니다.”
얼마 전 검은 표범이 보여주었던 환각에서 보았던 그대로의 풍경이었다.
붉은 방과 마주하는 순간, 레녹스는 그 안에서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던 메마른 여자의 환영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너, 실수한 거야.)
그런 그의 귓가에 킬킬거리는 악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생 그 여자가 고통받는 환영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다.)
레녹스는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한 흑표범의 목소리를 이를 악물고 무시했다.
“서재를 찾아.”
“예?”
레녹스는 붉은 방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줄리엣이 말했던 서재를 발견했다. 그리고 거기에 책장이 있었다.
레녹스는 어렵지 않게 숨겨진 통로를 여는 스위치를 찾아냈다.
"후작의 서재 안쪽, 녹색 가죽으로 양장 책이에요."
줄리엣이 말했던 그대로였다.
녹색 양장본 책처럼 생긴 스위치를 건드리자 숨겨진 공간으로 향하는 입구가 드러났다.
끼릭끼릭끼릭.
쿵.
“아니, 이게…….”
횃불을 들고 먼저 앞서 들어간 기사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기네스 후작의 사치스러운 수집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통 번쩍거리는 귀중품들이 즐비했다.
바로 직전 고문실을 보고 꺼림칙했던 기분을 단번에 날려버릴만큼 호화로운 장면이었다.
“전하!”
“차, 찾았습니다!”
몇 걸음 걷기도 전에 그 많은 귀중품 중에서 그들은 단번에 찾던 것을 발견했다. 많은 물건 중 보석 관은 단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섬세한 금관은 생각보다 크기가 작았다.
그러나 기사들은 어쩐지 그 보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게…….”
“사라졌던 공작가의 가보로군요!”
밀란 경과 하딘이 차례로 감탄했다. 그들도 말로만 들었을 뿐 직접 실물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특히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칼라일 공작이 이 보관을 찾아 헤맸다는 것을 알고 있는 두 기사는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경하드립니다, 전하."
“경하드립니다!”
두 사람을 따라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다른 기사들 역시 얼결에 함께 고개를 조아렸다.
손안에 든 자그마한 티아라를 그러나 칼라일 공작은 말없이 냉랭한 시선으로 노려볼 뿐이었다.
그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래, 드디어 손에 넣었네.
축하해.)
기뻐하는 기사들 사이로, 검은 표범이 유유히 걸어들어왔다.
훌륭해. 칭찬해주지. 하지만(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흑표범은 그에게만 들리는 파장으로 속살거렸다.
(과거에도 너는 그걸 손에 넣었어. 하지만 네 여자는 죽어버렸잖아.)
".....…!”
레녹스가 처음 듣는 이야기에 핏발 선 눈으로 검은 짐승을 노려보았다.
(이번엔 막을수있을까? 응?)
표범은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하면서 히죽거렸다.
가문의 안주인의 머리를 장식했다던 보석 관은 아름답고 세공이 섬세했지만 그것을 훑는 시선은 싸늘했다.
오랜 세월 찾아 헤매던 물건을 손에 넣은 사람이 보일법한 기쁨이나 성취감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전하.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감탄하며 보석관을 들여다보던 밀란 경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실은 지난번에 줄리엣 양께서 이 보관에 대해서 물으신 적 있습니다.”
밀란은 이미 지나간 일인 만큼 웃으며 가볍게 말했다.
“어떻게 아셨는지는 모르지만 프란 부부에 대해서 알고 계시더라고요?”
프란 부부는 이십 년쯤 전에, 공작가에서 보석관을 훔쳐 달아난 하인 부부의 이름이었다.
“어디서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좀 잘못된 소문을 들으신 모양입니다.”
밀란 경은 긴장이 풀린 듯 평소답지 않게 수다스러웠다.
“글쎄, 프란 부부가 딸과 함께 보물을 훔쳐 달아났다고…….”
“밀란.”
레녹스가 창백해진 얼굴로 그를 불렀다.
“줄리엣이 뭐라고 했다고?"
“아, 프란 부부에 대해서 …….”
“그것 말고.”
“예?”
눈을 끔뻑이던 밀란 경은 그제야 자신이 했던 말을 찬찬히 곱씹어보았다.
“프란 부부에게 딸이 있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딘.”
“예, 전하.”
“줄리엣은 어디쯤 있지?"
“아마 지금쯤이면……. 수도에 에도착하셨을 겁니다.”
하딘은 거리를 가늠했다.
케인 경을 비롯한 줄리엣의 일행은 그들보다 먼저 수도로 귀환하기로 되었으므로, 예정대로였다면 아마 지금쯤 수도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고 있을 터였다.
“지금 출발하면 언제쯤 수도에 도착할 것 갔나?"
“지금이요? 서두른다면 아마 모레쯤………. 전하?!”
좀처럼 평정을 잃지 않는 하딘이 비명처럼 신음했다.
칼라일 공작이 몸을 돌림과 동시에 들고 있던 티아라를 가볍게 그를 향해 던졌던 것이다.
"아니, 이걸 왜……….”
반사적인 운동신경으로 무사히 받아내긴 했지만 하딘은 기겁했다.
공작의 태도는 도저히 귀한 가보를 대하는 그것이 아니었다.
“바로 출발한다.”
“지, 지금 말입니까?”
휴식도 취하지 않고 돌아간다고? 엄청난 강행군이었다.
“서둘러.”
말을 맺음과 동시에 칼라일 공작은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아름다운 티아라와 함께 비밀 방 안에 남겨진 두 기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반짝반짝.
하단의 손에서 보석 관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그 순간이었다.
쿠르릉.
“무슨 소리지?"
안에 있던 공작가의 기사들은 물론이고 밖에서 경비를 서던 경비병들 역시 심상치 않은 그 소리를 감지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쿵, 하는 둔탁한 충격이 저택의 지반을 뒤흔들었다.
“전하!”
심상치 않은 소리와 함께 지반이 내려앉았다.
잊혀진 줄리엣